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1화 갈수록 깊어지는 애정 (2)
한 달 뒤에 경도가 마침내 안정되자 각 부(部)와 사(寺), 원(院) 및 동남 두 로에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문하중서에서 명부를 작성했다.
과거 춘시를 합격한 후보 관리 중에서 선발했는데, 대부분이 유능하고 선량한 인재들이었다. 선발된 사람들은 무척 기뻐하며 자신이 범씨 집안에 보낸 선물이 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고, 선발되지 못한 사람들은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준비한 은전이 너무 적어서 작은 범 대인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그날 딸을 품에 안은 범한이 손가락으로 딸의 얇은 입술에 톡톡 건드리며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다.
“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범 상서가 꽈리 열매로 만든 음료를 마시면서 미소를 지었다.
“난들 곧 관직에서 물러날 사람인데 굳이 궁에 들어가 말을 했겠느냐?”
“소화야, 소화야······.”
범한이 범 상서 얼굴을 바라보며 웃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딸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한 달 동안 매일 아이를 안고 있다 보니 애정도 갈수록 깊어졌다.
범 상서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한 달 동안 쉬라 허락하셨다고는 하지만 감찰원에도 한 번도 가지 않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숨으려 하는 게냐?”
범한은 아버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챌까 봐 속으로 움찔하면서도 태연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숨을 수 있을 때 얼른 숨어야지 않겠습니까. 완아와 혼인한 뒤에는 현공 사당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 빼고는 이렇게 오랜 시간 쉰 적이 없었습니다.”
현공 사당을 말하면서 그의 입술이 살짝 떨렸지만 범건의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범한이 한 달 동안 집안에만 숨어 지내며 감찰원에도 가지 않은 이유는 진평평을 만나는 게 두렵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자신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진평평에게 물었다가 어떠한 진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웠다. 물론 그를 보호하고 싶어 하는 절름발이 노인은 계속 그를 때여 놓기 위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정말 만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황제가 명확하게 보지 못하는 많은 일을 범한은 점점 명확하게 볼 수 있었고, 알면 알수록 마음속 두려움과 걱정이 커졌다.
범한이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경도의 가을 색은 갈수록 짙어졌고, 날씨는 추워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도는 안정을 찾아갔고, 황궁 안도 평온해졌다.
태감과 궁녀 중 대부분이 살아남아 황궁 귀빈들의 시중을 들었다. 한편 복직한 대 내관은 몰래 범한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누가 살았고 죽었는지 알려주었다.
그는 황궁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범한에게 성실해 대답해 주면서 속으로 천하에 작은 범 대인만큼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안위를 신경 써주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과거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사실 범한이 여러 사람의 근황을 물은 건 본래 의도를 숨기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친 끝에 범한은 마침내 홍죽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그러던 중 대 내관에게 예상치 못했던 다른 소식을 접한 그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내일 황궁에서 조서가 내려올 거라는 소식이었다.
범한은 조서에 적힌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 폐하가 하늘에 제사를 올린 목적은 바로 황태자를 폐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조서가 발표된다는 건 황태자가 폐위된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동궁 안에 있는 그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떠났겠지만 말이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셨다. 얼굴은 어떤 슬픈 기색도 없이 평온했다.
옆에서 그의 안색을 살피던 임완아는 무슨 문제가 있음을 알아채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요?”
“내일 입궁해야 할 것 같아요.”
범한이 그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 보고해야 할 일이 있어요.”
임완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범한이 안심시켰다.
“큰일은 아니에요. 그냥 어떤 문제에 대해 승낙을 받으려는 것뿐이에요.”
반란과 관련된 경도 관리들은 총 3백 40여 명 정도 되었지만, 그들의 심복들과 부하들, 가족들까지 합치면 폐하가 이번에 잡아들인 인원이 4천 명이 되었다. 감찰원의 감옥은 진작 꽉 찼고 형부와 대리사에도 수용인원이 한계에 다다라서 결국에는 태학의 서학당까지 비워서 죄인들을 가두고 있었다.
경국 법률에 따라서 반역자는 9족을 멸해야 했으니, 설사 약간의 은혜를 베풀어 준다고 하더라도 2, 3천 명은 참수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떠올린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과거 그였다면 2, 3천 명의 머리가 잘리든 말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으면서 삶의 이치를 이해하게 되었고 최소한 승낙한 일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은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동안 상황을 보면 황제 폐하의 일 처리 방식도 갈수록 부드러워지고 있어 범한은 최소한 여자와 아이는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더구나 황태자가 복을 쌓으려 그랬던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가 투항함으로써 경국의 군사 중 몇천 명은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범한도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해야 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관복을 정돈한 범한이 몸을 돌려 천을 품 안에 넣었다. 이 천은 범소화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찍은 발 도장이었다.
당시 집안사람들 모두가 범한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 생각할 뿐 그가 아주 오래전의 풍습을 그리워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이 천은 자연히 황제 폐하의 마음을 공격할 무기로 쓰일 예정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범한이 마차에 오르려 하는데 거리 맞은편에서 익숙한 사람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범한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검은색 감찰원 관복을 바라보고는 다시 순백색 옷을 입은 그 사람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간다고 말했으면 안 가는 겁니다. 매일 이렇게 찾아오셔도 저는 안 갈 겁니다.”
범한을 향해 걸어오는 언빙운의 차가운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건 진 원장의 명령입니다. 그러니 부하인 저는 어쩔 수 없이 매일 대인을 귀찮게 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입궁하려 하시는 겁니까? 입궁하실 수 있으면 감찰원에 돌아와서 사무를 처리하셔야지요. 진 원장께서 입궁해 폐하에게 직접 요청하는 상황까지 만들게 하지는 마십시오.”
범한이 땅에 침을 퉤 뱉으며 오늘 입궁하는 일을 떠올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언빙운의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뭐라 말을 했다.
언빙운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범한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반란자들을 붙잡아 죽이는 일은 당연한 게 아닌가? 게다가 모든 일이 경국 법률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데, 어째서 제사 대인께서는 입궁해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올리려는 것인가?’
언빙운이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감찰원에는 함부로 사람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절대 무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도대체 대인의 마음이 언제부터 그렇게 물러지신 겁니까?”
심복이나 친구들의 눈에 범한은 온화한 얼굴 아래 잔인하고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언빙운은 범한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언빙운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범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언 공자도 심 낭자가 혼인해 아이를 낳으면······ 제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 * *
“오늘은 무슨 여유가 생겼기에 입궁해 짐을 보러 온 것이냐?”
황제가 고개를 들고 범한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장난기가 담긴 온화한 눈빛을 보니 한 달 동안 폐하의 기분도 많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마음속에 드리운 근거 없는 두려움에 아무 말 없이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비록 폐하가 직접 한 달 동안의 휴가를 내려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한 달 동안 입궁하지 않은 건 경우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에 황제의 말투에서 은근슬쩍 불쾌한 기색이 느껴지자 범한은 적당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궁하지 않은 건 그의 마음속 한기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다. 겁 없이 대담하게 행동해 왔던 범한은 황제 폐하가 대종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두려움이 어떤 맛인지를 알게 되었다.
더욱이 며칠 동안 폐하의 침묵과 관용은 그를 더욱 경계하게 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다시는 입궁하지도 않고 황제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황제가 인자한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범한의 마음속 두려움도 커졌다. 그가 침을 삼켜 마른 목구멍을 축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오늘 입궁한 이유를 간절히 말했다.
다만 황태자 이승건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고 상황에만 입각해 황제 폐하에게 반란자들을 처벌할 때 자비를 베풀어 달라 호소했다.
승리자는 항상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폐하는 가족들이 잃은 뒤 갈수록 너그럽고 인자해졌다. 범한 역시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다시 반란 세력이 고개를 들 수는 없을 테니 자비를 베풀어도 된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황제 폐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마치 오랜만에 입궁한 범한이 반란군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황제의 눈동자가 점점 차가워지자 곁눈질로 황제의 안색을 살피던 범한이 속으로 망했다고 중얼거렸다.
황제가 불쾌해한다는 걸 알면서도 범한은 계속해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이승건이 죽기 전 남긴 부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용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이 일에 관해 주장할 용기가 없었다면 그는 다시 입궁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고집 때문에 오늘 어서방은 무척이나 떠들썩하고 살기등등해졌다. 요 태감과 함께 어서방 밖을 지키고 있는 젊은 태감들은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놀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젊은 태감들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속으로 ‘도대체 작은 범 대인이 안에서 뭐라 말했기에 황제 폐하가 저리 화가 나신 걸까?’라고 생각했다.
태감들이 잔뜩 긴장해서는 어서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찻잔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후 작은 범 대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하는 소리와 황제 폐하가 호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렸고, 나중에는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소리를 듣고 있는 요 태감은 겉으로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마음에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요 태감은 속으로 천하에서 폐하와 정면으로 부딪치려 할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사람은 작은 범 대인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걱정된 요 태감이 어서방 문을 바라보며 속으로 문하중서의 두 대학사에게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했다.
황궁과 조정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는 바람에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 폐하와 담박공의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어서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범한이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화가 치밀어 올라 붉게 상기된 범한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가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태감들은 본체만체하며 양 소매를 있는 힘껏 털고는 곧장 황궁 밖으로 나갔다.
황궁을 나와 마차에 올라타자 그의 얼굴에 드리운 불만은 사라지고 침착함과 옅은 근심이 드리웠다.
황제 폐하는 범한을 엄하게 질책하며 지금까지 어느 제왕도, 설사 아무리 관용과 인정이 넘쳤던 제왕이라 할지라도 반역으로 권력을 탐했던 이들에게는 조금도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범한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인데 어째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