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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84화 (784/1,108)

784화 전우를 배웅하다 (1)

범한이 진평평의 노쇠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폐하의 계획이었다고 하지만 폐하의 계획을 추진해온 사람은 대인이 아니십니까. 덕분에 경국이 직면한 위험은 열 배······ 심지어는 백 배 더 커졌습니다. 더욱이 경도는 내란만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폐하가 설사 다시 마음을 모질게 다 잡으셨다고 해도 마지막에 이런 결과를 보고 싶어 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사람이 개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으냐?”

한참 침묵하고 있던 진평평이 입을 열었다.

“개를 몰아내려면 전부 때려죽여야 하는 거다. 나는 폐하의 마음이 일순간 약해질까 걱정해서 그랬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가 되겠냐?”

“아뇨,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범한이 진평평 곁으로 다가가 그의 마른 손을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령 이치상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폐하의 마음은 편치 않으실 겁니다. 게다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면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게냐? 이건 폐하게 정하신 계획이고, 나는······ 그저 집행자였을 뿐이야.”

진평평이 아주 자연스럽게 범한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며 차갑게 말했다.

“너도 너무 많이 고민할 필요 없다. 세상에 그렇게 복잡한 일은 없으니까.”

“복잡한 일이 없다고요?”

범한이 걱정과 분노가 가득 실린 눈빛으로 진평평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말해보십시오. 현공 사당에 그림자를 자객으로 위장해 보냈던 이유가 뭡니까? 어째서 진씨 어르신 등허리에 치명적인 상처가 있었던 겁니까!”

진평평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시체를 본 것이냐?”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림자가 움직였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가 갑자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보았으니 이제 그 상처는 없겠군요.”

“네가 그렇게 주의 깊을 줄은 몰랐다.”

진평평이 말했다.

“그림자가 현공 사당에 자객으로 나타난 건 내가 지시한 게 맞다. 네가 지금 당장 폐하에게 달려가서 나를 고발할 수도 있겠지······. 너도 알다시피 그림자는 두 가지 비밀스러운 신분을 가지고 있고, 이건 나와 너 말고는 아무도 모르고 있어. 폐하도 이 사실은 알지 못하시지.”

범한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그것 때문에 제가 말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말해서 뭘 하려는 게냐?”

“진씨 어르신이 폐하를 배신한 이유가 뭡니까?”

범한이 마침내 용기를 내어 장 공주가 죽기 직전 진평평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던 질문을 토해냈다.

“반역에 이유는 필요하지 않아.”

진평평이 지난날과 다름없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럼 원장 대인이 그림자를 시켜 진업을 죽인 이유는 뭡니까? 제가 그에게서 뭘 알아낼까 봐 걱정돼서 그러신 것 아닙니까?”

범한의 쏟아지는 질문에도 진평평은 아무 말 없이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한참 생각하던 그가 이만 가라는 손을 흔들었다.

범한이 분노에 찬 눈빛으로 차갑게 진평평을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간곡히 말했다.

“제가 연루되는 게 싫어서 떼놓으려 하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일인 만큼······ 이제 본인도 생각하셔야지요.”

범한의 간곡한 말에 진평평은 마음이 움직였지만, 표정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너나 자신을 좀 생각하거라.”

범한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비록 진평평은 줄곧 인정하지 않았지만, 범한은 그의 태도를 통해서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씨 집안은 과거 태평 별궁의 사건에 참여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번 반역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범한이 점점 세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씨 어르신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늙고 연로한 진씨 어르신은 폐하가 범한을 계속 기용한다면 언젠가는 과거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진씨 집안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씨 집안이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말미암아 그 뒤에 있던 피비린내 나고 을씨년스러운 사실도 드러났다.

범한이 일어나서 진평평의 어두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제 아버지와 제 어머니를 위해 원장 대인께서 오랜 시간 노고를 해주셨으니 이제는 자신을 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몇 년 살지 못한다고 너에게 말했던 것 같은데.”

진평평이 웃으며 말했다.

범한이 괴롭고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습니다.”

진평평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범한이 떠날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말했다.

“상자는 제 손에 있습니다.”

진평평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진 평평은 아주 결연한 발걸음으로 문을 박차고 나가는 범한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상자가 네 손에 있은들 어쩌란 말이냐? 이 일에 너를 끌어들일 수는 없다.’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평상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진평평이 있는 방안으로 들어와서는 옆에 앉았다. 바로 범한이 앉았던 자리였다.

“폐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네.”

중년 남자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점은 나와 안지의 생각이 같지.”

중년 남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범한의 아버지인 호부 상서 범건이었다.

난데없이 진원에 나타난 그는 평상시 진평평만 보면 핏대를 세우던 모습과 다르게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조정에서 진평평과 범건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사이였지만, 범한이 경도에 온 뒤에는 조금씩 관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진평평이 두 눈을 감고 담담히 말했다.

“상자가 그 애의 손에 있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었겠지?”

범건이 떪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애는 상자를 자기 침대 아래 두면서 천하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네. 정말 귀엽지 않은가.”

진평평이 눈을 부릅뜨고는 범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비밀을 지킬 능력이 없지 않은가?”

“그 정도 능력은 아직 있네.”

범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내 집에 밀정을 두 명 심어두었는데, 한 명은 안지가 일찌감치 발견했고 다른 한 명은 이미 죽었네. 어쨌든 이런 밀정은 돈이 들지 않으니 폐하도 개의치 않으실 거야.”

“개의치 않으실 거라고? 개의치 않으셨으면 대동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 호위를 전부 데리고 가서 사고검의 미친 칼춤에 죽게 하지도 않으셨겠지.”

진평평이 조소 가득한 눈빛으로 범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어쩜 그리 세심하지 못한 것인가. 모든 힘을 쏟아 기른 호위가 전부 죽어버리지 않았는가. 자네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숨겨 두었든 이제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네······. 폐하께서 인정사정없이 사지로 모두 몰아넣어 버리셨으니까.”

“그래, 나는 이제 아무 힘도 없네.”

범건이 씁쓸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네.”

범건이 진평평을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자네는 나보다 잘난 게 뭐가 있다고 그러나? 자네도 정양문 전투에서 감찰원 정예병 수천 명이 죽지 않았나. 그러니 앞으로 2년 안에 폐하께서는 인원 보충을 핑계로 감찰원을 변화시키려 하실 거네. 그러니 자네도 나처럼 퇴직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가?”

진평평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직 범한이 살아 있으니 폐하께서 감찰원을 함부로 건들지는 못하실 거네. 오히려 나는······ 오주에서 꼬리를 감추고 있는 늙은 여우 임약보가 걱정되는군. 오랜 시간 참고 인내하다가 마침내 기회를 봐서 숨겨 두었던 사람들을 모두 사위에게 맡겼는데 결과가······. 아마 지금 오주에서 피를 토하고 있을 거네.”

범건도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임약보 사람들이 안지를 따라 황태자에게 대항했으니 앞으로 큰 포상을 받을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지. 폐하께서 임약보가 숨겨 놓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아무도 모르고 있어. 폐하께서 지금 뭘 하시기는 쉽지 않겠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그들을 제거하려 하실 거네.”

“그렇게 외부에 적도 없고 내부 걱정거리도 사라지면 우리 세 늙은이의 팔도 잘리겠지.”

범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폐하는 세상 최고의 군주가 되려는 포부를 가진 용장이시네.”

“그렇지. 오래전에 우리가 폐하를 따르기 시작했을 때처럼 말이야.”

진평평이 두 눈을 감으며 천천히 말했다.

“폐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일 거네.”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범 상서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경도에서 정왕부에 숨어 있었던 것은 경도 상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네. 진작 섭씨 집안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다만······ 폐하께서 대종사일 줄을 정말 몰랐네.”

“나는 폐하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실력을 갖추고 계신다는 건 알았네.”

진평평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섭류운이 갑자기 폐하의 편에 설 줄은 몰랐어.”

“우리 두 사람 모두 폐하의 한쪽 면만 알고 있었구먼. 만약······.”

범 상서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진평평은 굳이 듣지 않아도 오랜 전우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기에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은 없네. 왜냐하면,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자네는 나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나도 자네를 믿으려 하지 않았으니까······. 가장 믿어야 할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안지가 이전에 말한 적 있네.”

범 상서가 말했다.

“만약 나와 자네가 서로를 믿는다면 일을 하기가 훨씬 수월할 거라고······ 그때 알았지. 안지가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빈틈없이 숨긴다고 하더라도 그 애는 이 일을 알아챌 수 있을 거네.”

“그 애는 섭씨 아가씨와 폐하의 아들이네. 그러니 당연히 평범한 아이가 아닐 수밖에 없지.”

진평평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는 여전히 마음속 황제 폐하에 대한 지고지순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네는 폐하가 대종사라는 사실은 언제 눈치챘나?”

마음이 홀가분해진 범 상서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몇 년 되었네.”

당시 일을 떠올리자 진평평의 미간에 드리운 주름이 풀어졌다.

그때는 북위가 천하 한가운데 우뚝 서서 강력한 국력을 뽐내던 시절로 경국이 처음으로 북벌을 단행했을 때였다.

전쟁은 무척이나 어려웠고, 더욱이 당시 황태자였던 황제 폐하는 전투로 중상을 입어 온몸이 굳은 채 죽을 운명에 처했었다.

다행히 진평평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이 일은 진평평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일 중 하나로 천 리 길을 급습해 다리를 잃는 대가로 소은을 생포한 일과 함께 전설로 남아 있었다.

범 상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우리 모두 그때 폐하가 중상을 입어 무공을 잃었다고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시 폐하는 정말 용맹한 장수셨네.”

“그 부상에는 수상한 점이 있었네.”

진평평이 천천히 말했다.

“전신이 뻣뻣하게 굳는 건 절대 외상에 의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나는 영 재인과 함께 폐하를 계속 보살폈기에 경맥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어. 마치 경맥이 전부 끊어진 것처럼 보였지······. 경맥이 전부 끓어진 사람이 살 방법은 없지 않은가? 폐하께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내가 얼마나 좌절하고 울었는지 모른다네. 하지만 뜻밖에도 폐하께서는 살아나시더군. 경맥이 전부 끊어진 사람이 살아난 경우는 본 적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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