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화 갈수록 깊어지는 애정 (1)
황제가 상주문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어 범한을 바라봤다.
“오늘은 조회도 없는데 어찌 이리 일찍 입궁한 것이냐?”
경도는 비록 진정되었지만, 그동안 체포당하거나 도망치거나 다치거나 죽은 관리들이 너무 많아서 6부가 제대로 돌아가기에는 사람의 수가 부족했다.
그래서 금군이 군대와 관련된 모든 일을 맡고, 경도부가 경도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대조회를 열 수는 없었다.
범한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자신은 나라를 관리를 맡은 감국인데, 어째서 황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의아했다.
‘아직 상황이 안정되지 않았고 황궁 안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데, 폐하께서는 벌써 나라를 관리하는 감국 임무를 빼앗으실 생각인 건가? 하지만 신하로서 입궁해 폐하의 근심을 나누려 하는 게 맞는 거잖아? 그럼 나보고 집안에서 뒹굴고만 있으라는 거야?’
잠시 고민하던 그가 슬며시 말했다.
“반란군이 잠복해 있어 아직은 곳곳이 불안합니다. 이에 폐하께 상황을 빨리 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입궁을 서둘렀습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딸이 태어났는데 집 안에 머물지 않고 바쁘게 일하려는 이유가 뭐냐?”
범한이 속으로 진평평이 어젯밤에 폐하에게 말했을 거라 짐작하며 미소를 지었다.
“일을 마치면 집에 돌아가 안아줄 생각입니다.”
“문하중서의 대신도 아닌 너에게 짐이 언제 나랏일을 맡긴 적이 있느냐?”
황제가 범한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가 태어났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아비라 할 수 있느냐?”
비로소 황제의 의도를 이해한 범한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 폐하의 말은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안고 입궁할 준비를 하라는 거였다. 이건 그 역시 바라던 일이었지만 황제의 호된 지적에 기분이 울적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난생처음 아버지가 돼서 내가 서투르게 행동한 건 맞지만 그래도 황제 폐하보다는 나을 것인데. 지금 승건과 둘째의 일만 봐도······.’
두 형제를 떠올리던 그는 승건은 동궁 안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자신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황제에게 대답할 만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은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였다.
황제가 그의 눈빛에서 이런 생각을 읽은 것인지 안색이 살짝 바뀌었지만, 반란과 관련된 후속 처리에 관해 묻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오늘 황궁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이만 돌아가서 아비 노릇에 힘을 쏟도록 해라·····.”
말을 하던 황제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다가 온화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내일 짐이 볼 수 있도록 신아와 아이를 데리고 입궁하도록 해라.”
황제의 기분이 안 좋아진 걸 알아챈 범한이 급히 감사 인사를 올리고는 어서방을 빠져나왔다. 그가 어서방을 나오자 요 태감이 앞을 막고는 범씨 집안의 소식을 들었다고 말하며 연신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 내관과 오래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던 범한이 급히 뇌물을 건네주고 떠나려 하다가 확인한 일이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렸다.
범한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체포된 황궁 태감과 궁녀, 그리고 궁정의 고수 시위들이 어떻게 처리했는지 물었다.
이제야 반란에 참여한 사람들이 가려지고 상황이 안정되기 시작했지만, 황궁 안의 처벌은 항상 황궁 밖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그러니 아직 움직임이 없다 하더라도 황제 폐하라면 계획을 세우고 있을 거였다. 이에 걱정하고 있던 범한이 기회가 오자 폐하와 가장 가까운 태감에게 물어보았다.
마음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범한은 절대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별 관심은 없지만, 나라를 관리하는 감국 임무를 맡은 권신으로서 어쩔 수 없이 알아야 하는 척 연기했다. 요 태감은 작은 범 대인의 신분을 알고 있고, 상대방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권세를 가지게 될지도 알았기에 중요한 몇 건의 처리를 말해 주었다.
이후 범한은 동궁의 상황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고민한 끝에 입을 다물었다.
요 태감과 헤어진 뒤에 그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이처럼 놀란 이유는 황제 폐하가 태감, 궁녀, 시위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추측했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겉으로는 어떤 일도 가담하지 않은 홍죽은 말할 것도 없고 함광전 유모들과 동궁의 태감들, 광신궁 궁녀들 중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물론 모두들 황궁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목숨은 부지했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황궁 밖으로 나왔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뜬 건가? 폐하가 왜 갑자기 관용이 넘치는 사람이 된 거지?’
순간 그의 머릿속에 어젯밤 황제 폐하의 어두운 얼굴과 방금 폐하가 온화한 말투로 자신에게 말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이번 일에 충격을 받아서 앞으로는 자신과 이씨 집안의 후세를 위해 덕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가?’
사실 그의 추측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황제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도 아니었고, 사람을 죽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의지가 강하고 성격이 모질어서 필요하다면 사람을 죽이는 걸 꺼리지 않을 뿐이었다. 황궁의 태감과 궁녀와 시위들은 황태후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었고 반란에 깊이 관여되어 있지도 않았다.
황제는 반란에 참여한 사람들은 철저하게 색출해 제거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황태자와 2 황자가 죽음으로써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살짝 움직인 것도 사실이었다.
* * *
다음 날 범한과 임완아는 딸아이를 데리고 함께 입궁했다.
황제는 처음으로 두 사람 앞에서 연장자의 인자한 모습을 보였다. 황제는 범한의 딸을 안고 오랜 시간 바라보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다만 황제가 손가락으로 살며시 딸아이의 눈썹을 쓰다듬었을 때 범한은 정말 놀라서 간이 떨어질 뻔했다. 왜냐하면, 함광전에 있었을 때 황제의 손가락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범한의 딸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특히 아이의 눈매를 마음에 들어 했다. 마음을 졸이며 바라보던 범한은 속으로 ‘폐하가 과거 어떤 흔적을 찾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데 황제가 범한에게 아이를 안겨 주고는 각 궁에 가서 보여주라고 말한 뒤 임완아는 자리에 남게 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범한이 아무 말 없이 명을 따르기 위해 나갔다.
지금 황궁 안에는 여주인이 없어서 아이의 하사품에 대해서도 자연히 말을 꺼낼 수 없었기에 나중에 처리하는 거로 남게 되었다.
* * *
아이를 안은 영 재인이 궁에 있는 유모를 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범한이 결단코 거절했다. 이에 영 재인과 옆에 있는 의 귀빈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의 딸이 태어난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최근 궁 안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은 탓에 실컷 기뻐할 수가 없었다.
영 재인의 큰 웃음소리로도 궁전 안에 드리운 어두운 분위기를 옅게 할 수는 없었다. 의 귀빈도 온화한 미소를 지었고, 3 황자 이승평은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음에도 고집을 부려 아이를 안고는 누이라고 불렀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최근 제법 많이 성숙해진 3 황자를 바라보던 범한이 속으로 자신의 딸을 누이라고 부르는 건 항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멀리 북제에 있는 누이 범약약과 아우 범사철이 떠올랐다. 대동산의 일에 3국이 모두 연관되어 있었고, 고하는 분명 죽을 게 분명했으니 두 사람의 신변이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범한이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아이를 안고 나왔다. 그가 어서방에 돌아가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자 황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허락하고는 이름을 하사하는 일은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은 오히려 반란으로 엉망이 된 조정을 수습하느라 바쁜 폐하가 딸아이 이름을 지어주는 사소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출궁한 뒤 범한은 완아에게 폐하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묻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아내의 붉게 충혈된 두 눈을 보니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외삼촌과 외조카는 분명 장 공주와 두 명의 황자의 죽음에 관해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 * *
이후 한 달 동안 황제의 강력한 통제 아래 조정의 6부 3원 3사의 기능이 점차 회복되었고, 주변에 흩어져 있던 반란군 패잔병들도 철저히 토벌되었다.
섭중이 승리하여 돌아오자 모든 상황이 빠르게 안정되기 시작했고, 경도가 평화로운 생활을 회복하자 반란의 분위기도 마침내 점점 옅어져 갔다.
그리고 범한은 이른 아침에 나라를 관리하던 감국 임무를 내려놓았다.
어가를 타고 경도에 들어갔던 그 날 밤에 이미 행새를 폐하에게 반납해서 사직하든 말든 지금 그가 나라를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사소한 잘못이 나중에 엄청난 재난이 될 수도 있었고, 하루 늦게 물러날수록 위험은 커지는 셈이었다.
예전처럼 감찰원의 제사와 황실 금고 전운사 정사로 돌아온 범한은 이제 더는 조정의 문제에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었다.
조정 일은 두 대학사가 문관들을 이끌며 처리했고, 군대 일은 추밀원에서 알아서 처리했으니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진 것이다.
이에 그는 언빙운이 가끔 찾아와서 하는 보고와 강남에 있는 소문무와 하서비가 정기적으로 보내는 보고 이외에 어떤 일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범한은 심지어 작은 언 공자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도 전혀 묻지 않았다. 그는 감찰원에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귀찮고 골치가 아픈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강남에 있는 명씨 어르신이 장 공주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는 하서비가 보낸 소식에만 약간 마음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명청달이 결국 죽은 것이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과거 강남에서 명씨 어르신과 오랜 시간 싸웠던 때가 떠올랐다.
명청달의 삶이 이렇게 끝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범한이 실의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명씨 어르신이 목을 매달 때 자신이 준 흰색 비단 천을 정말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도에서 연달아 터지는 사건을 처리하느라 피곤해서였는지 아니면 오랜 상처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범한은 앓아눕고 말았다.
몸 상태가 좋아진 뒤에는 집안에서 아이를 안고 아내와 대화하고 효도하며 지냈다. 그는 집 안에만 머무르며 집 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가족에게 충실하며 즐겁게 지냈다.
경도는 점차 안정되었고, 살아남은 관리들은 이전의 권세에 빌붙어 이익을 꾀하던 삶으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은 한 달 동안 반란을 평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작은 범 대인이 최대한 입궁을 줄이고 집안에서 아이만 돌보며 지내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몇몇 총명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폐하에게 다른 생각이 있을 거라 지래 짐작했다.
그러던 중 황궁에서 조금씩 소식이 전해졌다.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의 딸을 무척이나 좋아하셔서 작은 범 대인에게 한 달 동안 쉴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줬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황태후의 죽음으로 경도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고, 관례에 따라 유흥이 중지되어 술집들은 한 달 동안 문을 닫았다.
이런 상황에서 범씨 집안은 기쁜 일이 생겼음에도 떠들썩하게 좋아할 수 없었고, 문 앞에 붉은 등도 달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매일 해 질 무렵이면 관리들이 몰래 범씨 집안으로 찾아와 아무 말 없이 선물을 놓고 갔다.
범씨 부자도 아무 말 없이 선물을 받긴 했지만, 관리들의 부탁을 들어줄 해줄 생각은 없었다.
범건과 범한은 지금처럼 긴장된 시기에 관리들이 위험을 무릎 쓰고 찾아와서 선물을 건네주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반란이 평정되자 전 황태자, 2 황자, 장 공주를 따랐던 관리들은 체포되어 감찰원 감옥에 갇혔고, 경도 반란에서 입장이 확실하지 않았던 관리들은 황제에 의해서 쫓겨났다. 그래서 6부 전체가 인원 부족에 시달렸고, 특히 동쪽 동산로와 강남로는 부족한 인원이 수백 명에 달했다.
고양이는 비린내를 좋아하고 개는 똥을 좋아하고 관리들은 관직을 가장 좋아했다. 비어 있는 수백 개의 자리에 군침을 흘리는 관리들은 주저할 게 없었다.
게다가 황실에 한차례 피바람이 부는 바람에 오랜 시간 쌓아온 연줄이 끊겨 버렸지만 새로 비빌 언덕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관리들은 대부분 정주군 쪽과 연줄이 없었고, 냉담한 1 황자에게 뇌물을 보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작은 범 대인의 집안에 딸이 태어났으니 그들에게는 선물을 보내 아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