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1화 논의 파수꾼 (1)
범한은 2 황자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그가 뭘 걱정할지까지 생각해 미리 준비해 둘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순간 마음이 서늘해진 그의 머릿속에 섭령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섭령아의 말처럼 2 황자는 자신에게 더 가혹한 사람이었고, 이에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모두 버린 채였다.
2 황자가 고개를 들고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다가 다시 검붉은 피를 토했다. 그가 소매로 입술을 닦고는 길고 가는 손가락 두 개로 피가 묻은 포도알을 떼어 버렸다. 그리고는 깨끗한 쪽의 포도알을 떼어서 먹었다.
달콤한 과즙이 가득 담긴 포도알이 그의 입안에서 뭉개졌다. 2 황자가 ‘푸우’ 소리를 내며 포도 씨를 뱉었다. 바닥에 떨어진 포도 씨에도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포도를 다 먹은 그가 몸에 손을 비벼 닦고는 한숨을 쉬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범한을 바라보다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계속 웃음거리로 살고 싶지 않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생각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자네도 웃음거리 아닌가.”
2 황자는 점차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는 것이 죽음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고, 눈빛도 약간 흐릿해져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 경도에는 자네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네. 그중에서 제일 먼저 움직인 건 나이지. 설마 자네는 승건이 자네를 우호적으로 대해줬다고 생각하는가? 진씨 집안이 산골짜기에서 자네를 죽이지 못했을 때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동궁 안에서 밤새도록 발을 동동 굴렀다네······. 그런 승건이에게는 왜 다르게 대했던 건가?”
2 황자가 범한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계속 물었다.
“어째서······ 승건이는 나와 다르게 대해준 건가?”
범한은 자신도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2 황자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그의 마음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는 어째서 황태자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면서 둘째와는 죽기 살기로 싸우려 한 걸까?
2 황자가 눈꺼풀을 힘없이 아래로 늘어뜨리며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가 뭔지 아는가? 자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네. 자네는 처음부터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 물론 나도 자네를 좋아하지 않았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아. 다만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자네만큼 좋은 운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거네.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면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을 먼저 제거하려 하는 법이네.”
그의 차가운 눈빛에서 체념하는 기색이 보였다.
“만약 자네가 《석두기》에서 등장하는 영국부(榮國府)의 가(賈) 공자라면 나는 금릉성(金陵城)의 진보옥(甄寶玉)이라 할 수 있네. 진보옥은 가 공자와 비슷한 인물이었지만, 책에서 몇 번 출현하지도 못했지······. 진보옥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나는 진짜네.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2 황자가 말을 하면서 피를 토하자 그의 앞섬이 피로 물들었다. 정말이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량하고 애처로운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범한은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2 황자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힘겹게 말했다.
“나는 그동안 승건이 형제 중에서 가장 겁이 많고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네. 그런데 죽을 때가 되니 가장 겁 많고 나약한 사람은 나라는 걸 알겠어. 죽어서 령아와 어머니 곁을 떠나려 하는 건 차마 그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거든······. 내가 죽은 뒤 자네가 대신 령아를 보살펴 주게······. 어머니도 말이야. 어머니에게 이제 남은 가장 좋은 결말은 아무도 찾지 않는 냉궁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일 테지. 번거롭겠지만 자네가 나를 대신해서 보살펴 주었으면 하네.”
마치 어떤 무언가가 가슴을 뚫고 나오려는 듯이 2 황자의 가슴이 격렬하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2 황자가 범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말은 하는 바람에 범한은 지금까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2 황자가 입을 쩍 벌리더니 ‘푸후’ 소리를 내며 검붉은 피를 잔뜩 토했다. 그리고는 더는 숨을 쉬지 않았다.
2 황자는 의자에 앉은 채 죽었다. 왼손은 무릎 아래 내려놓고, 준수한 얼굴은 잿빛으로 변한 채 죽어버렸다.
잠시 뒤 그의 몸이 의자에서 떨어지면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감기 싫었는지 두 눈은 뜬 상태였다.
범한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2 황자의 시신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아직 초가을인데 밤공기가 왜 이리 차가운 거지?’
오들오들 떠는 그의 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도무지 이 시신을 앞에 두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침묵하는 게 가장 알맞은 모습인 걸까? 진짜 황자인 2 황자가 죽었으니 이 육신 안에 가짜 영혼을 가진 나는 앞으로 어떻게 계속 살아가야 하는 거지?’
범한이 우거지상 한 이유는 2 황자가 자신의 앞에서 자살해서도 아니었고, 2 황자가 죽기 직전에 그의 마음을 찌르는 말을 해서도 아니었다.
바로 죽기 직전에 그에게 자신을 대신해 섭령아와 숙 귀비를 돌봐 달라고 부탁해서였다.
‘왜 다들 나한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거지?’
범한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장 공주는 죽기 직전에 임완아를 자신에게 맡겼고, 황태자는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직감했을 때 반란군 병사들과 대신들의 가족을 지켜 달라 부탁했다······.
‘왜 그러는 거지? 설마 내가 자기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없는 원수라는 걸 모르는 건가? 아니면 자신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내 역할이 컸다는 걸 모르는 건가? 어째서 모두들 죽기 직전에 나에게 큰 짐을 안겨주는 것이지? 내가 부담감에 짓눌려 죽기를 바라는 건가? 왜 내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던 범한이 눈을 부릅뜨면서 이를 뿌드득 갈았다.
‘죽을 거면 그냥 죽을 것이지! 왜 산 사람인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냐고!’
고개를 숙인 채 얼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범한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잠시 뒤 2 황자의 시신 옆으로 걸어간 그가 책상 위에 있는 얇은 유서를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방 안을 빠져나왔다.
왕부 후원에 있는 침실로 가니 섭령아가 차가운 등잔불 아래서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왕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범한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녀 뒤로 살며시 걸어가서는 그대로 머리를 내리쳤다. 범한에게 맞은 섭령아는 반응할 새도 없이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만약 기절시키지 않는다면 섭령아는 2 황자가 독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알게 될 테고, 그럼 따라가겠다고 길길이 날뛸 거였다. 그래서 범한은 간단하고 거친 방법을 사용해 그녀가 사실을 아는 걸 늦출 수밖에 없었다.
궁전을 만난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다가 품속에서 유서를 꺼내 건네주고는 어깨에 메고 있던 섭령아도 건네주고 뭐라 몇 마디 말을 했다.
기절한 섭령아를 보고 화들짝 놀란 궁전이 이어서 2 황자가 죽은 사실을 알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둘째가 유서를 써두었으니 폐하께서 저와 대인을 탓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하고는 이어서 당부했다.
“왕비가 깨어나시기 전에 손발을 묶은 뒤에 이 소식을 전하십시오. 아마 소식을 들은 뒤에는 음식을 먹는 것도 거부하실 것이니 미음 같은 걸······ 억지로라도 입에 넣어서 먹게 하십시오.”
궁전은 이를 악물며 단호하게 말하는 범한의 차가운 모습이 당황하면서도 속으로 그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담박공이 예의 없이 행동하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궁전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 성격이 불같아서. 묶인 채로는 오래 지내지 못하실 겁니다.”
“불을 타오르는 만큼 빨리 꺼져버리지 않습니다. 저나 둘째처럼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들과는 다르지요.”
범한이 속으로 생각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 좀 안정되면 제가 다시 설득해 보겠습니다.”
* * *
왕부에서의 일이 처리될 때까지 기다리니 경도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멀리 동쪽에서 청백색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밤을 꼬박 샜지만 범한은 쉴 겨를이 없었다.
아직도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왕부에서 범씨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집안을 살펴본 뒤 다시 황궁으로 향했다.
비록 범 상서가 이 일은 예부의 태상사가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범한은 자신이 나라를 관리하는 감국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을 자기 일이 아니라고 모른 척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태상사 정경 임소안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 폐하를 따라갔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태상사 소경직을 겸하고 있는 그가 이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누가 한단 말인가?
범한이 1 황자와 나란히 서서 세 구의 검은 색 관을 바라봤다. 두 형제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작 하루 전만 해도 두 사람은 황성에 서서 궁 안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다.
경국 사람들 중 어느 누가 상황이 이처럼 급격하게 변해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역사에 기록될 인물의 이름이 바뀔 거라 예상을 했을까?
황성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느 누가 범한이 승자가 되고, 패배한 자들의 몸뚱이가 관에 들어가게 될 거라 예상이나 했을까?
장 공주와 2 황자는 다소곳이 관 안에 누워 있었고, 다른 하나의 관은 비어 있었다. 저 관에 누가 눕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예식에 부합하지 않네.”
침울한 얼굴을 한 1 황자가 애써 치솟는 슬픔을 억누르며 말했다.
장 공주가 사망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2 황자 이승택이 죽은 건 견디기가 어려웠다.
1 황자와 2 황자 사이에서 있던 형제의 우애는 거짓이 아니었다. 비록 지난 2년 동안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1 황자는 지금 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을 떠올리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범한이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부 관원들이 놀라 도망간데다가 폐하는 하루 만에 돌아오지는 못하실 겁니다. 게다가 6부 상황이 아직 정리되지 못했고, 태상사에도 사람이 없으니 임시로 이렇게 안치할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황실 사람인데, 저택 안에 계속 방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1 황자가 크게 한숨을 쉴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가 몸을 돌려 황성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관을 운반하러 오는 금군 대열과 겹치면서 뒷모습이 더욱더 쓸쓸해 보였다.
범한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1 황자는 계속되는 중압감과 끊임없이 들려오는 사망 소식으로 이미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범한 역시 몸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져오는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눈꺼풀을 들기도 어려울 만큼 지친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자기 뺌을 찰싹 때리고는 옆에 있는 부하에게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가자.”
밤 동안 네 번이나 저택을 방문했지만, 조금도 편안히 쉬지를 못했다. 범한은 자신이 세운 계획에 따라 황궁을 쳐들어간 뒤로 이틀 밤낮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 바람에 상처는 이미 도진 상태였고, 마황환의 약효도 모두 사라졌지만, 이미 정신력과 체력이 극한에까지 치달아 있어 다시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뒤 어두운 방을 바라보던 범한은 유씨와 함께 있는 완아를 보러 가지 않고 침대 위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가 발로 검은색 상자를 밀어 침대 아래 넣고는 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팔과 다리를 쭉 펼치고 대자로 누웠다.
너무 피곤하다 보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자 그가 멍하니 어두운 천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