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화 조용히 떠나려 하는 노인 (2)
감찰원 관리가 고개를 살짝 들어 범한의 눈치를 살피고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망친 세 명을 저희가 추적하고 있으며, 십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한 명이 대인에게 말을 남겼습니다.”
관리의 말은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고 논리적으로도 의미가 잘 통하지 않았다. 황궁에서 보낸 감시자 세 명이 도망을 갔는데, 어떻게 십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걸까? 순간 머릿속에 번쩍한 범한은 마음속에서 쿵쿵대는 소리를 들으며 물었다.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건가?”
“그 사람이 말하기를······ 집안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집안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범한은 당장 저택으로 돌아갔다. 오늘 저택 문을 두 번째 들어선 그는 곧장 후원에 있는 아버지의 서재로 달려갔다.
약탈을 당하지 않은 범씨 집안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서재에 켜진 등불이 유리창을 통해 가짜 산과 밝은 물을 비추고 있었다.
정왕의 말대로 아버지는 무사히 저택에 돌아와 있었다. 범한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왔다는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 보니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는 유씨가 보였다.
안을 둘러보던 그는 아버지가 꽈리 열매로 만든 음료를 마신 뒤라는 걸 알아챘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유자적하게 음료를 마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범한은 속으로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새어머니, 무탈하신지요?”
범한이 유씨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현재 명실상부 범씨 집안의 안주인인 유씨는 범한이 혼인할 때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었다.
범한의 인사를 받은 유씨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며느리를 위로하는 말을 몇 마디 하고는 서재를 나갔다.
등받이 의자에 앉은 호부 상서 범건이 고개를 들어 안도하면서도 약간은 질책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경도에 일이 터졌을 때 경도 안 곳곳에 숨어 있었던 늙은 세대 인물들은 이제 더는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경여당 밖에 있던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보낸 사람들이군요.”
범건이 책상을 가볍게 치며 생각하다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무엇 때문에 일을 거칠게 처리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허점이 많은 계획을 억지로 추진하다니······ 그런 계획으로 폐하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범한이 씁쓸히 웃으며 자신의 성격이 정말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용기가 많아진 대신 빈틈도 많아진 것이었다.
그가 의자에 앉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범한은 아버지가 황실을 대신해 비밀리에 호위를 길러낼 만큼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궁정의 감시자들을 죽였다는 것도 의외는 아니었다.
여유작작하게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범한이 속으로 자신이 섭중에게 폐하가 살아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으니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죽인 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비하면 사람을 죽이는 건 쉬운 일이다.”
범 상서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경도가 혼란에 휩싸여 반란군이 사람들을 많이 죽이기는 했지만······ 경여당에 불이 나 대행수들이 불타 죽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네가 화재 현장에 놓아둔 십여 구의 시체로는 아무도 속일 수 없을 거다.”
범한이 가만히 앉아서 범 상서의 질책을 들었다.
“게다가 너는 궁정에서 보낸 감시자들을 감찰원의 힘을 동원해 전부 죽일 생각은 하면서도 어찌 네 부하 중에 폐하의 감시자가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냐?”
“그래서 일을 나누어 진행해 계년조를 제외하면 누구도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합니다.”
범한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래, 감찰원은 진평평이 통제하고 있으니 그렇다 치고, 나중에 폐하에게 경여당을 감시하던 궁정 감시자가 전부 죽은 건 누가 설명할 거냐?”
범한이 입을 쩍 벌리고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궁정 감시자를 죽이기는 했지만, 왜 죽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반란군의 공격에 궁정 감시자가 죽었다고 한들 폐하가 그 말을 믿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행수의 가족은 아직도 경도에 있다.”
범건이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일러주었다.
“그들이 정말 떠나고 싶어 한들 떠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범건이 잠시 말을 멈춘 뒤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등자경에게 네 명의 대행수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했다. 경여당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납득을 시킬 수 있는 거다. 이해하니?”
“네, 이해합니다.”
범한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궁정의 감시자들은 서로 싸우다가 죽은 것이고, 경여당 대행수들을 떠나라 설득한 건 너도, 나도 아니라 장 공주다.”
범건의 눈빛이 점차 차갑게 변했다.
“그 십여 구의 시체는 신양에서 보낸 고수들인 걸로 하자.”
“폐하를 설득하는 이상 반드시 폐하가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장 공주는 황실 금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경여당 대행수들을 빼낼 생각을 품은 게야. 그녀라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실행할 능력도 갖추고 있지.”
범한이 진심으로 탄복했다.
이때 범 상서가 갑자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안지야······ 아비는 정말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다만 너도 경국 사람이고, 이 아비도 경국 사람이라는 걸 명심하거라. 그러니 어떤 경우에서도 경국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범 상서의 단호한 말에 범한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가 자신의 계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은 그는 변명하고 싶었지만 차마 거짓말로 아버지를 속일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범건이 그런 아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네게 할 말이 없구나. 어쨌든 황실 금고는······ 네 어머니의 것이었으니까. 경국의 신하인 나는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건 보고 싶지 않지만,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범한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아버지가 이런 결정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범한은 아버지가 자신을 속이거나 해치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경국의 천하통일에 황실 금고가 가진 중요성을 알기에 자신을 도우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늙어서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단다.”
과거 말쑥하고 준수했던 범 상서의 얼굴에는 이제 피곤함과 노쇠한 기색만 남아 있었다.
“폐하가 경도로 돌아오시면 사직을 청할 생각이다. 물론 너한테 일이 생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 경도에서 너를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줄 거다.”
‘아버지가 사직을 청하신다고?’
범한이 다시 한번 매우 놀랐다. 그해 봄에 황제가 범 상서를 내쫓기 위해 조정 언관들의 공격을 용인하고 호부 장부를 조사하게 했지만, 범 상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하면서 2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갑자기 사직을 청하겠다니?
“이유가 뭡니까?”
화들짝 놀란 범한이 이유를 묻자 범 상서가 웃으며 화제를 바꿔 물었다.
“황궁 안 상황은 아직 괜찮은 것이냐?”
범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1 황자 저하께서 다친 몸으로 지키고 계십니다. 황태후 마마는 병세가 위중하고, 황태자는 동궁에 갇혀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그래.”
범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전보다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경도로 돌아온 지 7, 8일 만에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경도를 지켜냈구나. 네 이번 행동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었음에도 범한은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제가 경도로 돌아와 황태자와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모두 폐하의 계획 때문이었다는 사실을요. 만약 정주군이 마지막에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황성을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범건이 손을 내저으며 아들의 말을 막았다.
“폐하는 가슴에 원대한 포부를 품고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분의 의도를 어찌 우리 같은 신하들이 함부로 예측할 수 있겠느냐······.”
범건이 부자연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섭씨 집안의 일은 모두의 예상을 깨는 것이긴 했지. 몇 년간 핍박을 받아온 섭씨 집안이 폐하의 숨겨 둔 패일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그가 범한을 바라보며 기품 있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1년 전에 있었던 산골짜기 습격 사건 뒤에 네가 한 판단이 정확했고, 내가 한 판단은 틀렸던 것 같구나.”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작년 산골짜기 습격 사건이 일어난 뒤 그와 범 상서는 수성용 쇠뇌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중에 진씨 집안의 소행이라는 게 밝혀지기는 했지만, 이전에는 폐하가 섭중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이에 경국 각 방면의 군력 배치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20년 동안 섭중이 경도 수비사 통령에 있었던 걸 제외하면 황궁의 금군 대통령과 대내 시위 수령을 한 사람이 모두 관리했던 건 궁전밖에 없다는 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범한은 자연스럽게 섭씨 집안을 이처럼 신임했던 폐하가 어째서 섭씨 집안을 2 황자와 혼인을 맺게 해서 장 공주 쪽으로 치우치게 만든 건지 의심했었다.
하지만 그때 범건이 자신이 알고 있는 이유를 말해 주었고, 범한도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의심을 더는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번 경도 반란을 통해서 범한이 품었던 의문이 사실이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황제 폐하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장 공주와 천하 모두를 속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심복이 범건마저도 완벽하게 속였다.
산골짜기 습격 사건이 언급되자 범한의 눈앞에 당시의 흰 눈에 그려진 붉은 핏자국들이 떠올랐다. 이윽고 자신이 추밀원 앞에 사람 머리 더미를 쌓아 놓고 날뛰었던 모습을 떠올린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와 장 공주 앞에서 자신이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던 것이 한없이 유치하고 가소롭게 느껴졌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버지, 소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진업이······ 폐하를 배반한 이유가 뭡니까?”
이것은 범한뿐만 아니라 모두가 궁금해하는 일이었다. 다만 황권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었던 만큼 사람들은 역사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진씨 집안도 권력을 얻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범한은 장 공주가 죽기 전에 한 말로 마음속에 독이 있는 꽃이 피어나서 이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진씨 집안은 명씨 집안의 무상주 1할을 가지고 있었고, 또 암암리에 교주 수군을 동원해 섬에 있는 해적을 몰살하기는 했지만 진씨 가문 어르신이 군대 원로인 만큼 폐하에게 계속 충성했다면, 폐하도 이 일을 묻어줬을 거였다.
게다가 황제 폐하가 어떤 인물인가. 만약 그동안 한 번이라도 진업의 충성심을 의심했었다면 그가 이토록 오랫동안 추밀원 정사로 있을 수는 없을 거였다. 더구나 최근 몇 년 동안은 진씨 가문 어르신이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추밀원 정사 자리의 주인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의심을 말했을 때 범건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산골짜기 습격이 일어난 날에 내가······ 이전에 황후의 아버지의 목을 벤 사람이 나라고 말하지 않았니. 하지만 그때 정말 모든 걸 완전하게 베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