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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85화 (785/1,108)

785화 전우를 배웅하다 (2)

진평평이 두 눈을 부릅뜨고 범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이후 비슷한 유형의 사람을 보게 되었지······. 바로 자네 아들 말이네.”

“현공 사당에서 일로 범한도 경맥을 심하게 다치게 되었지만, 과거 폐하의 경우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어. 게다가 이후 강남에서 고하의 천일도를 배운 뒤로 점점 좋아졌지.”

진평평이 말했다.

“폐하는 범한처럼 운이 좋지 못했고, 천일도를 배울 수도 없었네. 그렇다면 상처가 어떻게 좋아졌을 것 같은가? 그때 자네는 폐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나보다 적었지.”

진평평이 계속 말했다.

“폐하께서는 줄곧 숨기고 계셨지만 나는 사소한 일을 계기로 비밀을 알아챌 수 있었네. 비개가 담주에서 돌아왔을 때 범한이 패도 공결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패도 정기가 엄청난 후유증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었거든. 바로 그때 내 머릿속에 온몸이 굳어버린 폐하의 모습을 떠올랐네.”

“그래서 현공 사당에서 폐하가 가진 비장의 패가 무엇인지 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범한이 나서는 바람에 확인할 수 없었어.”

진평평은 말하면서 계속 범 상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범 상서가 자기 아들에게 황제를 구해 공을 세우라고 한 것이 진평평의 계획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모든 걸 알았음에도 말할 수는 없었던 이유는 자네도 이해할 거라 생각하네.”

범건이 홀연히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담주로 돌아가서 노년을 보낼 생각이니 시간이 날 때 한번 찾아오게나.”

오랜 전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기에 진평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가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사람이건 아니건 어쨌거나 그는 범한의 친아버지였다.

범한이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으로 영혼이 일반인들과는 다르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고, 이에 진평평와 범 상서는 상식적인 도리에 따라 범한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범한에게 견디기 어려운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이 일에 대한 관점에서 만큼은 생각이 같았다.

진평평이 탁자 옆에 놓인 구리 방울을 가볍게 흔들자 낭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오랜 시간 시중을 들어온 늙은 종이 들어오더니 그의 바퀴 달린 의자에 앉혔다.

“내가 배웅해 주겠네.”

진평평이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힘겨운 기침에 소매에 침방울을 튀었다. 잠시 뒤 안정된 그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몸이 갈수록 안 좋아지다 보니 약간 독에 중독된 것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군.”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범건이 아무 말 없이 저택 밖으로 나갔다.

늙은 종이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뒤를 따랐다. 얼마 가지 않아 공사장 앞에서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이 멈춰 서서는 서로를 마주 보고 인사했다.

“나는 이미 받아들였네.”

진평평이 범건을 향해 말했다.

범건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숙인 채 잠시 이 말이 진실일지 거짓일지를 생각했다. 그는 진평평이 자신을 배웅해 주려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오래전에 그들은 함께 동해 바닷가를 거닐었고 태평 별궁에서 모여 놀았으며, 엄청난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변했고, 한 사람은 물러나려 하고 있었다. 그가 관직을 사직하고 담주로 돌아가면 경도에 남아 폐하를 따를 진평평은 분명 고독할 것이다.

바로 범한의 말과 같았다. 십여 년 동안 그와 진평평이 서로를 의심하고 왕래가 점점 줄어들었지만, 과거 전우로서 우정까지 버린 건 아니었다.

풍류를 아는 사람은 온갖 풍상을 겪고 무대에서 물러나야 할 때 깔끔하게 물러나야 하는 법이었다.

임약보는 과거 세 사람의 조직에 들어 있지 않았기에 철저하게 물러나지 않아도 되었지만, 범 상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를 수 없었다.

폐하가 천하의 군주가 되기 전에 퇴직해 은거하는 것 말고 다른 더 좋은 선택은 없으니 말이다.

범건이 떠나기 전에 미간을 찌푸리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자네는 그때 나를 의심했으면서 어째서 오죽에게 그 애를 데리고 담주로 가라 한 건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자네가 이미 대가를 치렀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자네의 진심을 계속 보고 싶었거든.”

범건의 입꼬리에 비웃음과 상처가 담긴 미소가 걸리더니 손을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건의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평평이 몸을 살짝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바퀴 달린 의자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 가시게나. 잘 가시게······.”

진평평은 평생 동안 세상을 뒤흔들만한 일들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겪어왔고, 절체절명의 위기도 많이 겪어 왔지만, 오늘처럼 낙담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대면한 적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일생 중에서 만난 가장 강력한 적이었으며, 게다가 어떤 약점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늙은 종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소공야를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주인이 우울해하는 이유를 아는 늙은 종이 달래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무엇이든 조사해낼 수 있으시지만 현공 사당과 골짜기 습격 사건에서 나는 이미 두 번이나 안지를 위험하게 만들었네. 이런 일까지 했는데도 나와 안지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잖는가? 안지는 항상 운이 좋으니 폐하께서는 그를 의심하지는 않으실 거고 이 일은 이렇게 끝날 거네.”

진평평이 추운지 양털 담요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범건을 떠날 준비를 했고 진평평은 포기했으며 범한은 깨닫게 되었다.

세상의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만일 앞으로 어떤 큰 파장도 생기지 않는다면 끓는 기름에 뚜껑을 덮어 식힐 수 있겠지만, 만일 어떤 일이 생긴다면 기름이 튀어 올라 모든 걸 남김없이 태워버리리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 끓는 기름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리라는 것도.

* * *

한편 경국 경도가 점점 안정화 되어갈 때 북제 상경과 동이성의 하늘 위에는 암담한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상경성 밖에 서산을 돌아 북쪽으로 가면 검푸른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다른 산들과 다를 게 없는 산이었지만 천하 사람들은 이 푸른 산을 다른 산과는 다르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천일도 집단이 수행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고하 대사의 제자와 손제자들은 이곳 산에서 수행을 마치고 세상에 나와 곳곳에서 검을 통해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활동했다.

지금 푸른 산에는 온통 암담하고 침울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천일도 제자들은 전부 불안한 표정으로 산 정상에 있는 검은 색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양손의 주먹을 꽉 쥐고 입을 다문 채 겁에 질린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돌길을 통해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어두운 얼굴을 한 채 천일도 제자를 본체만체했다.

산 정상에는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는 상경성 황실 귀족들과 대신들 명장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장묵한 선생에게 수학한 태학 대인이나 장영후나 각 부와 사를 책임지는 고위 관리들도 있었다. 그리고 대략 절반 정도는 이 산에서 수행했던 사람들로 세상 곳곳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오늘 다시 산에 돌아와 있었다.

황제의 명을 받아 남쪽 일대에서 연경과 창주 정북 진영 양쪽에서 공격해 오는 경국 군대를 막고 있는 상삼호를 제외하면 북제 조정과 민간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걸출한 위인들은 모두 푸른 산에 모여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북제 상경성에 있던 정치 중심이 오늘은 완전히 푸른 산으로 이동해 있는 셈이었다.

천일도 제자들은 이미 산 정상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를 예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최근에 일어난 그 일은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라서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경악스러운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슬픔 가득한 표정으로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기다렸다.

정오 무렵이 되자 북제 황제 폐하가 비통한 표정으로 돌길을 따라 산에 올랐다. 그의 옆에는 랑도가 있었고, 뒤에는 하도인이 있었다.

시위들이 푸른 산 돌길 아래 흩어져 있었다. 용포도 입지 않고 어가도 없이 온 황제가 침울한 얼굴을 한 채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올랐다.

돌길 옆에 엎드린 천일도 제자들은 한층 더 슬픔에 휩싸였다. 북제의 수호신이자 세상에서 가장 신과 근접했다고 일컬어지는 대종사가 세상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 * *

대동산 위에서 경국 황제는 수십 년 동안 힘겹게 수행한 패도의 정기를 왕도의 기세를 통해 고하 대사의 몸에 주입했다. 거대한 바다와 같은 정기가 갑자기 몸에 주입되자 고하 대사의 노쇠한 몸은 순식간에 망가져 버렸다.

상삼호의 등에 업혀 북제로 돌아온 고하 대사는 푸른 산 위에 책상다리하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쌀 한 톨도 먹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지만, 몸의 근육은 이미 점점 갈라지고 터지기 시작해서 몸 안에 혈관과 근육이 드러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상태로 몸이 해체되는 모습은 정말이지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크고 부드러운 두루마리가 대종사의 몸을 가리고 있어 옆에서 시중을 드는 제자들이 대종사의 몸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새벽부터 상경성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아왔고, 왕공과 대신들의 모두 제자들과 예를 갖추 인사한 뒤 고하 대사를 만났다. 그들은 모두 국사를 마지막으로 보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죽기 전에는 조용할 수 없는 법이었다. 긴장한 모습으로 옆에서 스승을 보살피는 둘째 제자 목봉의 표정은 약간은 화가나 보였지만 어떤 이견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임종 전에 사람들과 만나기로 한 건 스승 고하 대사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고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아주 짧게 만났던 것과 다르게 태학에게는 비교적 오래 당부를 남겼다.

이 나라를 수십 년간 지켜왔던 고하는 오늘 떠나려 하고 있었다. 심경을 수련해온 그였기에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는 않았지만 단 한 가지 내려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이 나라였다. 그래서 오늘 그는 이 나라와 마지막 고별을 하고 마지막 당부를 남기려 했다.

종사가 죽든 죽지 않든 그의 말은 항상 이 나라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을 활용해 북제 대신들에게 당부를 남김으로써 황제 폐하가 앞으로 통치를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안정된 기반을 마련해 주려 했다.

군대 측 고위 장군을 바라보던 고하가 무의식적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폐하는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나이가 어린 게 문제였다. 비록 심중이 죽고 상삼호가 귀순하였지만, 만약 자신이 정말 죽게 된다면 젊은 황제가 과연 군대를 온전히 장악할 수 있을까?

고하가 바라보고 있는 군대 측 고위 장군은 추밀원 정사였다. 그는 몇 마디 당부 말을 남기던 국사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두려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북제는 황족이든 고위 장군이든 모두 고하 대사에게 무한한 존경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하는 경국 섭류운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영향력과 능력을 모두 북제 조정에 쏟아 넣어 왔다.

천일도 둘째 제자인 목봉이 스승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와 황태후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할까요?”

전체 천하에서 고하만이 황제와 황태후에게 들어오라고 말할 자격이 있었다.

고하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목 부분의 갈라진 피부가 옷깃에 쓸리면서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극심한 통증은 일반 사람이라면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고하 대사는 마치 아무 느낌도 없는 듯 살짝 미간만 찌푸릴 뿐이었다.

왼쪽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목봉이 스승의 등에 피가 묻은 걸 보고는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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