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2화 황제의 마음 (1)
범한이 저택으로 돌아오고 며칠 동안 황궁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고 질책하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에 더욱 마음이 불안해진 범한은 속으로 황제 폐하가 자신의 의도를 알고 그냥 맞장구를 쳐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방법이 없었기에 감찰원 제사로써 비밀 상주문을 써서 황궁으로 연거푸 보내 황제의 분노를 다시 자극하려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상주문을 보냈음에도 황궁에서는 어떠한 화답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흐른 뒤 황궁에서 반역자들을 처리하는 방안이 정해졌다. 저택에서 조서를 받은 범한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범한은 어서방에서 폐하와 말다툼을 하기는 했지만, 폐하가 정말 자신의 의견대로 자비를 베풀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반역에 가담해 체포된 관리와 석방되지 않은 인물들 1천여 명은 참수형에 처했지만, 연루된 부인과 아이들에게는 가벼운 처벌만 내려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투항한 반란군의 경우 황제 폐하는 고위 장군들만 참수하게 하고 일반 병사들은 국경 지대로 보내 사형수 신분으로 싸우도록 했다. 한마디로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의미였다.
최종 계산을 해보니 대략 2천여 명이 반란으로 사형을 받게 됐지만 범한이 최선이라 생각한 기준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였다.
더욱이 경국 법률에 따라 마땅히 처형되어야 할 관리와 가족들도 품계가 한 등급 떨어지는 처벌만 받아 범한은 무척이나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의 마음속에는 더 많은 의심이 생겼다. 폐하는 어째서 이런 조처를 내린 것일까? 만약 정말 그의 간언 때문이라면 그날 어서방 안에서는 왜 그렇게 화를 냈던 것일까?
사실 어서방에서 황제 폐하와 작은 범 대인이 충돌한 일은 경도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황궁 안은 비밀이 새어나기 쉬운 곳인 만큼 이 일은 순식간에 경도 전체에 알려졌고, 폐하가 조서를 내리기도 전에 관리들 대부분이 일의 내막을 알고 있었다.
관리들은 비록 각각의 파벌을 가지고 있기에 황태자가 즉위에 오르면 자신이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오랜 시간 조정에서 한솥밥을 먹은 사이인 만큼 관리들은 서로를 동정했고, 더욱이 무고한 가족들이 연좌제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폐하의 자비 넘치는 조서에 모두들 감탄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문하중서를 이끄는 두 대학사는 황제 폐하의 이번 결정을 입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폐하를 칭송했다. 너그럽고 인자한 군주야말로 만세에 길이 남을 나라는 만들 근간이라는 걸 장묵한의 제자들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가 너그럽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작은 범 대인의 역할 때문이었다. 작은 범 대인이 개인의 명예나 권세에 연연하지 않고 용감하게 어서방에서 간언을 한 것은 비록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건 도박까지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큰 위험을 감수한 것인 건 틀림없었다.
경도 조정과 민간은 이 사실을 알고 범한을 더욱 높이 보게 되었고, 장 대가의 계승자라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 사람들은 범한에게 깊이 감사했다. 일순간에 범한의 청렴한 명성이 경도성 안에서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과거 범한은 천하 서생들의 우상이었지만 감찰원 제사라는 신분과 임약보에 대한 황궁의 경계 때문에 고결한 선비의 모습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민간에서는 명성이 상당히 좋았고, 이번에 큰일을 거치면서 관리들도 그를 경배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황제 폐하와 정면으로 충돌한 일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특히 이번 일은 반란과 관련된 일인 만큼 서무 대학사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범한은 이 일이 자신에게 여러 좋은 점을 가져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이승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겸 황제의 분노를 자극해서 이곳을 떠날 기회로 삼을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을 알아챈 황제 폐하는 과감한 조치를 내려 사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저택에서 우거지상을 하고 딸을 바라보고 있던 범한이 속으로 폐하와 비교하면 자신은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폐하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처럼 큰 명예를 주는 것인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하던 그가 책상을 치며 일어나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
“입궁해서 폐하까지 만나러 간 내가 그를 만나러 가는 걸 두려워한단 말이야?”
눈을 꼭 감고 있던 범소화가 큰 소리에 놀라 울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완아와 사사가 불같이 화를 내는 범한의 모습에 놀라 재빨리 아이를 안았다.
* * *
경도 반란이 일어난 뒤 처음으로 감찰원 제사 범한이 감찰원을 방문했다. 감찰원 모든 관리가 허리를 굽히고 공손히 그를 맞이했다.
감찰원 관리들이 나와서 범한을 공손이 맞이한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범한이 해온 무수히 많은 일을 통해 모두가 그 능력을 인정했으며 미래의 원장 대인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였다.
어두운 방 안에 앉은 범한이 수건으로 손을 닦고는 검을 천을 살짝 들어 올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황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진평평은 자리에 없었지만, 그는 당장 진원으로 가지 않았다. 여덟 처 수장들을 불러서 최근 상황을 간단히 물어본 뒤에 언빙운만 자리에 남게 했다.
그의 질문을 들은 언빙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왕 대인에 대한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홍상청이 데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연이어 돌아왔지만 정작 홍상청은 실종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고달을 비롯한 호위 일곱 명은 아마도 대동산에서 사고검에게 맞서던 중에 모두 죽은 것 같습니다.”
범한이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왕계년과 같이 약사 빠른 사람이 대동산에서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대종사들의 싸움이 아무리 치열했어도 시체는 남는 법인만큼 감찰원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심복인 왕계년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다만 홍상청과 고달의 경우에는 살아남았을 거란 믿음이 없었기에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진 그는 더는 감찰원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마차에 오른 그가 곧장 경도를 나가 진원으로 향했다.
진원 밖에 푸른 습지에는 있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함정과 장치들이 보이지 않았다. 범한이 마차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진씨 집안이 경도 수비사를 보냈을 때 전부 없앤 거라 생각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 진원 앞에서 내린 범한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하에 둘도 없을 정도로 화려했던 진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담장과 벽은 무너져 있었고 물고기들이 놀던 연못은 모두 말라버렸으며, 가짜 산도 부서져 있었고, 싱그럽던 버드나무는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곳곳이 불타고 그을린 흔적으로 가득한 게 전쟁터를 보는 듯했다.
불타버린 진원에 남은 거라고는 부서진 잔해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참한 모습만 남은 건 아니었다. 뒤쪽에는 이미 벽돌과 목재로 만든 임시 저택이 지어져 있었고, 원래 건물들이 있었던 자리에는 수천 명의 인부와 장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열심히 공사하고 있었다.
공사 현장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잔해를 피해 뒤쪽으로 간 범한은 가까스로 십여 명의 미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공연을 보고 있는 진평평을 찾아냈다. 대지주처럼 입은 진평평은 낮은 의자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두 다리에는 양털 담요가 덮여 있었다. 밖은 소란스럽고 임시 저택에 지내는 게 편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웃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밖에서 벽돌을 자르고 쌓는 소리가 워낙에 커서 안에 노랫소리가 전부 묻히고 있었다. 이에 안으로 들어가던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기서 제대로 들으실 수는 있습니까? 경도 안에 저택이 있으시면서 굳이 여기에 머무시는 이유가 뭡니까? 진원의 수리가 완전히 끝나려면 최소한 석 달은 있어야 할 텐데 여기서 석 달을 보내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범한이 들어오는 걸 본 진평평이 활짝 웃자 주름진 얼굴에 국화꽃 같이 자글자글하고 기괴한 주름이 생겼다.
진평평의 웃는 얼굴에 겁이 난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평평 옆에 붙어 있던 미녀들은 소공야가 논의할 일이 있어 찾아왔다는 걸 알기에 이전처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범한을 보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밖에서 감찰원 관리들이 뭐라 말했는지 공사 소리가 갑자기 멈추자 폐허가 된 진원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진평평이 범한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범한을 향해 몸을 기울이더니 그의 손에 들린 찻잔을 뺏어 한 모금 들이켰다. 목을 축인 진평평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경도 안에서 지내느니 차라리 무너진 진원에서 지내는 편이 더 났다.”
경도 안보다 폐허가 된 진원에서 지내는 게 낫다는 말은 조금 전 범한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지만, 여기에는 다른 뜻도 담겨 있었다.
순간 범한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 절름발이 노인은 이미 오늘 자신이 이곳에 온다는 것과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진평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미녀들이 많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평평이 마른기침을 한 뒤 계속 말했다.
“내가 받아들여 준 덕분에 다른 남자의 시중을 들 필요가 없으니 이곳에서 사는 게 복이라 할 수 있지. 다만 매일 나 같은 노인과 함께 지내니 얼마나 삶이 지루하겠니. 하지만 그들은 내 앞에서 감히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단다.”
범한이 속으로 진 원장은 황제 폐하 다음으로 무서운 인물로 불리는 만큼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십 대의 어린 소녀들과 20대의 성숙한 여자들이 아무리 호르몬의 자극을 받는다고 진평평 앞에서 원망 섞인 푸념을 할 정도로 대담해질 수는 없었다.
“과거 왕조에 오랜 시간 원망을 품은 궁녀가 황제를 목 졸라 죽인 전례가 있어.”
진평평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척을 하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죽고 싶지 않네. 그래서 진원 안에 있는 낭자들을 즐겁게 해줄 만한 방법을 생각해냈지.”
범한이 속으로 움찔하며 진평평의 말의 의도를 추측했다.
“나는 그녀들을 아주 너그럽게 대하고 있단다. 설사 네가 매번 찾아올 때마다 그녀들이 너를 오이 보듯이 보아도 절대 질책하지 않지.”
진평평이 하품을 하며 계속 말했다.
“물론 그녀들의 마음을 가장 편하게 해주는 건 어느 날 이곳에 더는 머물고 싶어 하지 않으면 내가 기꺼이 내보내 줄 거란 사실이야.”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원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셈이지.”
진평평이 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가족의 안정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폐하께서······ 최근에 너그러워지신 게 아니겠니.”
범한은 진평평이 이런 말을 사용해 황제 폐하를 설득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다만 내가 언제든지 그녀들을 내보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세상에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미녀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진평평이 범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반면 폐하께서 너를 놓아주지 못하시는 이유는 아들이 몇 명 되지 않고, 최근에는······ 그중 두 명을 잃으셨기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