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화 너는 나의 작은 솜저고리 (2)
오히려 범 상서가 떠나려 할 때 범한이 기뻐하며 물었다.
“아버지, 제가 강남에 있을 때 이름을 지어 달라 청하지 않았습니까. 딸아이를 뭐라 불러야 할까요?”
범한이 싱글벙글 웃으며 묻는 말에 범 상서가 복잡한 눈빛으로 유씨를 바라보았다.
“딸아이는 이름을 서둘러 지을 필요가 없으니 일단 아명으로 불러주면 될 것 같구나.”
“범소화(範小花).”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아명은 진작 생각해 두었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마자 임완아와 사사는 ‘대가문에서 어떻게 그런 통속적인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사는 감히 입을 열 입장이 되지 못했고, 완아는 집안 어른의 마음을 생각해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완아와 눈이 마주친 범한이 생각을 알아채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범 상서와 유씨가 나간 뒤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던 그가 유모의 품에 안겨 있는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딸아이의 이름도 황실에서 내려주기를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사사가 그 말을 듣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무슨 말이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장 도련님이 가진 출생의 비밀이 떠올리고는 재빨리 입을 막고는 애써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임완아가 범한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에 아버님께서 상공의 이름도······ 황실에서 지어준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봤을 때 늦어도 모레 폐하께서 상공에게 아이를 데리고 입궁하라 부르신 뒤 내려주실 거라 생각해요. 황실에서 아마 늙은 종과 유모도 보내서 상공이 고르게 할 거고요.”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냉소를 지었다.
“황실에서 늙은 종들을 보내 주든지 말든지······ 아이는 직접 돌봐야 해요.”
온갖 험한 일을 겪고 황태후의 뺨까지 때려서 그런지 범한의 말에서 배짱이 느껴졌다. 동쪽 행랑채 안에서 딸을 안고 있는 범씨 집안 늙은 종이 그 말에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고, 뒤에 있는 유모도 고개를 푹 숙이고 숨소리를 죽였다.
범한이 그들을 힐끗 보고는 담담히 말했다.
“평상시에 자네들이 고생해서 아가씨를 잘 보살펴 줬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유모는 필요 없다고 내일 아씨 마님이 부인께 가서 말할 거네.”
임완아가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상공이 왜 그러는 거지? 어째서 유모를 쫓아내려는 거야?’
그때 범한이 침대 가로 돌아와 앉으며 사사에게 물었다.
“젖이 나오니?”
사사가 살짝 쑥스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됐네. 아이는 직접 키워야지 유모에게 맡겨서는 안 돼.”
그렇게 말하면서 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이 모유 수유의 중요성을 어찌 알겠니. 이전 세계에서 소의 초유가 얼마에 팔렸는지 알아? 의사들이 엄마가 직접 젖을 물리는 게 아이의 심리발달에 영향을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걸 알 리가 없지······.’
이런 생각을 말한들 이 세계 사람들은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범한은 두 여자와 상의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옆에 있는 유모는 감히 따지지는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했다.
‘유모가 필요 없다는 말인가? 범 상서 대인이 입신양명한 것도 담주 어른께서 유모로 황가의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이잖아.’
한편 범한의 말에서 다른 의미를 알아챈 늙은 종은 입을 쩍 벌리고 도련님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도련님께서는 직접 아기를 돌보려고 하시는 건가? 그건 집안 규칙에 어긋나는 일인데? 내일 범 상서 대인과 마님께 가서 말해야겠어.’
범한은 늙은 여종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또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 세상에서 20년 동안 힘겹게 고생하며 살아온 그는 자신의 딸을 어떻게 키울지를 두고 주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걸 들어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후 대화를 나누던 범한은 사사가 졸려서 억지로 눈을 뜨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얼른 자도록 해. 이전에 담주에 있을 때도 네가 나보다 잠이 많았잖아.”
사사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무는 모습을 보고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경도에서 몇 년 지내더니 물이 들어버렸구나. 어렸을 때 남자아이를 낳든 여자아이를 낳든 같은 거라고 했잖아. 비록 국가의 정책은 그렇지 않더라도 집안의 법률은 그래.”
안방으로 돌아오자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리고 있던 여종이 뜨거운 물을 가지고 와서는 임완아와 범한의 잠자리 시중을 들려 했다.
범한이 손을 저어 여종들을 보내고는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완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대가문의 규범에 따라 첩이 낳은 아이도 본처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임완아가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흐르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 그녀는 연이어 큰 충격을 받고 슬픈 일도 겪었음에도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그러던 중 오늘 사사가 집에 돌아오자 범한의 혈육이 생겼다는 점이 기쁘고 사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마음이 심란해졌다.
더욱이 범한이 은근슬쩍 딸아이를 키우는 일에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을 보이자 마음이 더욱 복잡해지고 슬퍼졌다.
출신이 고귀한 그녀는 특별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성격은 얼음장처럼 이성적이었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는 지금껏 드러내 보일 기회가 없었던 상당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였기에,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은 섬세하고 예민했다.
범한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아내가 장 공주의 죽음, 2 황자의 죽음을 비롯한 황가에서 벌어진 참혹한 비극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우리 아이를 유모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아이가 우리의 아이인 건 맞지만, 사사는 아이의 친모잖아요. 어떻게 친모가 아이를 안지 못하게 할 수 있겠어요?”
임완아가 한숨을 쉬며 바로 앞에 있는 상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 앞에서 그렇게 자세히 설명할 필요 없어요. 상공이 저를 걱정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임완아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까 말은 좀 신경이 쓰여요. 상공은 가끔 사사와 대화할 때 국가의 정책이니 집안의 법률이니 하면서 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한다니까요.”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과 함께 자란 사사가 서신으로 교육을 받은 누이처럼 다른 세계의 말들을 잘 이해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아내의 양손을 잡고는 다정히 말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든 당신에게 다 말해 줄게요. 다만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해요. 다른 사람이 알고 싶어 해도······ 절대 말해줘서는 안 돼요.”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내의 양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꽃마차나 자동차나 대포 같은 것들도 모두 알려줄게요.”
임완아가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속으로 생각했다.
‘꽃마차는 도대체 뭐고 자동차와 대포는 또 무슨 소리지?’
하지만 범한이 자신을 달래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애써 얼굴에 드리운 슬픈 기색을 지우며 말했다.
“저도······ 아이를 낳고 싶어요. 이번에 오라버니들의 끝을 보니 저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더욱더 아이를 가지고 싶어졌어요.”
임완아의 말을 들은 범한은 마음이 시큰하니 쓰라렸다. 더구나 임완아는 볼이 홀쭉해진 것이 2년 전보다 훨씬 마른 상태였다.
출산한 사람은 동쪽 행랑채에 있는 사사였지만 몸만 보면 오히려 그녀가 방금 출산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범한은 아내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고, 더욱이 약의 연구 제작도 상당한 진전을 보여 8할 정도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에 그가 장난 섞인 말투로 말했다.
“아이는 당연히 낳아야죠. 우리 소화에게 동생을 낳아줘야 집안이 시끌벅적해지지 않겠어요.”
그 말을 들은 임완아가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이 음흉한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으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잖아요. 그러고 보니 우리 반년 동안 사랑을 나누지 않았어요.”
임완아가 짓궂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일부러 자신을 놀리는 상공의 모습을 바라보던 임완아는 순간 범한이 얼마나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인지가 떠올라 더 슬퍼졌다.
사실 범한은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황궁 안에서 그처럼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어찌 사랑을 나눌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가 일어나 대야에 담긴 약간 식은 물을 침대 앞에 가져오더니 침대에 앉아 완아의 양말을 벗겼다. 완아가 화들짝 놀라 발을 빼려 하자 범한이 말했다.
“발 씻겨 줄게요. 며칠 동안 황궁 안과 밖을 오가느라 힘들었잖아요.”
고개를 숙인 범한이 아내의 맨발을 대야에 넣고는 뜨거운 물을 끼얹으며 가볍게 안마했다.
남편의 머리를 바라보던 임완아는 발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따스함에 코끝이 시큰해져서는 소리 없이 울었다.
고개를 숙인 범한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아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내가 슬퍼한다는 걸 알았지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을 하기보다는 대신 발을 씻겨줘서 마음속에 있는 슬픔도 같이 씻겨 주려 했다.
잠시 뒤 씻겨 주는 물소리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해 피로도가 극에 달한 범한이 임완아의 맨발을 손에 쥔 채 그녀의 무릎에 기대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편안하게 잠에 빠져든 것이 어린아이 같았다.
임완아가 안쓰럽게 범한을 바라보며 조심히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
“상공이 있으면 힘들지 않아요.”
* * *
이제 막 아버지가 된 범한은 아내의 무릎 위에서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어찌나 깊이 잠을 잤는지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난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잠에서 일어난 범한은 옆에 완아가 없는 걸 발견하고는 딸을 보러 갔을 거라 짐작했다. 머리를 매만지던 그가 이제 자신도 아버지가 되었다는 생각에 미소 지었다.
딸아이의 등장으로 최근 연달아 경도에서 일어난 싸움과 죽음은 이미 머릿속에 잊혔고, 오랜 시간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던 우울한 감정도 말끔히 사라졌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걸 확인한 그가 음모와 위험이 들끓는 인간 세상에 뛰어들 준비를 서둘렀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여종의 도움을 받아 세수를 마친 뒤 관복을 입고 응접실로 나갔다.
그곳에서 식사하지 않고 제비집 죽을 가지고 동쪽 행랑채로 가서는 깊이 잠든 딸을 바라봤다.
제비집 죽을 먹으면서 완아, 사사와 함께 대화를 나눈 그는 아버지와 유씨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 뒤 저택을 나와 황궁으로 향했다.
경도 거리는 아직도 스산한 분위기였다. 다만 폐하가 무사히 돌아오자 경도 백성들도 마음을 놓게 되었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도 갈수록 많아졌다. 마차 창문으로 그런 거리 광경을 바라보는 범한의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졌다.
황궁 안 긴 복도를 거쳐 어서방으로 가니 범한의 예상대로 부지런한 황제 폐하는 홑옷을 차림으로 상주문을 읽고 있었다.
엎드려 인사한 범한이 조용히 일어나 옆에 서서는 곁눈질로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힐끗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의 입가에 좀처럼 보기 드문 미소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기쁨과 안도감이 섞인 미소는 어제 황태자와 대화를 나눈 뒤 보였던 쓸쓸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범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야 딸을 얻어서 기뻐한다고 하지만 황제 폐하는 왜 기뻐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범한은 어젯밤에 명을 받아 입궁한 진 원장을 떠올리고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황제 폐하를 이처럼 기쁘게 만들 수 있는 건 절름발이 노인밖에는 없었다. 오늘 황제의 모습은 경도에 연이어 발생한 참극도 잊은 듯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