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화 황궁에서 울린 종소리
황제가 아무 말 없이 앉아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황태후의 손을 가볍게 쥔 채 조금 전 장면을 생각하던 그는 자기 아들이 비밀을 알아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황제는 이 일을 범한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 대동산 싸움도 끝난 와중에 더는 계속 숨길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범한을 제외하면 누구도 황제가 수련한 공결의 특수함을 알아챌 수 없을 거였다.
범한의 놀란 표정을 떠올리던 황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몇 년 동안 고생을 했으니 보상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무공 비결을 자신이 보상으로 주려 한들 범한은 받을 수가 없었다.
다시 황태후를 바라본 황제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범한이 추측한 대로 대종사도 황태후 체내의 미약한 변화를 감지해 내지 못했다.
비개가 신중하게 건네준 비장의 약물은 과연 신묘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침대 가에 앉은 황제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현듯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마마마, 아들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많은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황태후의 손을 가볍게 잡은 그는 평소 당당하고 꼿꼿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살짝 움츠러들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친어머니가 점점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니 불안하고 슬퍼졌다.
초가을 함광전 안에 걸린 장막이 다시 하늘하늘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황태후의 손을 더욱더 세게 잡았다. 많은 양의 순수한 왕도의 정기를 계속해서 황태후의 몸이 주입했다.
대종사의 정기가 죽음에 이르는 발걸음을 늦춘 것인지 아니면 죽기 직전에 잠시나마 정신을 맑아지게 만든 것인지 황태후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면서 눈동자가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눈을 뜨고 깨어날 것처럼 보이면서도······ 황태후는 눈을 뜨지 못했다.
황제는 지금이 황태후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들려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황태후 옆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더니 두 손으로 창백한 손을 잡고 귓가에 대고 말했다.
“어마마마, 소자는 어마마마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고하와 사고검이 죽었습니다. 이제 천하는 경국의 것이 될 것입니다······.”
황제는 어린아이처럼 황태후의 귓가에 바짝 붙어서 그동안 발생한 일들을 모두 말했다. 심지어 자신이 대종사라는 비밀까지도 말했다. 마치 시험에서 만점 받은 아이가 신이 나서 자기 엄마에게 달려가 자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황태후에게 남은 시간이 아주 짧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떠나는 길이라도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황태후의 임종이 가까이 다가오자 침착하던 황제의 안색도 어둡게 변했다.
아주 중요한 문제를 고민하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황태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어마마마, 20년 전에 소자는 어마마마의 말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제 마음속 말에 따라 결정하려 합니다······. 안지는 괜찮은 아이입니다.”
생기가 사라진 황태후의 노쇠한 몸은 무기력하게 된 상태였다.
하지만 황태후가 이 말을 들은 것인지, 그 안에 담긴 천하를 뒤흔들 만한 의미를 이해한 것인지 갑자기 몸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돌려 황태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때 황태후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
황태후는 목구멍 안에서 ‘허! 허!’ 소리를 내며 말을 하려 애를 썼지만, 성대에 힘이 없는 탓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부었음에도 꺼져가는 생명과 약물의 효력을 이겨내지 못해 단 한마디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무궁한 원망과 후회, 그리고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 * *
동궁에 들어선 범한은 폐하가 올 것을 대비해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알고 있었다.
천년 대륙의 역사에서 부자가 서로를 해치고 원망하는 장면은 흔치 않게 등장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마음이 서늘해졌다.
이승건이 앞으로 겪을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조금 전 함광전 안에서 알게 된 사실과 황제 폐하가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잠시 뒤에 다시 이야기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황제가 바로 이름 없는 무공 비결 수련에 성공한 사람이자 황궁 안에 숨어 있는 신비한 대종사였다. 비로소 그는 황제가 대동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와 경도로 돌아오는 대열에 늙은 홍 태감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아마도 홍사상이란 패는 이미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모양이었다.
제왕의 존엄과 대종사의 실력을 가진 폐하는 대종산에서 사냥감의 역할에서 사냥꾼의 역할로 변했고, 게다가 그 옆에는 섭류운까지 있었으니 사고검과 고하가 처참한 결말을 맞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가 울적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이로써 다시 한번 황제 폐하가 무정한 냉혈한이라는 게 확인되었다.
과거 그는 경맥이 망가졌을 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었고, 황제도 늙은 홍 태감을 범씨 저택에 보내 상처를 알아보게 했었다. 하지만 대종사인 황제가 과연 무슨 일이 발생한 건지 모를 수 있었을까? 더욱이 황제는 이름 없는 무공 비결을 익힌 사람이었다······.
만약 이 세상에서 패도 공결의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황제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만약 해당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범한은 누워 앓다가 결국에는 일어나지 못했을 텐데도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범한의 마음이 더없이 서늘해졌다.
“부황께서 무사히 황궁으로 돌아오셨는데도 자네는 전혀 기뻐하지 않는 것 같군.”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황태자 이승건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짝 식은 차를 홀짝이며 여유롭게 있는 모습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범한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이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치 모든 적이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챈 것만 같았다.
“폐하께서 잠시 뒤에 오실 겁니다.”
범한이 이승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가 온다는 말에도 이승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어떤 다른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갇혀 있는 며칠 동안은 많은 문제를 생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더욱이 어머니와 고모의 연이은 죽음으로 그의 마음은 이미 얼어붙은 연못처럼 분명하고 깨끗해져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지. 어마마마도 돌아가셨고, 고모도 돌아가셨어.”
이승건이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고 범한을 바라보았다.
“부황께서도 언젠가는 돌아가실 거네. 순서의 문제일 뿐이야.”
범한이 잠시 생각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도 죽었습니다.”
이승건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깊은 궁에 갇혀 있어 며칠 동안 일이 난 일들을 알지 못했다. 다시 고개를 든 그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와 오랜 시간 싸워왔지만, 죽음까지도 선후를 다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이승건이 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먼저 떠나지만, 다음은 자네라네.”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를 대신해 좋은 자리를 맡아 두십시오.”
이승건이 시원스럽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왁자지껄 어울리며 살아야 하지만, 죽음은 고독하게 일이네. 그러니 자신의 자리도 스스로 쟁취해야지.”
범한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live together, die alone.’
이전 세계에서 이 말을 보았을 때 안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많은 죽음을 겪은 상태에서 이승건의 말을 들으니 비로소 이 말이 무수히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범한의 마음이 순간 섬뜩해졌다.
그는 함광전 안에서 황태후가 눈을 떴다는 건 모르고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살짝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쪽을 바라봤다. 황태후가 깨어난 건 그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과거에는 누구를 상대하든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지만, 황제 폐하가 대종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달랐다.
한 사람이 손에 가장 높은 무술 경지와 가장 높은 권력을 동시에 쥐고 있다면 신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이윽고 황궁 안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숙인 채 종이 울리는 숫자를 세던 범한이 숨을 내뱉었다. 황태후가 사망한 사실을 확인하니 안심이 되면서 어딘가 허전한 기분도 들었다.
한편 그의 맞은편에 있는 이승건은 완전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자신을 가장 아껴주었던 황태후도 고독하게 떠났다는 걸 알게 된 이승건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져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웅해 줄 필요 없네.”
범한이 두 손을 맞잡아 인사하며 말했다.
“편안히 떠나십시오.”
사실 이승건의 말이 완벽하게 옳은 건 아니었다. 죽음이 인간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일인 건 맞지만 죽음 직전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떠들썩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저승사자를 맞이할 무렵 가족과 지인들은 침대 가에 둘러서서는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재잘댄다.
오늘 동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궁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범한의 귀에 사람들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 걸어오던 황제 폐하가 동궁에 안으로는 혼자 들어왔다.
이승건은 일어나서 자신의 부황을 맞이하지도 않았지만, 죽기 전 왁자지껄한 모습이 싫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가 범한의 위험을 무릅쓴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아주 먼 낯선 곳으로 가서 평생 이름을 숨긴 채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째처럼 황제 폐하가 오기 전에 서둘러 독약을 먹고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부황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는 20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원망을 모두 토해내고 싶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죽은 뒤에도 원귀로 변할 것만 같았다.
“이 장면이 역사책에 어떻게 묘사될까요?”
이승건이 자신의 부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왕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사람은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법이었다. 2년 동안 상당히 성장한 황태자가 당당하게 말했다.
“정말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게 맞는지 알고 싶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평상복을 입은 경국 황제가 가만히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역사는 항상 승리자에 의해서 쓰이는 법이다. 그런데······ 설마 짐이 너에게 미안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냐?”
황태자가 한참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마마마의 세력이 약했음에도 아바마마께서는 저를 황태자로 세우시고 오랫동안 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니 제게 떳떳하시겠지요.”
황태자가 노골적으로 비꼬는 말투로 말하는 걸 볼 때 진심에서 한 말이 아니었다.
황제가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서 여자들이나 쓰는 유약하고 시기심 많은 말투를 배워 왔구나.”
“유약하다고요? 그건 아바마마 때문입니다. 아바마마의 눈부신 광채를 누가 뺏을 수 있겠습니까.”
황태자가 눈을 감고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제가 줄곧 고민해온 문제가 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자신의 권력을 후대에 물려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으셨으면서 왜 저를 황태자로 삼으신 겁니까?”
황제가 이상하리만큼 침착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승건아, 무척이나 실망스럽구나. 네가 좋은 군주가 될 수 있도록 짐이 오랜 시간 갈고 닦아 왔는데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게냐?”
이승건이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차갑게 비꼬았다.
“저는 검이 아닙니다. 그런 저를 부황께서 너무 많이 갈고 닦는 바람에 부러져 버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