788화 모두의 불청객인 겨울 (1)
싱그러운 새싹과 꽃이 지천에 가득하던 봄을 지나 지글지글 끓던 여름을 지나서 가을바람이 한바탕 분 끝에 경국에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내려갔고, 눈이 내린 창산의 정산은 날이 갈수록 하얗게 변했다. 경도 안에도 차가운 비가 내려 추워졌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두꺼운 솜옷을 입고 양손을 비비며 바쁜 걸음으로 걸어갔다.
천하대로를 지나는 마차 바퀴가 지면과 부딪치면서 신경을 건드리는 단조로운 소리를 냈다.
말이 겨울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듯 흰 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마차 안에 앉은 범한은 옷깃을 세우고 손에 연신 입김을 불면서 모피 외투를 꽁꽁 싸맸다.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이번 겨울은 너무 빨리 왔다고 투덜거렸다.
범한은 방금 정왕부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정왕이 병이 났는데, 병세가 상당히 위중했다.
지금 이홍성은 경도에 있지 않았고, 유가 군주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범한이 자식 노릇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가서 탕약을 준비해주고 말동무를 해줘 왕야의 우울한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그의 신분에 이런 일을 하는 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정왕가와 범씨 집안은 돈독한 사이였고, 또 이홍성에게 약간은 양심을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성심성의껏 정왕을 간호했다.
범한은 겉으로만 늙어 보일 뿐 사실은 체력이 좋은 정왕이 갑자기 병에 걸린 이유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예정보다 일찍 찾아온 겨울의 추위 때문이 아니라 황족에 불어 닥친 혹한 때문이었다.
황태후가 죽고, 장 공주도 죽고, 정왕의 가족 중 절반이 이번 변란으로 죽었다. 그리고 이 잔혹한 상황으로 인해 결국 농민으로 살아온 정왕마저도 쓰러지고 말았다.
정왕부를 나온 범한은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입궁하지도 않았다. 그는 포월루로 향했다. 오늘은 사천립과 상문이 경도로 돌아와 업무를 보고하는 날이었다.
범한은 반드시 두 심복의 입을 통해서 지금 천하의 가장 은밀한 소식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포월루에서 잠시 머무르면서 포월루가 천하에 뻗은 촉수로 조사한 소식을 본 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상문의 온순한 얼굴과 사천립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쓸데없는 말들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정보는 특별한 점이 하나도 없었고, 감찰원의 정보와 차이도 없었다.
대동산 사건은 이미 석 달 전에 일어난 일이었고, 온 천하에는 겨울이 찾아와 있었다. 북제에서 고하 대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종사의 사망 소식에 천하 사람들 모두가 놀랐지만 범한은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건 황제 폐하의 원래 계획안에 들어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범한은 단지 고하가 죽은 뒤 북제의 대응에 경계할 뿐이었다.
하지만 2개월 동안 북제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상삼호가 남쪽에서 계속해서 경국 탐색적인 공격을 막는 것 이외에 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하명기의 상경성 거점이 빼앗기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북제 황제는 결국 범사철에게 손을 대기 시작했다. 소문에 따르면 범씨 가문 둘째 도련님은 지금 상경성 안에서 무척이나 불안에 떨고 있다고 했다. 물론 범한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이의 편지를 통해 그는 젊은 황제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자신에게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단박에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범한을 불안하게 만드는 건 해당타타였다. 왜냐하면, 자신과 아주 친밀한 관계이자 천일도의 계승자인 해당타타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심지어 천일도 내부 사람들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봉춘이라는 이름의 명의가 경도로 들어와 두각을 드러내 태의원의 인정까지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다.
봉춘이라는 명의는 의술 실력이 탁월했지만 북제 출신이기 때문에 황궁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대신들의 저택에 파견되었다.
정왕의 병은 범한이 직접 치료하고 있었기에 범한은 봉춘 선생과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없었고, 이에 그처럼 영리한 사람도 머지않은 미래에 봉춘 선생이 진원에 들어가 모든 힘을 쏟아 진 원장의 생명을 지키리라는 건 예측하지 못했다.
사실 고하가 죽기 전에 계획한 수들은 조밀하지 못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다만 분명 경국 내부의 상황을 어떤 추세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범한의 머릿속에는 온통 해당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범한은 고하가 해당타타에게 뭘 지시했는지는 몰랐고, 자신이 언제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될지, 어떤 신분으로 그녀와 조우하게 될지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경국 조정 전체가 경계하고 두려워할 만한 일도 있었다. 고하가 죽자 북제는 이를 비밀에 부치지 않았다.
오히려 대대적으로 장례를 치렀고, 각 로와 군에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관리와 백성들이 통곡했다. 북제 조정은 고하의 죽음에 불안해하거나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반면 동이성의 그 사람······ 경제의 계획에 얽혀들어 중상을 입은 사고검은 지금쯤이면 사망해야 맞았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검성(劍聖)이라 불리는 그의 몸은 작지만 강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독한 상태였음에도 가냘픈 숨을 몰아쉬며 목숨 줄을 꽉 쥐고 놓지 않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사고검은 검려 안에 숨었다. 검성이라 불리는 사고검은 이미 쓸모없는 불구가 되어 버렸지만, 그의 명성은 동이성 전체를 지탱하는 근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위독해지자······ 동이성 내부에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사고검이 죽게 되면 성주부와 검려 사이에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경제에게 사고검의 생사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고검이 죽은 뒤 동이성을 누가 책임지는지가 더 큰 문제였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동이성은 북제와 경국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바닷가에 홀로 고립된 동이성은 주변 제후국들에 포위되어 있었다. 그러니 사고검이 죽는 순간 맹수들의 집합이었던 동이성은 선홍빛의 맛있는 고깃덩이로 변할 것이었고, 북제 젊은 황제나 경국 황제 모두 고깃덩어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그때 황제 폐하가 고깃덩어리를 가져올 사람으로 누구를 보내려 할지를 모를 뿐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사천립과 강남 황실 금고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록 소문무가 계속 비밀 보고를 보내고 있었지만 범한은 사천립이 직접 느낀 인상을 더욱 신뢰했다.
황실 금고의 생산은 여전히 높은 효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곱째 섭 대행수를 비롯한 대행수들이 범한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 덕분에 3대 작업장의 수준은 점차 과거 섭가 시절의 수준으로까지 향상되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범한은 살짝 안심되었다. 그는 자신이 감찰원과 황실 금고를 쥔 이유가 황제 폐하의 신임 덕분이든 아니면 자신의 권력 덕분이든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문사자 중에서 줄곧 범한의 곁을 지키고 있는 사천립을 제외한 후계상, 양만리, 성가림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범한이 장애물을 제거해주고 금전을 지원해주면 세 사람의 능력을 볼 때 오래지 않아 경국 조정에 핵심 인물로 성장할 게 분명했다.
“조정은 지금 파고들 틈이 너무 많네. 폐하가 젊은이들을 너무 많이 등용해서 더는 나이와 경력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거든.”
범한이 사천립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자네가 세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준비해두라고 말하게. 봄이 되면 아마도 조정에서 경도로 와서 업무를 보고하라 할 테니까.”
양만리는 아마도 공부로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될 것이었고, 후계상은 이번 일로 입지가 안정된 데다가 폐하의 눈에도 든 만큼 두 계급 승진해 교주 지주로 부임하게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순조롭게 관직 생활을 해온 성가림의 경우 아마도 소주부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한 사람이 될 것이었다.
사천립이 입술을 살짝 삐쭉거렸다. 그는 과거 4명의 가난한 서생이었던 사람들이 몇 년 만에 각지에서 이렇게 성장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에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우울해졌다.
그의 생각을 알아챈 범한이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는 건가?”
“경력이 너무 얕아서 사람들의 신망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더구나 세 사람은 이미 조정과 민간에 스승님의 제자라 알려져 있으니······ 비방을 당할까 걱정됩니다.”
사천립이 진지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범한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관리 수백 명이 죽었으니 빈자리를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자격과 경력이 충분한 관리를 어디서 찾아낸단 말인가? 경력이 얕다는 말은 하지 말게나. 당시 후계상과 이름을 나란히 했던 하종위는 심지어 계상보다도 늦게 조정에 들어왔는데도 지금 어서당에 들어가서 조정 일을 의논하고 있네······. 하종위는 경력이 충분하다고 보는가?”
하종위란 이름은 범한의 머릿속에 특별히 깊은 인상이 박혀 있었다.
과거 일석거에서 그는 처음으로 약간은 성실하고 정직해 보이는 젊은 서생과 만났었다. 하지만 이 서생은 나중에 경도에서 그의 장인어른이 관직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등 여러 일을 조장했다.
본래 예부 상서 곽유지의 아들 곽보곤과 둘도 없이 친한 관계였던
이 사람은 정통 황태자 파에 속해 있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이후 도찰원 어사가 되어 2 황자를 위해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다시 황태자 편에 서면서 두 번이나 태도를 바꾼 이 사람은 나중에는 자신이 원래부터······ 장 공주 편이었다는 걸 보여줬다. 장 공주의 뜻에 이리저리 태도를 바꾸어 온 것이다.
하지만······ 이후 경도 반란이 일어나자 도찰원 좌도어사인 그는 어사들을 이끌고 황태자 이승건에게 반대하며 반란군이 경도로 들어오는 시간을 하룻밤 지연시켰다. 이로써 황궁에 침입한 범한은 통제권을 장악해 대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때야 비로소 사람들은 하종위가 황태자, 2 황자, 장 공주 중 누구의 사람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저 폐하의 사람이었다. 이전부터 줄곧 말이다.
경도로 돌아온 폐하는 큰 공을 세운 하종위에게 상을 내렸고, 그의 입지는 불화살처럼 빠르게 상승했다. 폐하는 하종위에게 도찰원의 직을 겸하면서 문하중서 의사에 참여할 권한을 주었다.
이건 하 어사가 훗날 연로한 서 대학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거란 의미였고, 그에게 누구보다도 화려한 앞길이 열렸다는 의미였다.
경도 반란 중에 하종위는 범한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조회나 외부에서 범한은 만나면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 조금도 도발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다.
하지만 범한은 하종위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전에 이미 하종위의 마음속에 있는 권력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가 하종위처럼 다른 사람을 팔아서 성장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또는 자신이 과거 하종위를 때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는 하종위와 같은 인물들은 과거 원한을 절대 잊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범한은 하종위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방비해둘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폐하에게 큰 신임을 받고 있는데다가 소인은 군자보다 항상 두려운 존재였으니 말이다.
오늘 관리 사회는 이미 하종위에 대한 여론이 분분한 상태였다. 그는 세 가지 성을 가진 종놈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모두들 이 별명이 하종위와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별명이 범씨 집안 서재에서부터 나왔다는 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따금 범한은 가슴에 손을 얹고 하종위가 자신보다 더 부끄러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은 어째서 도대체 뭣 때문에 그를 이렇게까지 미워하는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사실 그가 하종위를 눈엣가시로 여기며 미워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하종위가 누이인 약약에게 뜨거운 추파를 던지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눈빛을 항상 마음에 담아두었고, 기억했으며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진원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자네 누이일 줄 몰랐네.”
범한이 상문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는 과묵하면서 온화한 상문을 무척 좋아했지만, 남녀 사이의 정과 같은 건 아니었다. 그냥 상문하고 있으면 대보와 함께 있을 때처럼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그가 지금 말한 상문의 누이는 바로 그날 진원에서 진평평을 보러 갔을 때 공연을 하고 있던 여자였다.
진평평은 상문의 목소리를 아주 좋아했지만, 상문은 포월루를 관리해야 하고 범한의 큰 계획을 천하로 확장하는 일을 맡고 있어 경도를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생을 즐기며 사는 걸 좋아하는 진평평은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연경에 있는 상문의 누이를 경도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