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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83화 (783/1,108)

783화 황제의 마음 (2)

늙은 절름발이 노인이 손가락 두 개를 뻗으며 비웃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 황태자를 대신해서 반역에 가담한 관리들을 두둔하면 폐하께서 화를 못 이겨 너를 멀리 쫓아낼 거라고 믿었던 게냐?”

진평평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랬다면, 상황을 너무 긍정적으로만 생각했던 거지. 그런 졸렬한 방법으로 누구를 속일 수 있겠니? 폐하가 어서방에서 화를 내신 이유는 네가 죄인들을 살려 달라 부탁해서가 아니야. 폐하께서는······ 지금 상황에 네가 도망칠 생각만 해서 화를 내신 거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 폐하를 보는 게 무서운데 어떻게 경도에 계속 머무를 수가 있겠어?’

그리고는 최근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폐하께서 제 생각을 읽으셨다면 이후에 그런 조처를 내리신 이유는 뭡니까? 설마 저 하나 때문에 그렇게 많은 관용을 베푸셨다는 말입니까?”

“폐하께서는 관용과 명성이란 족쇄로 네 발목을 묶으려 하시는 거다.”

마른기침하던 진평평이 범한의 똥 씹은 얼굴을 보고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폐하께서 본인을 낮추면서까지 네 명성을 높여준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지 않은 거냐?”

진평평의 말을 듣자 범한은 순간 마음이 섬뜩해지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던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충격에 몸 전체가 딱딱하게 굳은 범한이 힘없이 주저앉아 몸을 떨었다.

범한의 모습을 본 진평평이 한숨을 쉬며 임시 주택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밖에 작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라도 그가 깨달았으니 내가 오랜 시간 쏟아부은 노력도 헛되지는 않은 셈이야.”

범한의 얇은 입술의 살며시 떨렸다.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진평평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셋째는 어찌합니까?”

“셋째는······ 나이가 아직 어리지 않니.”

진평평이 눈꺼풀을 내려뜨리며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당장 황태자를 세울 수 없으시단다. 하지만 만일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서 황제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면? 생각보다 일찍 서거하시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을 대비해 용상을 물려받을 사람으로 널 선택하는 거야말로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인 거지.”

“저는 범씨입니다······. 저는 범씨 가문 조상들에게 제사도 지냈다고요!”

범한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졌다.

진평평이 밖의 동정을 힐끗 살피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목소리를 그렇게 높여서 어쩌겠다는 거냐? 세상일은 목소리를 키워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주먹이 센 사람에 의해 해결되는 거야······. 네가 앞으로 이씨가 될지 범씨가 될지 폐하의 말 한마디에 정해질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 주먹이 가장 강한 사람은 폐하다.”

진평평의 말에 풀이 죽은 범한이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그는 최근에 폐하가 너그럽고 인자하게 행동하는 배후에 이런 큰일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상황을 보면 이 일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발생할 일이야. 아마도 셋째가 장성하게 되면 폐하께서는 셋째가 너를 이기길 원하실 거고, 그렇게 되면 이 일도 자연스럽게 없던 일이 되겠지. 어쨌든 폐하를 제외하고 나와 너를 말고 누구도 알지 못할 테니까.”

말을 하던 진평평이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근심 어린 눈으로 범한을 한참 바라보았다.

“한 달 동안 입궁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폐하께 드릴 의견이 있으면서도······ 숨어 지내려 한 이유가 뭐냐?”

범한이 황제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 지내려는 이유는 바로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에 범한이 머뭇거리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자신 없이 말했다.

“······저는 무섭습니다.”

“뭐가 무섭다는 거야?”

진평평이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너는 이미 4년 전에 폐하에게 네 충심을 증명했고, 얻기 힘든 신임을 얻었다. 이건 네가 여러 차례 죽음을 무릅쓴 대가로 얻어낸 것이니 당당하게 누릴 필요가 있어.”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생각했다.

담주에서 경도로 온 뒤로 몇 년 동안 여러 차례 죽을 뻔한 위험에 처했었다. 현공 사당이나 산골짜기 습격, 그리고 이번에 대동산 사건까지 어느 방면에서 보아 황제 폐하가 그를 의심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이건 과거 진평평이 황제 폐하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한 덕분에 지금 막강한 신임을 받는 것과 같았다.

신하가 보일 수 있는 가장 굳건한 충성심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폐하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것이었다.

“다른 일이 어떠하든 너에 대한 폐하의 태도만 놓고 보면······ 문제가 없지 않니. 요 몇 년 동안 폐하께서 너를 갈수록 더 총애하셨으니 너도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거다.”

‘다른 일?’

범한은 진평평이 말한 다른 일이란 단어에 담긴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분명 황실 금고, 감찰원 등 황태자나 2 황자에게 주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권력과 신임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단지 16년 동안 자신을 담주에 내버려 두었던 미안함을 보상하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황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정한 사람들이었고,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사생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황제는 오래전 일을 해결할 충분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범한에게 가장 좋은 길을 선택했다.

“나는 네가 도대체 뭐가 무섭다는 건지, 왜 입궁하려 하지 않고 도망치려고만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진평평이 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가 앞으로 그를 얼마나 신임하고 총애하든 어쨌든 그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이었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있었던 일은 제쳐두고 이번에 폐하가 황족들에게 한 냉정하고 잔혹한 방법들만 떠올려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만일 자신이 그동안 여러 일에서 폐하를 속여 왔으며, 심지어 배신하기까지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폐하는 분명 인정사정없이 부자의 정을 끊고 군주로서 가장 강력한 방법을 사용해 처벌하려 할 것이었다.

폐하가 대종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범한은 자신이 과거에 했던 한 가지 일이 걱정되었다.

바로 과거 그가 황궁에 몰래 잠입해 함광전에서 열쇠를 훔쳤던 일이었다······.

만약 폐하가 그때 일의 내막을 알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모른척한 거라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일까?

북제에서 한 밀수에 관한 일이나 왕 십삼랑을 받아들인 일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감이 넘치는 폐하는 이런 일들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었고, 그가 나라를 배신할 거라는 의심도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함광전에 침입한 일은 달랐다. 황제는 절대 그 상자를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는 걸 용인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왜냐하면, 그 상자야말로 그에게는 가장 큰 위협이었으니 말이다.

범한은 황제가 누구든 상자를 손에 넣는 걸 용인하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신했지만 자신이 상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황제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함광전 침대 아래 비밀 공간에 있던 서신은 황제가 가져간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어딘가에서 고수들이 몰려나와 자신을 죽이려 하거나 대종사인 황제가 직접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입궁하는 게 두려웠다.

지금 더할 수 없는 총애를 받는 범한은 황제의 마음을 확실히 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왜냐하면, 그는 감히 황제에게 옷을 입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어린아이도 아니었고, 오죽 아저씨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두려워하든 두려워하지 않든,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어쩌면 황제는 가장 마음에 드는 아들과 이 일 때문에 갈라서는 게 싫어서 몇 년 동안 모른 척한 것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범한이 황궁에 침입했다는 사실은 알지만, 상자를 가지고 있다는 건 몰라서 줄곧 아무 말 하지 않을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 일은 일종의 비밀 약속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아버지로서 가장 아끼는 아들의 행동을 눈감아 주기 위해 일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비밀 약속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범한은 자신에게 너무 모질 정도로 상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그는 그 살상 무기를 딱 한 번 사용했다. 그것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 숲 안에서 말이다.

더구나 함광전 비밀 공간에는 열쇠가 그대로 있었으니 황제는 더더욱 의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당시 일을 떠올려보던 범한은 눈처럼 흩뿌려지던 전단지와 자신이 황궁에 몰래 잠입해서 장 공주와 장묵한의 대화를 들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약간은 안도했다.

황제는 분명 자신이 장 공주의 정보를 얻기 위해 몰래 황궁에 들어왔다고만 생각할 뿐 열쇠를 훔치기 위해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비밀 공간에 있던 서신은 왜 없어진 걸까?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서신이 없어진 이유를 찾지 못한 범한이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가 황제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상자의 일이 폭로될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곤란한 일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건 지금 범한을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드는 문제이기도 했다.

범한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황제는 그의 아버지이다. 비록 좋은 아버지는 아니지만 말이다.

범한의 마음속에는 세 명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중에 범 상서는 당연히 가장 가까운 친아버지이고, 진평평은 의붓아버지였다. 그리고 황제의······ 그림자도 점점 그의 마음속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와중에 진평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입궁하지 않는 이유가 두렵기 때문이라면, 감찰원에 오지 않는 이유와 나를 보려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냐? 내가 두려워서라고 핑계를 댈 생각이라면 하지 말 거라.”

빙그레 웃고 있는 늙은 절름발이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대인을 어찌 무서워할 수 있었어요? 대인을 만나면 물어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거지요.’

하지만 무섭더라도 입을 열고 물어야만 했다.

용기를 내서 여기 온 이상 이미 마음의 준비도 된 상태였고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 다른 사람에게 속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연소을의 친위병들은 어떻게 대동산으로 이동한 겁니까? 어째서 감찰원에서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은 거지요? 경도의 상황이 왜 그렇게 위험한 지경까지 가게 된 겁니까? 동산로 관리들이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데도 어째서 조금의 소문도 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겁니까? 왜 원장 대인께서는 경도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장 공주와 황태자를 괴롭히시더니 결국에는 자신까지 괴롭히려 하시는 겁니까?”

“그건 천하 사람들 모두를 속이기 위해 폐하와 내가 정한 계획이었다.”

진평평이 차가운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약한척하지 않았으면 그 사람들이 움직였겠느냐?”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최소한 저는 속이지 말았어야지요······. 저도 폐하께서 내린 임무를 제대로 하기 위해 대인께서 그런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인과 저 모두 이 사람들을 폐하와 대립하게 만든 게 우리 두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대인께서도 폐하가 이번에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을 쇠줄 위에 아슬아슬 걸어가고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자칫 잘못하다가는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요. 대인은 미리 알고 계셨고, 이 상황을 더 좋게 만들 능력도 가지고 계셨으니 경도가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하실 수 있으셨지요.”

“폐하가 너를 신뢰한다고 해서 내가 너를 신뢰한다는 말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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