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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78화 (778/1,108)

778화 너는 나의 작은 솜저고리 (1)

이번 황제와 진평평이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 경도 사람들은 속으로 다양한 추측을 했다.

다만 이날 밤 범한은 한시라도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어서방 안에서 이뤄지는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안에서 자신과 관련된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범한은 그저 폐하가 외로워하니 안에서 진평평이 충성스러운 신하와 친구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서방 안에서 일어난 진실은 그의 추측과 아주 다르지 않았다. 사실 범한은 황제와 닮은 점이 상당히 많았다.

경제가 무려 20년 동안 천하 사람 모두를 속일 정도로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범한은 그다음으로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범한은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속 속마음을 경제에게 드러내지 않고 속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연기 실력파들의 싸움이었다. 속마음을 숨기기 위한 싸움이었다.

범한이 마차 창문 발을 걷고 적막하고 불안한 경도 밤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자신이 폐하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으니 이번 싸움은 자신의 승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앞으로는 또 어떻게 싸워야 할까?

범한의 얼굴에 근심과 조급한 기색이 보였다. 가식 없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심이 드러난 것이었다. 더욱이 미간 사이에 드리운 기쁨과 걱정과 막연함이 섞인 복잡한 감정은 지금 그의 마음 상태를 온전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범한은 바퀴 달린 의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을 때 진평평의 노쇠한 눈동자에서 기쁨과 축하의 의미를 읽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사사를 데리고 있던 사람이 진 원장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진 원장이 경도로 돌아왔다는 것은 사사가 저택으로 돌아와 있다는 의미였다. 순간 범한은 자신이 지금까지도 사사가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이런 생각이 들자 범한은 어사방 안에서 이뤄지는 대화에 조금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마음이 이미 범씨 저택에 가 있는 그는 부하에게 연신 채찍질을 해서 속도를 높이라고 재촉했다.

범한은 자신이 마침내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쁘기는 했지만, 며칠 동안 너무 많은 죽음을 본 탓에 미친 듯이 기뻐 날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저택에 돌아가 어머니를 잃은 상심에 슬퍼하고 있을 완아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도 난감했다.

마차는 범씨 집안 정문으로 가지 않고 옆 골목을 돌아 후원 쪽문에서 멈췄다. 아직 멈추지도 않은 마차 위에서 뛰어내린 범한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문 앞에서 맞이하는 등 대가의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집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자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일부러 점잖은 척하는 게 아니었다. 전투가 일어난 경도에는 아직도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도 진한 죽음의 냄새를 가릴 수는 없었다.

응접실을 지나 동쪽 행랑채로 가니 역시나 안에 은은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아버지와 유씨가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 어두운 등불에 비친 범 상서의 주름진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시선은 유씨 품에 안긴 갓난아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비록 대가문의 어른답게 체통을 지키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눈동자에 비친 기쁨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안으로 들어와서 아버지와 유씨에게 인사한 범한이 유씨 품 안에 안겨 있는 아이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고 곧장 침대를 바라봤다. 침대 옆에 앉은 완아가 누워 있는 사사의 손을 잡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눈이 붉게 충혈된 완아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련해 보였다. 그녀는 핼쑥하고 초췌한 얼굴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 사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완아의 모습에 놀란 범한이 방 안에 집안 어른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곧장 완아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베개에 기대앉아 있는 사사를 향해 범한이 말했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밤늦도록 잠을 안 자도 되는 거야?”

사시는 출산을 앞두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상당한 충격을 받아야 했고, 또 출산한 뒤에는 감찰원의 보호를 받으며 진 원장과 함께 경도 주변을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감기에 한 번 걸린 적 없을 정도로 건강했고, 일반 산모들보다 몸을 많이 움직여서 체력도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어려서부터 범한과 함께 자라서 성격이 털털하고 정신력도 강했다. 이에 출산했는데도 살이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젊은 부인처럼 이전보다 살이 올라 있었다.

“도련님, 낮에 종일 자서 잠이 안 와요.”

사사가 습관적으로 범한을 도련님이라 불렀다.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 엄마가 된 기쁨이 넘쳤지만, 말투는 겸손했다. 소탈하고 거리낌 없는 성격이라고 해서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사는 경도 안에서 안 좋은 일이 많이 발생했고, 아씨 마님이 애통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표현이나 행동을 조심했다.

다만 도련님이 방안으로 들어온 뒤 유씨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본체만체하면서 곧장 침대 옆으로 오는 걸 보자 마음이 심란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딸을 낳아서 도련님이 기뻐하지 않는 건가 하는 걱정에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어두워졌다.

사람을 마음을 꿰뚫어 보는 재주를 가진 범한이라도 저택 후원 안에 있는 여자들의 마음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사의 눈빛이 어두워진 걸 본 그는 출산할 때 옆에 있어 주지 않아 삐져서 그런 거라고 지레짐작하고는 웃으며 위로했다.

이처럼 범한은 사사의 눈빛이 어두워진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임완아와 유씨는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아이를 안고 있는 유씨가 침대 옆으로 다가오자 완아가 살며시 웃으며 범한에게 눈치를 주었다.

“얼른 딸을 봐보세요.”

완아의 말에 범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씨가 살짝 질책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게 된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유씨에게서 아이를 넘겨받았다. 범한이 아주 조심히 아이를 품에 안고 포대기에 싸여 있는 갓난아기의 얼굴을 바라봤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아이는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범한의 외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고, 큰 눈에 다정다감한 얼굴을 가진 사사의 외모와 비교했을 때도 한참을 못 미쳤다. 그런 딸아이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던 범한이 피식 웃으며 속으로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이의 외모를 걱정하다니. 그저 건강하기만 하면 그만인데 말이다.

한편 유씨를 비롯한 세 명의 여자들은 범한이 아이를 받아 안으려 하자 화들짝 놀며 긴장했다.

특히 아이를 안고 있던 유씨는 혹여나 범한이 아이를 떨어뜨릴까 걱정하며 언제든지 아이를 받을 수 있도록 손을 뻗은 채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범한은 잘 안다는 듯이 능숙하게 왼손으로 아이의 목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범 상서를 포함해 불안해하며 범한을 바라보고 있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며칠 동안 줄곧 우울해하고 있던 완아도 살며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지금 범한은 딸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이 세상 남자들은 아이를 안으려 하지 않으며, 특히 대가문의 경우 남자가 아이를 안는 경우가 아주 적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은 범한이 유모처럼 능숙하게 아이를 안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이를 안은 범한이 사사에게 말했다.

“최근에 시국이 불안정해서 고생이 많았겠군······. 하지만 방에 들어와서 곧장 아이를 보지 않은 건 딸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게 아니야. 나에게는 아이보다 네가 괜찮은지 확인하는 게 더 중요해서 그랬던 거야.”

유씨와 완의의 질책하는 얼굴을 보고 비로소 사사의 눈빛이 어두워진 진짜 이유를 알아챈 범한이 해명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 말을 완아와 사사가 각자 다르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또 예상하지 못했다.

범한의 말에 행복해진 사사는 어린 시절 도련님이 아이를 낳은 일에 가장 큰 고생을 하는 건 여자인 만큼 아이의 성별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사사는 자신의 행복한 마음을 완아 앞에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항상 인자하게 자신을 대해주는 작은 마님이 지난 2년 동안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지만 가지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한의 말에 완아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완아의 안색을 살피던 사사는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시큰하니 아려왔다.

이처럼 방 안에 있는 여자들의 마음은 복잡했지만, 범한은 딸아이를 보는 데 정신이 팔려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딸아이를 보는 그의 눈이 기쁨에 반짝였다. 맨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는 사사의 몸 상태와 완아의 기분을 살피느라고 딸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직접 품에 안자 지금은 온 관심이 딸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포대기를 통해 전해져 오는 작고 가녀린 몸의 온기와 딸아이의 이마에 잡히는 주름과 오물대는 입술을 보니 심장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여기 있었다. 여자는 10개월 동안 아이를 뱃속에 품고 마지막에는 힘겨운 출산을 경험하므로 아이가 태어나는 즉시 깊은 모성애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남자는 직접 보고 안고 느껴야 비로소 아이에 대한 부성애가 생겨난다.

더욱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인 범한은 사사가 임신했을 때 옆에 있어 줄 시간이 없었고, 아이에 대한 감정도 깊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를 직접 안은 지금에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멍하니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이 아이가 내 딸이란 말이지? 그럼 분명 엄청 예쁘게 자라겠군. 성질도 엄청 심술궂겠지. 꼭 감고 있는 두 눈은······ 갈수록 커지고 아름다워질 거야.’

순간 그의 머릿속에 자신이 지금 당장 죽더라도 이 세상에 자신의 무언가 남겨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도 부윤 손씨 저택에서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자신의 책을 보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었다. 더 강렬했고 더 선명했으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잠시 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완아가 유씨의 지도와 범한의 시범을 아래 아이를 건네받았다. 그녀가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 규범에 따라 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였고, 그러니 그녀의 애정 가득한 눈빛도 진심이었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던 범한은 완아가 아이를 바라보며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비로소 아내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랐다.

사실 범한의 사랑을 받으며 지내고 있는 완아는 소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아이를 안은 순간 슬픔을 잊은 듯 보이는 완아의 모습에 범한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밤이 깊어서 모두들 약간은 피곤했지만 범씨 집안에 새로운 생명이 찾아온 기쁨이 더 컸다. 아이에게 홀딱 반한 범 상서도 방 안에 계속 머무르며 전혀 돌아가 쉴 마음이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유씨가 웃으면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늙은 여종과 유모를 부른 뒤 모두에게 얼른 쉬라고 말했다.

떠나려던 범 상서는 오늘 황궁 안 상황과 폐하의 기분을 묻기 위해 범한을 서재로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동안 나쁜 일이 연거푸 터져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아들이 모처럼 가진 즐거운 시간을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 * *

-작가의 말

이제는 이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작은 솜저고리라는 말은 진심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들 이번 장을 좋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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