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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65화 (765/1,108)

765화 존엄한 생존 또는 죽음 (1)

경도가 엄청난 혼란에 빠진 가운데 섭씨 집안과 금군은 진씨 집안의 패잔병들을 경도 밖으로 내쫓고 성문 9곳을 모두 통제했다.

하지만 경도의 상황은 이전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전에 두 군데가 대치했을 때 경도 백성들은 겁에 질려 자기 집 침대 아래 숨어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물론 이후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되자 겁에 질려 넋이 나가 있던 백성들도 마침내 용기를 내어 성문 앞으로 몰려갔다.

경도 백성 중에는 성 밖 교외에 먼 친척이 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경도가 위험해지자 이들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전쟁을 피해 성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렇지 않다면 승패가 정해져 흥분한 병사들이 경도를 약탈할 때 화를 입을지도 몰랐다.

그들의 이러한 걱정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최소한 지금 경도는 떠돌아다니는 패잔병과 군기가 엄격하지 못한 부하들이 서로 쫓고 쫓으면서 내키는 대로 약탈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큰 거리나 좁은 골목 모두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곳곳에서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따금 불꽃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경국 군대는 항상 군기가 엄격했음에도 지금의 혼란 상태에 이른 이유는 전쟁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나쁜 결과 때문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전투가 내부의 반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섭씨 집안이나 진씨 집안, 그리고 수비사 장군들까지 모두 많든 적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속 가장 어두운 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궁전은 병력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 추격하기보다는 먼저 경도 안의 질서를 정돈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경도가 워낙에 큰 탓에 일순간에 전체를 통제할 수는 없었고, 경도 백성들은 궁전 대장군의 통제로 경도가 안정화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들은 큰 전투가 일어난 뒤 패잔병들이 어떤 위험을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남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발악했다. 궁전이 직접 성문으로 몰려오는 백성들을 진압했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은 더욱 가중되었다.

한편 범한은 정주군 소대와 맞이하러 나온 감찰원 밀정들의 안내를 받아 다른 성문을 통해 경도 안으로 들어온 뒤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급히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서둘러 섭중을 보러 가지도 않았다. 범씨 저택에 돌아온 그는 완아를 위로해줄 여유도 없이 아버지와 정왕의 상황을 물어본 뒤 등자경을 불러 작은 목소리로 몇 가지 지시를 했다.

범씨 집안이 포위된 동안 등자경은 나무 막대기를 들고 집안의 호위병과 종들을 통솔하며 조정에서 내려오는 조서를 받고 소란에 대처했다. 다행히 범건이 집안에 없던 덕분에 범씨 저택은 큰 공격을 받지는 않았고, 떠돌아다니는 패잔병들은 범씨 집안 종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범건이 직접 훈련한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범한의 지시를 들은 등자경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을 받은 그는 아무 이유도 묻지 않았다. 그저 종들의 시선을 끌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28리 언덕 방향으로 급히 달려갈 뿐이었다.

멀리 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주변에서 어렴풋하게 들리는 소리를 듣던 범한은 비로소 마음이 약간 놓였다. 등자경을 28리 언덕에 있는 경여당으로 보낸 이유는 지금 경도의 혼란을 틈타서 경여당의 대행수들을 경도 밖으로 빼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건 갑작스럽게 떠올린 생각이 아니라 처음 계획을 세웠을 때부터 생각해 두었던 부분이었다. 대행수들은 범한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황실 금고 상품 제작 방법 등과 같은 중요한 기밀이 들어 있었고, 이건 경국과 천하의 상황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정보들이었다.

그래서 황제 폐하는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다른 세력의 손에 기밀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평생 경도 안에서만 살도록 했다. 그래서 섭가가 몰락하고 20년이 흘렀음에도 대행수들은 여전히 경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장 공주와 황태자의 반란으로 경도가 큰 혼란에 휩싸이면서 대행수들을 경도 밖으로 빼내고 싶었던 범한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사람들이 폐하가 돌아가셨다고 믿으면서 황실 질서가 무너지고 경도가 큰 혼란에 빠진 것이 범한의 눈앞에 한 줄기 희망을 드리운 것이다.

다만 그는 확실하게 믿고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이후 폐하가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 일단은 계획을 보류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태평 별궁에서 장 공주가 죽기 직전에 귓가에 대고 속삭인 말을 듣고 그는 결심을 굳혔다. 물론 장 공주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상황을 이용할 방법을 생각해 냈을 것이지만 말이다.

황제 폐하와 장 공주의 싸움이 다른 방면에서 진행되기 시작하자 범한은 아무 의지 없이 움직이는 바둑알처럼 잠자코 있었지만, 사실은 자신만의 생각과 계획을 품고 있었다.

경도의 혼란을 예측한 그는 혼란한 틈을 타서 이익을 챙기기 위해 눈을 번뜩이며 계획을 다듬고 있었다.

상심에 빠져 있는 완아를 위로할 새도 없이 범한이 몸을 돌려 저택을 나갔다. 장 공주의 시신은 지금 후원 유실에 놓여 있었지만, 그는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 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황제 폐하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상 전체 계획을 조정해야 했다.

그가 저택 대문을 막 나서려 하는 데 기마병 한 무리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을 바라봤다. 어느 쪽 부하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물론 지금 경도의 대세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정주군은 황궁 밖을 통제하고 있었고, 황궁의 방어는 섭중은 다시 1 황자에게 넘겨준 상태라서 성안에서 반란군이 다시 세력을 뭉친다는 건 불가능했다.

달려온 기마병은 역시나 정주군이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교관이 말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는 허겁지겁 말에서 내렸다.

“공야, 대원수께서 급히 보고할 일이 있으시답니다.”

경국에는 용맹한 장수들이 많았고, 각 로의 군대들을 습관적으로 자신이 모시는 장군을 대원수라고 불렀다.

서정군의 옛 부하들이 1 황자를 대원수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정주군 소속의 교관이 말하는 대원수란 자연스럽게 섭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놀란 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경도에 또 무슨 변수가 생긴 건가?’

당상 섭중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 범한은 더는 묻지 않고 말에 올라 기마병 부대와 함께 동화문 방향으로 달렸다. 길을 가는 도중에 교관의 설명을 들은 그는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었다.

교관의 설명을 듣던 범한은 자신이 태평 별궁에 있었을 때부터 섭중은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섭중이 동화문에서 황태자 이승건을 포위하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이에 양측 군대가 대치하며 담판을 진행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승건이 계속해서 범한을 보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섭중이 배신을 했음에도 반란군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고, 남은 병사들의 전투력도 상당했다. 하지만 범한은 이미 대세가 정해진 상황에서 황태자가 경도 성문 아래서 포위당한 채 위험한 대치를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으며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반란군을 경도 밖으로 몰아내서 야전을 펼치는 건 그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그건 섭씨 집안과 폐하에게 충성하는 각 로의 군대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동화문 아래서 포위당해 있다니? 황태자는 어째서 성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일까?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을 계속 몰았다. 잠시 뒤 성을 나가려 정양문 앞 몰려 있는 백성들을 강제로 몰아낸 범한 일행은 동화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화문 앞은 조용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진씨 집안 반란군은 거리 위에서 성문사와 정주군 군대들에 의해 포위당하고 있었다.

손에 무기를 움켜쥔 진씨 집안 반란군이 긴장감, 불안감, 절망감이 뒤섞인 눈빛으로 주변 군대를 바라보았다.

동화문 아래서 양측이 대치한 지도 이미 한 시진이 넘어서 반란군 정중앙에 서 있는 진씨 집안 장군들의 안색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하지만 황태자의 강력한 반대에 반란군은 동화문을 향해 총공격을 펼칠 수도 없었고, 정주군의 포위를 뚫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정주군 포위 진영을 지휘하는 섭중은 오랜 시간 인내심을 보이며 황태자가 요구한 범한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섭중은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반면 반란군 장군들은 1분이 1년 같이 느껴져 얼굴이 땀이 비가 오듯 흘렀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미 패배가 정해진 상황에서 정말 싸운다면 몇 사람도 살아남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황태자 저하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치를 이어가는 것인지, 반란을 저지르고도 살아남을 방법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알지 못했다.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황태자 이승건의 표정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약간은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당황하거나 겁에 질려 있지는 않았다. 그가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범한을 보고는 안심을 한 듯 한숨을 쉬었다.

정주군의 기마병이 파도처럼 대오를 가르자 범한이 말을 몰아 섭중 옆으로 갔다. 맞은편에 있는 황태자를 본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려 섭중의 귓가에 몇 마디 말을 했다.

섭중은 얼굴색이 밝아지고 눈을 반짝이더니 곧이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속으로 자신이 시간을 끌면서 황태자에게 기회를 준 게 옳았다고 생각했다. 황제 폐하가 큰 난관 속에서 살아남았으니 반란을 저지른 황태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황제 폐하가 결정하게 하는 게 옳았다.

비록 반란을 저지른 황태자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황제의 아들이었고, 섭중은 2 황자의 장인인 만큼 황태자의 생사를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고 싶지 않았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황태자를 바라봤다. 황태자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아주 중요한 결심을 한 듯 입술을 살짝 떨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왔는가?”

* * *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반란군은 정주군의 포로가 되었고, 절망에 빠진 진씨 집안 장군들도 생포되었다.

이로써 경도 안에서 벌어진 전투는 끝이 났다. 섭중이 대군을 이끌고 검은색 마차를 호위하며 황궁을 향해 달렸다.

검은색 마차는 감찰원이 준비한 것으로 안에는 범한과 황태자 이승건이 타고 있었다.

두 형제는 깊고 어두운 마차 안에서 오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먼저 침묵을 깬 건 범한이었다.

“제가 저하의 그 세 가지 요구에 응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범한이 눈을 살며시 감으며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만약 제가 못하더라도 속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황태자 이승건은 반란에 휩쓸린 무고한 병사들이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용기를 내어 투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범한에게 세 가지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것이었다.

이승건이 범한에게 직접 요구를 한 이유는 지금 경도에서 부황의 유훈을 가지고, 절대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범한의 말이 대군을 가진 섭중의 말보다 더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자신의 요구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조정에서 일반 병사들을 죽이려 할 사람은 없을 거였다.

범한이 뜨뜻미지근한 답변을 내놓자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황태자 이승건이 버럭 화를 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일반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지만, 그들을 살릴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단지 총알받이일 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엄연히 반역에 가담한 자들이 아닙니까. 경국 법률이 아무래 가혹하지 않다고 한들 반역자들까지 살려줄 정도로 가볍지는 않습니다.”

황태자는 총알받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대략 무슨 뜻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범한이 황태자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더구나 반란에 참여한 관리와 고위 장군들의 경우 제가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나도 그들이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건 알지만 온 가족을 연루시키지 않았으면 하네. 모두 대호족 가문이 아닌가. 연좌제로 죽이기 시작하면 수만 명이 죽게 될 수도 있네.”

이승건의 얼굴이 다소 어두워졌다. 그는 범한이 확실한 승낙을 해주길 바랐다. 어쨌든 아까 양쪽 군대 앞에서 범한이 직접 승낙을 해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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