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2화 논의 파수꾼 (2)
잠시 뒤 오래 자지도 않았는데 눈이 저절로 떠졌다.
어쨌거나 경도는 여전히 혼란한 상태였고, 그는 나라를 관리하는 감국으로서 너무 오래 쉬거나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대충 식사를 하고는 뜨거운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닦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문을 나서기 전 그가 무의식적으로 침대를 바라보았다. 치명적인 무기를 담은 상자는 침대 아래 먼지 구덩이 속에 고이 놓여 있었다.
마치 장 공주와 둘째가 평온히 관에 누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게 된 것처럼 말이다.
상자든 사람이든 볼품없는 존재로 변해서 볼품없는 곳에 있을 때야말로 진정한 평온을 얻을 수 있는 법이었다.
저택 대문을 나서기 전에 그가 또 무의식적으로 저택 안을 둘러봤다.
태평 별궁에서 돌아온 뒤로 완아를 만날 시간이 없어 아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 *
입궁한 뒤에는 또 무의식적으로 황궁 문을 바라봤다.
붉은 황궁 문은 곳곳에 불에 타고 그을린 흔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격렬했던 공격에 구멍이 나고 안에 있는 톱밥이 그대로 보이기까지 했다.
충격에 땅에 잔뜩 떨어져 있던 황금색 구리 못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지만, 문의 상처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그 순간 범한은 어떤 사실 하나를 확인했다. 바로 지금 여기 있는 황궁과 경도성과 경국이란 나라는 바로 그가 20년 동안 살아온 곳이며, 자신은 이미 이곳에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설사 이 황궁이 차갑고 음침한 곳일지라도, 여기 경도성에서 많은 사람이 자신을 배반했을지라도, 이 경국이란 나라에서 과거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여전히 그가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는 줄곧 자신을 경국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많은 일이 확실히 밝혀지거나 조사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삶에는 신경 쓰지 않으며 이 나라의 사람들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가 최근 몇 년 동안 줄곧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는 여전히 멀쩡히 살아 있었다. 다만······ 몇몇 사람들은 그가 살아 있는 걸 바라지 않았다.
* * *
어서방에 들어선 범한이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에게 저택에 돌아가 잠시 쉬라고 청했다. 두 대학사가 폐하를 대신해 어서방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조정 일을 살펴본 덕분에 각 로에서 급하게 보낸 상주문은 대부분 처리된 상태였다.
하지만 두 대학사는 철인이 아니었고, 범한만큼 정신력이 강하지도 않았다. 이에 두 대학사는 급작스러운 상황에 놀란데다가 잠도 자지 못해서 더는 버티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텅 빈 어서방에 앉은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과거 황제 폐하가 어서방에 있었을 때는 조용하면서도 무언가 다른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다.
황제의 위엄이거나 아니면 다른 특별한 무언가 때문이었는지 어쨌든 지금 어서방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황제 폐하가 어떻게 대동산에서 살아남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행동에 폐하가 무척 만족하고 있으리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권신으로서 그의 지위도 더욱 공고해질 것이었다. 다만······ 2, 3년 뒤에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막을 올릴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입안이 씁쓸해졌다.
군자는 양심을 속이는 짓은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범한은 군자가 아니었다. 지금 어서방에 앉아서 낮은 탁자에 산처럼 쌓여 있는 상주문을 바라보고, 또 낮은 평상을 바라보던 그는 황제가 그곳에서 경국의 조정을 통제해 왔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마음이 움찔했다.
그가 일어나 평소 황제가 앉아 있었던 낮은 평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만약 내가 저기 앉는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가 급히 고개를 젓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가 속으로 하루 동안 나랏일을 처리하느라 피로가 극에 달하는 바람에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생각했다.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가 기진맥진해서 태감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가는 모습만 봐도 황제의 업무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었다.
옛 말에 세상에는 남자, 여자, 황제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는 말이 있지만 진정한 군왕은······ 사람일 수 없었다.
“3 황자 저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던 범한이 어서방 밖에 있는 젊은 태감의 목소리를 듣고는 냉궁에 갇혀 있는 홍죽을 떠올랐다. 폐하가 돌아온 뒤 이 일을 어떻게 처리를 할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외부인이 봤을 때 홍죽은 어떤 일도 한 게 없으므로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점차 소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3 황자 이승평이 늙은 유모와 태감 몇 명을 데리고 어서방 밖에 나타났다. 범한이 늙은 유모를 한 번 보고는 손을 내저어 모두 물러가라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는 3 황자의 손을 잡고는 상주문이 쌓여 있는 낮은 단상 앞으로 데려갔다.
이승평의 손은 약간 차가웠고, 범한을 바라보는 눈빛은 강남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범한은 곁눈질로 3 황자의 안색을 살피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존경하고 두려워한다고 해서 사이가 멀어지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범한은 하루 동안 자신의 보인 모습이 3 황자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3 황자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걱정되었다.
이건 교육학 분야의 문제였고, 그래서 이 세계에서 범한을 제외하면 이해할 사람이 없었다. 기생집을 운영하며 사람까지 죽인 9살짜리 황자를 단순히 도덕적인 훈계만으로 어질고 너그러운 군주로 성장시킨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3 황자에게 떳떳하고 정당한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줘서 이해시켜야 했다.
3 황자는 본보기가 될 사람이 필요했고, 이에 강남에서부터 범한은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그는 시선이자 무예 고수였으며, 또 권신이면서 셋째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더구나 경국 대부분의 백성이 마음속으로 그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으므로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범한은 미래 경국의 황제가 좋은 사람이길 바랐다. 그렇다면······ 황태자가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스승님······ 부황께서······.”
이승평이 무서워 움츠리며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신묘가 폐하의 옥체를 보호해 주니 간악한 무리도 감히 해치지 못한 겁니다.”
“오!”
이승평의 얼굴에 기뻐하는 기색이 비쳤다. 그는 부황이 사망했을 경우 자신이 스승 범한과 1 황자의 지지를 받아 경국의 다음 황제가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직 어린 소년인 그는 용상을 원할 만큼 마음이 독하지 못했다.
범한은 신경을 쓰지 않는 척하면서 이승평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의 변화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속으로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앞으로 폐하께서는 저하를 어서방에 불러 옆에서 듣게 하실 겁니다.”
범한이 말을 마친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 저하께서는 미리 이곳을 잘 알고 계셔야 합니다.”
3 황자는 이전에도 어서방에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황태자 형님을 비롯해 둘째 형님과 첫째 형님, 심지어 스승인 범한까지 조회가 끝난 뒤 어서방에서 부황과 대신들이 하는 회의를 들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오늘 이후로 이곳 어서방에 있는 자리는 상당히 많이 비게 될 터다.
“할 말이 있어도 저하 앞에서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범한이 잠시 생각한 뒤에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너에게 당부해야 할 말이 있다.”
황제 폐하가 곧 돌아오기 전에 범한은 셋째에게 당부해야 할 말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셋째의 마음이 사실은 여리고 섬세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금까지는 계속 저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던 걸 바꿔 너라고 직접 불렀다.
“1 황자는 천성이 무예를 좋아하니 앞으로 분명 국경을 지키는 임무에 파견될 거다.”
약간 어두운 얼굴을 한 범인이 자신이 예상한 폐하의 계획을 설명했다.
“1 황자는 곧고 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절대로 먼저 형제의 우애가 상하게 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거니 의심하지 않고 믿어도 된다.”
3 황자가 손을 떨면서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좀 걸어 다닐 생각이다. 크고 넓은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남들이 보지 못한 걸 보아야 보람찬 인생을 살았다 할 수 있을 테니까.”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나 역시 의심하시지 않아도 된다. 네가 성인이 된 후에도······ 나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아무런 이유 없이 두려움을 느낀 3 황자가 입을 쩍 벌렸다.
“신하의 입장해서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범한이 미소를 거두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이 말을 명심해 주었으면 해. 나는 20년밖에 안 살았지만 이미 서로 마음을 추측하고 탐색하는 짓에 싫증이 났거든. 그러니까 네가 앞으로 성인이 된 뒤에 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지만, 이 말을 반드시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이런 말은 황실에서 금기시하는 말인 데다가 더구나 신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범한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에 이승평은 약간 수척해진 스승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셋째 날 안정을 찾은 경도로 말 세필이 들어왔다.
이윽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러 간 폐하가 돌아온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알려졌고, 불안에 떨었던 경도 백성들이 기뻐 날뛰었다.
황성 위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은 그렇게 많은 시련을 겪어 놓고도 무엇이 좋아 저리 기뻐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황제 폐하는 예정된 시간보다 3일 늦게 도착했다. 3일 동안 정주군의 군사 상황 보고가 군대 측과 감찰원의 경로를 통해 끊임없이 경도에 보내졌다.
이미 나라를 관리하는 일에 싫증이 난 범한은 폐하의 행새를 들고 대충 아무렇게나 찍기만 했다.
이날 마침내 소식이 전해지자 범한은 3 황자를 데리고 1 황자와 요행히 살아남은 보황파 대신들과 함께 아직 전투 흔적이 남아 있는 거리를 지나 정양문 밖에 십 리 밖에서 멈추었다.
수천 명의 사람이 빼곡하게 서서 무릎을 꿇었다. 관도에 다 설 수가 없어 일부 사람들은 관도 양옆에 있는 논 위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아직 추수되지 않은 황금색 벼가 군마에 짓밟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이삭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멀리 다가오는 황금색 어가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도 이삭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논에서 시선을 거둔 범한이 긴장과 기쁨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3 황자를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 * *
천천히 다가오던 어가가 관도에서 정지했다. 전란에 정신이 없었던 탓에 오늘은 관도에 황토를 깔고 물을 뿌리지 못했음에도 황제 폐하의 발걸음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천천히 어가에서 내려온 황제 폐하가 경도 주변의 땅을 밟았다.
자신을 부축하는 요 태감을 밀어 치운 황제가 담담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천 명의 신하들이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담담했고, 눈동자에는 별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천지가 떠내려갈 만큼 우렁찬 만세 소리를 들으며 멀리 경도성을 바라보던 황제가 고개를 돌려 가까이에 있는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는 갑옷을 입은 1 황자와 긴장과 기쁨과 불안이 섞인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3 황자를 바라본 뒤 마지막으로 범한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봤다.
황제가 범한의 얼굴에 짙게 드리운 피로를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