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화 백 년의 고독 (1)
동궁에서 나온 범한이 몸을 돌려 두꺼운 문을 직접 닫고는 주변을 빼곡하게 포위하고 있는 인파를 바라봤다. 그는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속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인파 가장 앞에 서 있는 요 태감을 향해 손 인사를 했다.
폐하와 함께 대동산 정상에서 위험천만한 시련을 이겨낸 요 태감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늙은 홍 태감의 뒤를 이어 경국 궁정 태감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평소와 다름없이 요 태감에게 가벼운 손 인사를 한 것이었다.
요 태감이 허리를 굽혀 공손히 맞인사를 했다.
범한이 앞으로 상당한 권세를 가지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두들 믿어 의심치 않았고, 요 태감 역시 마찬가지였다.
범한이 요 태감의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자 요 태감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범한의 명령이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감히 의심을 드러내며 동궁 안으로 들어가 직접 폐하에게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그가 궁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동궁에서 1장 정도 떨어진 곳까지 물러났다.
범한도 그들을 따라서 황궁에 있는 작은 숲 옆에 서서 멀리 조용한 동궁을 바라보며 폐하와 황태자가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생각했다.
사람들을 동궁에서 멀리 물러나게 한 이유는 사실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는 황제가 머리끝까지 화난 나머지 절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그 자신의 안전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현재 황제 폐하가 황태자를 폐위시키려 한 진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범한은 이유를 알고 있었고 심지어 이를 이용해 일을 꾸미기까지 했다.
하지만 황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무공 실력을 알고 있는 황제가 그가 동궁을 밖에서 황실의 은밀한 비밀을 엿들었다고 의심할 만한 상황을 만드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범한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근심 가득한 눈으로 동궁을 주시했다. 그는 승건처럼 외유내강한 사람이 굳이 둘째와 같은 길을 걸어가려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사실 범한만큼 속이 복잡한 사람도 드물었다. 왜냐하면, 황태자를 지금의 막다른 골목까지 몰고 간 사람이 그였으니 말이다. 물론······ 아무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적들의 기세를 꺾고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려고 그와 진평평이 꾸민 일에 용이 진짜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몇 년 동안 폐하 주변 사람들은 원했든 원치 않았던 폐하와 대립하게 되었고, 진평평과 범한은 마침내 폐하를 고독한 군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고독한 군주가 되었음에도 폐하는 여전히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서 있었다. 게다가 한 나라를 집어삼킨 것에 만족하지 않고 천하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범한은 이 점이 두려웠다.
* * *
동궁 안의 상황은 범한이 우려하는 것과는 달랐다. 황제와 황태자 부자는 처음에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걸 제외하면 신경질적인 가족극 싸움에 빠져들지 않았다.
사실 황족 안에는 상황을 격정적으로 몰고 가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냉정하고 우울하며, 침착하고 냉혹한 사람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황제는 스스럼없이 돌계단 위에 앉아서는 두 다리를 쩍 벌린 채 동궁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자신이 오래전에 궁 문 밖에 서서 황후의 출산 소식을 기다렸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은 황궁 전체가 기쁨으로 가득했었고, 황태후도 무척이나 기뻐했지만, 그는 기쁘기보다는 마음이 무거웠다.
궁 밖에 있는 임신한 여자가 보낸 편지를 받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기뻐했다. 그녀는 세상 일반 여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용상에 연연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복중의 태아를 위해서 제왕의 자리를 탐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또 이런 태도가 황제는 조금 불쾌했다.
20년이 지나 과거 불쾌했던 감정은 이미 흐려진 기억만큼 잊힌 감정이 되었다.
다만 가끔 황궁 뒤쪽에 있는 작은 전각에서 초상화 속 여인을 바라볼 때면, 그는 ‘안지는 자네의 아들인데 어째서 짐의 아들은 될 수 없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20년 전 태어나자마자 경국 황위 계승자로 결정되었던 아이는 이미 장성해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길고 부드러운 머리를 뒤로 푼 채 담담함과 체념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궁 밖 여자의 배 속에 있던 아이는 지금 동궁 밖 어딘가에 서서 동궁 안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무의식적으로 황태자가 마시던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차가 뜨거운지 차가운지도 알지 못했다.
“우리 경국은 세워진 지 오래되지 않았다.”
황제가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북제는 비록 2대밖에 되지 않았지만, 북위를 계승한 덕분에 내부가 무척이나 안정되어 있지. 지금 경국에서 십여 년 전에 북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젊은 황후와 어린 황자만 남겨두고 황제가 갑자기 서거하는 상황이 펼쳐진다면······ 고하와 같은 인물이 도와준다고 해도 황실을 지키기 힘들 거다.”
이승건이 찻잔을 쥐고 있는 부황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이유는 우리 경국은 모래벌판에서 싸우며 이뤄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사력이 강하고 검으로 이치를 말하는 데 익숙해서 예법이나 제위 같은 거로는 사람들이 굴복하지 않아.”
황제가 약간은 냉담한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경국의 군주는 너그럽고 어질기만 해서는 안 된다. 필요할 때는 과감히 잔혹한 수단도 부릴 줄 알고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해.”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어려서부터 이 궁 안에서 성장했고, 여덟 살이 지나기도 전에 어진 군주가 될 거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지······.”
이 말을 하는 황제에 입가에 약간 자조 섞인 미소가 걸렸다.
“상처 입은 토끼가 불쌍해 좀 도와줬던 일을 가지고도 노비들이 황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미래에 반드시 어진 군주가 될 거라 아부를 떨었어. 그냥 너그럽고 어질기만 한 건 겁 많고 나약한 거다. 경국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면 앞으로 50년 동안은 곳곳에서 싸움이 끊이질 않을 거고, 몰락한 왕조들은 굴복하지 않으려 할 거야. 그 50년 동안 만년을 이어갈 튼튼한 기초를 세워야 한다······. 짐이 싸워 천하를 통일시키면 네가 그 천하를 지켜야 하는 거야.”
황제가 아들을 바라보던 눈을 거둬들이며 천천히 말했다.
“너그럽고 어질기만 한 군주, 겁 많고 나약한 군주가 만 리의 강산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으냐?”
부황을 바라보던 이승건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비로소 부황이 이미 십여 년 전부터 미래의 몇십 년 뒤의 일까지 생각해 두었다는 걸 깨달았다.
천하를 통일할 자신감이 있는 부황은 천하통일을 넘어 백 년 뒤의 상황까지도 미리 계산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짐이 승택이를 너와 싸우게 한 거다.”
황제가 두 눈을 감으며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짐이 조급해서 어린 너희들을 너무 몰아세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승건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는 승택이에게 가능성이 있는지 보려 했던 거였는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짐은 그 애가 너무 가식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제왕이 되려면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 그 애는······ 그게 없었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황제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서 짐은 천하를 너에게 물려줄 생각을 굳히게 되었단다. 다만 최근 몇 년 동안 네가 매일 놀이에 빠져 밤마다 풍악을 울리고 노래를 부르며 지내는 모습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이승건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짓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때 겨우 14, 5살이었고 처음 세상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황께서 저를 폐위할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는 걸 아니 밤마다 불안해 여인의 품을 찾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승건의 당돌한 말을 듣고도 황제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승택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애는 총명해서 짐의 생각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 나갔어. 이런 면에서는 너보다 그 애가 더 뛰어났던 셈이지.”
“칼을 너무 많이 갈면 부러질 수도 있지만, 갈지 않으면 절대 날카로워질 수가 없다.”
황제가 두 눈을 뜨고 자신의 아들을 침착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는 너를 날카롭게 갈아주기보다는 오히려 무디게 만들었어. 바로 그때 안지가 경도로 온 거지······.”
이승건이 웃으며 별궁 밖에서 처음 범한을 봤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황태자였던 그는 범한을 그저 시랑의 아들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랑의 아들이 나중에 자신의 형제가 되어 황권 계승자를 단련시킬 가장 강력한 숫돌이 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2년 동안 너는 상당히 많은 성장을 거두었다.”
황제가 한숨을 쉬며 담담히 말했다.
“나이를 먹어 성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운예가 너를 가르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정과 민간에 모두 네가 황태자로서 자질이 있음을 인정했고, 짐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운예라는 두 글자를 들은 이승건의 입가가 실룩거리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용감히 말했다.
“부황께서 고모에게 정사를 배우게 하신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황제가 화를 내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사는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가 더 잘 가르쳤지.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짐이 운예를 통해서 네가 알려주고 싶었던 건 권모술수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이 방면에서는 운예보다 더 좋은 스승을 찾기가 힘들지.”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계속 배웠으면 분명 많이 좋아졌을 거다. 아직 배우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짐이 늙을 무렵이면 너도 많은 일을 경험했을 거고 결국에는 제왕이 권모술수를 부리는 방법도 알게 되었겠지. 그때가 되면 짐도 안심을 하고 네가 천하를 물려줄 수 있었을 거야.”
사실 지금 이승건은 기분이 묘했다. 어려서부터 황태자로 자란 그는 너무 엄격하기만 하고 포용해줄 줄 모르는 부황 밑에서 자란 탓에 겁 많고 유약한 성격으로 자랐다.
비록 최근 2년 동안 성격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부황과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지에게 그동안 경도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들었다.”
황제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잘 행동했더구나. 몇 가지 문제를 빼면 반란군을 아주 잘 통솔했어.”
그 말을 듣자 이승건이 황태자 신분으로서 황제 옆에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했다.
“천하 권력을 다투는 일에는 어떠한 온정도 가져서는 안 되고 무엇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하종위가 어사들을 이끌고 항명을 했을 때 즉시 곤장을 쳐서 꾸짖고 죽였어야 했어.”
황제가 무정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히 말했다.
“안지에게 설득된 조정 문관들이 즉위식 때 네게 반기를 들었을 때도 너는 주저하지 말고 칼을 휘둘러야 했다.”
황제가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마지막 조언을 했다.
“네 앞길을 막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죽여야 하는 거다. 이 점이 네가 안지보다 부족한 점이지.”
황제가 이어서 계속 말했다.
“네가 문하중서의 두 대학사와 문신들을 죽이지 않고 가둔 게 어떤 작용을 초래했는지 아느냐? 이것이 경도에서 벌어진 일 중에서 네가 가장 잘못한 부분이다······. 만약 운예가 직접 이 일을 처리했었다면, 너와 네 어머니에게 묻지도 않고 모두 죽였을 거야. 그럼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겠지만, 경도는 빠르게 안정됐을 거다. 그랬다면 범한이 계획을 세워 움직일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