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4화 귀밑머리에 핀 푸른 꽃
범한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순간 이전 생애에서 영화와 소설들에서 보았던 비극적인 결말이 떠오르자 그가 장 공주의 어깨를 꽉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완아는 어디 있습니까? 대보는요?”
그가 떠올린 결말은 바로 남자 주인공이 마지막에 가서는 승리를 하지만 적이 죽는 순간까지 가족을 어디에 숨겼는지, 죽였는지 살렸는지 말해주지 않아서 결국 가족을 찾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결말이었다.
이전 생애에서 봤던 비극적인 결말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범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완아와 대보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은지도 고민하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고함을 질렀다.
이운예가 조소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수에 묻은 독약이 몸 전체에 퍼진 걸 넘어 신경에까지 침투해 날카로운 고통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복부에 꽂혀 있는 검은색 비수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잔머리를 굴려 잔재주를 피우려 해서는 안 돼. 그런 건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야.”
순간 장 공주의 말의 의미를 알아챈 범한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검은색 비수가 눈에 익은 이유는 그가 직접 비수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개 선생이 어린 시절 그에게 줬던 비수와 똑같은 모양의 독약을 바른 비수를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 천하에는 이런 모양의 비수가 총 세 자루 있었다. 그중 하나는 범한의 장화 속에 숨겨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3 황자 이승건의 장화 속에 숨겨져 있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임대보의 장화 속에 숨겨져 있었다.
범한이 지키고 싶은 사람 중에서 어린 이승평과 멍청한 대보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가장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비수 두 자루를 만들어 그들에게 비밀리에 전해 주며 최후의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라고 알려주었다.
황궁 안에서 이승평은 검은색 비수로 자신의 목숨을 지켰다. 그리고 대보의 검은색 비수는 놀랍게도 장 공주의 복부에 꽂혀 있었다.
“너는 내가 대보를 이용해 너를 위협할 거라고 미리 짐작했겠지. 그래서 대보와 함께 있을 때 비수를 뽑아서 나를 찌르라고 알려준 거잖아······.”
이운예가 콜록거리자 입에서 약간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비웃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물론 그 뚱뚱한 백치가 공격하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몸을 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지만.”
이운예의 눈빛이 점점 꺼져갔다.
“몇 년 동안 임대보와 같이 지냈던 이유가 바로 나를 죽이기 위해서였던 거니? 그래서 임대보에게 본궁이 임공을 죽였다고 말해서 복수심에 불타게 만든 거야? 대보는 이운예란 사람을 무척이나 미워하고 있더군. 천하에서 그 백치에게 본궁의 이름을 알려줄 사람은 너밖에는 없어······.”
그녀가 마치 백치를 바라보는 것처럼 범한을 바라보았다.
“잔재주를 너무 많이 부리면 생각이 복잡해져서 조금도 대범해질 수 없어.”
자신의 마지막 패를 상대방이 이처럼 가소롭게 생각하고, 또 이렇게 쉽게 간파해 낼 줄 몰랐던 범한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에 드리운 두려움을 애써 떨쳐내고는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려 주십시오. 완아와 대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운예는 그를 더는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몸이 점차 차가워지고 있는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내가 죽으면 완아는 세상 남자들에게 멸시를 받을 것인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완아는 제 아내이니 제가 보호해 줄 겁니다.”
이운예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원래 네 첩을 죽일 생각이었어. 결과적으로는 죽일 수 없었지만 말이야. 게다가 너는 앞으로도 많은 여자를 거느릴 거잖아? 내가 뭣 하러 완아가 계속 고통받도록 놔둬야 하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범한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심해. 완아의 목숨을 이용해 너보고 고행자가 되라고 위협할 생각은 없으니까······.”
동요한 범한이 멍하니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양쪽 태양혈에 모인 독소 때문에 혈관은 이미 청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이 꼭 귀밑머리에 푸른 꽃이 핀 모습 같아서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조소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던 이운예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범한을 잡아당기더니 힘없이 그의 어깨에 기댔다.
두 사람은 더없이 친밀하게 서로 얼굴을 맞대고 몸을 가까이 붙이고 있게 되었다. 이런 모호한 자세를 취한 그녀가 그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씨 집안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궁금하니? 그럼 진평평에게 가서 물어보렴. 나도 대략으로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니까.”
절세의 미인이란 명성답게 장 공주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난초 향과 같은 감미롭고 따스한 숨결을 범한의 귀에 토해내며 요염함을 뽐냈다.
물론 범한은 그녀의 요염함에 빠질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녀의 양쪽 태양혈에 피운 푸른 꽃과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그의 눈동자가 수축하더니 놀람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운예가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본궁은 비록 죽지만 황제 폐하에게 가장 강한 적을 남겨둘 거야. 우리 경국이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건 바라지 않거든.”
범한은 입안이 바싹 말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힘없이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에는 망연자실하고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곳이 원래 네 어머니가 머물렀던 곳이라서 태워버릴 생각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네게 남겨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고, 네가 이곳에서 알았으면 하는 일도 있으니까. 절대 실망하게 하지 마.”
이운예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위를 바라보며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바보인 대보를 이용할 정도로 후안무치하고 위선적인 사람은 천하에 딱 두 명밖에 없어. 한 명은 황제 폐하이고, 다른 한 명은 바로 너야. 그래서······ 너에게 기대를 거는 거고.”
범한은 이미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서 마지막 말이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그의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그가 재빨리 몸을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줄이 끓긴 거문고 뒤 꽃나무를 아래에 작은 구덩이가 보였다.
그 구덩이 안에는 완아와 대보가 있었다. 두 사람은 손발이 꽁꽁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어서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는 상태였다.
살짝 눈시울이 붉어진 완아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재빨리 범한의 몸을 살피고는 다친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반면 대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범한은 알아보고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완아는 범한의 품에 안겨 있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어머니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안고 있던 장 공주를 밀어 떨어뜨리고는 꽃나무 옆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완아와 대보를 구덩이에서 꺼내준 뒤 몸에 묶여 있는 밧줄을 끊어줬다.
밧줄이 풀리자 완아는 입안에 물고 있는 재갈을 뱉을 새도 없이 범한을 지나 장 공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범한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가가려 하자 누군가가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보자 대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를 소매를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순간 죄책감과 옅은 슬픔을 느꼈다.
범한이 밀어 바닥에 떨어진 이운예는 독소가 이미 심장에까지 침투한 상태였고 독소가 모인 양쪽 태양혈의 푸른색도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희고 부드러운 피부 위에 보이는 푸른 점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 위에 그려진 아름다운 꽃 같았다.
하지만 그 푸른 꽃은······ 모두 독이었다. 그녀는 죽으면서도 자신의 말 몇 마디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싶어 했다.
완아가 한 손으로는 장 공주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안에 물고 있던 재갈을 풀었다. 그리고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울음을 토해냈다.
비록 두 사람은 세상 평범한 모녀들과는 달라서 감정이 돈독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핏줄이 이어진 혈육이었다.
이운예는 마지막 순간에 완아의 목숨을 이용해 범한을 위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완아는 가냘픈 숨을 헐떡이는 어머니를 보면서 애달프고 슬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운예가 차가운 오른손으로 딸의 손을 꽉 움켜쥐고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싶은 듯 손을 들어 귀밑머리를 곱게 매만졌다.
그녀의 손끝이 스산한 푸른 꽃을 시켜 지나가자 그녀의 입가에 자조하는 미소가 걸렸다. 누구를 비웃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범한이 완아를 보자마자 안고 있던 자신을 내팽개치고 달려간 걸 비웃는 것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황궁에 폭우가 내리던 밤에 비겁하지만 정이 깊었던 조카를 비웃는 것일 수도 있었고,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의 일을 떠올리며 비웃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경멸 어린 미소를 지으며 이 세상을 향해 마지막 말을 토해냈다.
“세상의 남자들이란······.”
범한은 잔디 위에 누운 장 공주의 몸이 점차 식어가는 걸 바라보면서 자신의 마음도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마주친 적 중 가장 강력하고 음흉했던 적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쉽게 단정을 지어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상을 뒤엎은 대동산 사건을 계획하고 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 공주는 결국 태평 별궁에서 비수에 맞아 사망했지만 사실 그녀 스스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척이나 기묘한 여인이자, 강력한 여인이었다. 만약 범한에게 검은 상자가 없었다면 그는 진작 연소을의 손에 죽었을 테고, 장 공주는 경도를 장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쨌거나 여자였기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짐작할 수도 없고, 대동산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도 알 수 없는 황제 폐하와 비교했을 때 장 공주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결점은 아마도 그녀가 폐하보다 약점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약점을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은 황당하고 터무니없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었다. 과거 세상에서 사랑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삶과 죽음을 약속하는 거라 말할 거라는 글을 쓴 원호문(元好問, 중국 금나라의 시인)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이 자신의 글의 의미를 실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련한 딸을 둔 장 공주는 분명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가 정말 패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온몸에 한기가 들어 뻣뻣하게 굳은 범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토록 하고 싶었던 일을 거의 다 이루었다.
게다가 그녀가 마지막에 범한의 귓가에 대고 한 말은 의미가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범한의 마음속에는 이미 독을 품은 꽃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녀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 양쪽 태양혈에 핀 독을 품은 푸른 꽃처럼 말이다.
완아는 장 공주의 몸을 끌어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범한의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던 임대보는 그 모습을 보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누이는 공주마마가 잠든 게 슬픈 건가?’
장 공주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길고 긴 속눈썹에 귀밑머리에는 푸른 꽃이 피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와서 입을 맞춰 깨워주기를 기다리는 잠든 미녀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던 범한이 자신도 모르게 낯선 말을 내뱉었다.
“Je suis comme je suis······.”
이 말은 14세기 프랑스 시에 등장하는 구절이었다.
이전 생애에서 보았던 영화에서 등장해 기억하고 있던 이 말이 지금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원래 이렇게 생긴 사람이야.
내 꼬락서니는 원래 이래.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랬어.
나는 내가 웃고 싶을 때 하하 웃어.
나의 사람을 사랑하는 건 내 결점은 아니야.
내가 매번 사랑하는 사람은, 매번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있어.
나는 원래 이렇게 생긴 사람이야.
내 꼬락서니는 원래 이래.
나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이걸 바꿀 방법이 없어.
나는 나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그걸 어쩌라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줘.
아이들처럼 서로를 사랑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