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9화 폭포에 씻긴 핏자국과 산 정상을 비추는 햇살 (2)
황제는 왕 십삼랑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인재를 아끼기 때문에 살려준 것이 아니라 왕 십삼랑이 안지와 무슨 관계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사고검이 울음과 웃음이 섞인 소리를 지른 것도 이 점을 알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앞둔 종사는 마지막 순간에 경국 황제가 어떤 실수를 저지를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는 실수하지 않았다. 그는 굳이 동이성의 미래를 앞당겨 없애 자신과 경국이 세상의 비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물론 왕 십삼랑의 결연한 의지가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했지만,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는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거만한 자신감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누구도 그가 가진 자신감이 지나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었다.
황제는 사고검이 죽으리라는 걸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모든 힘을 실어 날린 왕도의 권법으로 사고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혔는지 알고 있었다.
설사 사고검이 목숨을 부지한다고 하더라도 팔이 잘리고 중상을 입어 앞으로 누워만 지내야 하는 대종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 역시 그가 길을 비켜준 진정한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가장 적절한 시기에 적을 완벽하게 제거해 버리는 걸 선호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범한도 그가 이때 왕 십삼랑에게 길을 비켜준 진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황제가 왕 십삼랑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오죽이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사고검이 떠나자 고하도 떠났다. 그는 날아서 갔다. 북제의 국사가 하늘하늘 날아서 떠났다. 자신의 고향에서 삶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기 위해 돌아갔다.
천하 4대 종사가 모두 모여 격전을 벌였고, 그중 두 명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이건 천하의 대세로 보면 세상이 뒤집힐 만한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경국의 천하를 통일을 막아왔던 가장 큰 장애물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고하까지 대동산 정상에서 떠나자 오죽이 앞으로 내디뎠던 발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지금 경국 황제를 위협할 수 있는 건 천하 전체를 통틀어 오죽 한 사람밖에 없었다.
경제가 침착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 선생, 나에게 설명을 해 주시오.”
오죽 앞에서 황제 폐하는 자연스럽게 그를 오 선생이라 칭하고 자신을 짐이 아니라 ‘나’라고 칭했다.
오죽이 고개를 천천히 숙이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싫어서 그랬네.”
장님 종사는 대동산 정상에서 상처를 치료한 1여 년 동안 무언가가 기억 난 듯 말도 많아지고 표정도 풍부해지는 게 갈수록 일반 사람들을 닮아갔다. 예를 들어 일반 사람들처럼 좋다거나 싫다는 등의 감정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다만 그의 감정의 표현은 상당히 극단적이라서 그의 차가운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천하 통일이라는 패업과 관련된 일이든 20년을 쏟아부어 준비한 천하를 뒤엎을 계략과 관련 있는 일이든 상관없이 그는 자신이 싫은 일을 하지 않았다.
“도련님은 자네의 안전을 지키라고 하셨네.”
오죽이 고개를 들고 검은 천에 가려진 눈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네는 지금 안전하지.”
그는 이따금 범한을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황제의 표정은 침착했다.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죽이 당시 섭경미와 함께 동이성에 있을 때 사고검과 친분을 쌓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범씨 집안 아가씨는 현재 고하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대종사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아마도 곧 죽을 운명이었다. 그래서 경제는 아무런 걱정 없이 침착하게 오죽을 바라봤다.
“오 선생, 나와 함께 경도로 돌아갑시다.”
오죽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내가 몇 가지 일이 기억나기 시작했는데, 누구인지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네. 이제 보니 그 사람이 자네였군.”
그 사람이란 과거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이름 없는 무공 비결을 연마했던 사람을 말하는 거였다.
범한이 어렸을 때 오죽은 그 사람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기억해내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오늘에야 비로소 그 사람이 경국 황제였다는 걸 기억해낸 것이다.
오죽이 고개를 뻣뻣이 세우며 말했다.
“다시 보는군.”
‘다시 본다’라는 말은 오죽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섭류운에게 한 말이었다.
이 말을 끝으로 그가 허리춤에 있는 쇠막대기를 쥐고 돌계단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황제에게 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1여 년 동안 머물렀던 오래된 사원을 향해 작별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그냥 홀연히 돌계단 위에서 사라졌다.
모든 사람이 떠나고 산 정상에는 황제 한 사람만 남았다. 오늘 고하와 사고검이 죽을 거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오랜 시간 계획해 왔던 계획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천하 통일이라는 큰 포부를 이룰 수 있게 되었지만, 황제의 얼굴에는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며 가볍게 부는 바닷바람을 느꼈다. 약간은 고독하고 쓸쓸한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 이제 천하에서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겨룰 만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감정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산 정상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온 관리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경묘 제사들도 절반가량 살아남았다.
마지막에 왕도의 권법으로 사원이 부서진 걸 제외하면 종사들의 싸움은 신기하게도 완벽한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도 산 정상에 있는 사람들은 놀란 가슴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모든 걸 지켜봤으면서도 찰나의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검을 날려 폐하의 몸을 찌르려던 사고검이 어째서 공격을 받아 날아간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최소한 한 가지 사실 만큼은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황제 폐하가 이겼다는 것이었다. 이상할 만큼 완벽한 승리였다.
어떤 권모술수도 폐하의 능력 앞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니 경국의 미래는 분명 지금 산 정상을 비추고 있는 붉은 해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눈물범벅이 된 그들이 땅에 엎드려 만세를 올렸다.
산이 떠내려갈 만큼 우렁찬 만세 소리에도 황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처음 서 있던 곳에 그대로 서서 요 태감을 향해 작게 말했다.
“산에 내려가면 바로······ 움직일 것이니, 진 원장에게도 움직이라 알리게.”
“알겠습니다.”
“밀지를 연경에 보내서 매집례에게 잠시 정사를 대행해 서대영에서 송나라 국경을 압박할 수 있게 하라 하고, 그리고 대장 사비에게 이전 조서에 따라 창주 정북 진영에 가서 정북군을 접수하라 명령하게.”
“네 알겠습니다.”
“설청에게 유능한 관리 몇 명을 선별해 낙주로 보내라 하게. 짐이······ 하영지의 저택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황제는 오늘의 승리에 도취하여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오히려 더 냉정하고 침착하게 모든 걸 계산하고 명령을 내렸다.
사실 그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진평평에게 소식을 최대한 빨리 전달해야 했고, 정북영은 반드시 통제해야 했으며 동산로를······.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하던 요 태감은 마음이 서늘해졌다. 군대가 대동산을 포위하는데, 그 사실을 동산로가 몰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고, 그것은 하 총독이 장 공주와 결탁해 반란을 도와줬다는 의미였다.
이로써 하영지는 경국이 개국한 이래로 처음으로 제 목숨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총독이 되었다.
폐하는 이미 동산로 전체에 한바탕 피바람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에 관리들이 부족할 것을 대비해 설청에게 강남에서 좋은 관리를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침착하고 치밀하게 모든 일을 계획한 경제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던 그가 섭류운에게 다가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류운 아저씨, 고생하셨습니다.”
섭류운의 인사를 기다리지 않고 그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는 이미 깨끗하게 씻진 현장을 바라봤다.
홍사상이 이곳에서 죽었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 많은 사람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그리고 홍 내관은 경제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서둘러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요 태감이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관리들을 쓰러지지 않은 곁채 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요 태감은 황제의 명령에 맞게 밀지를 쓰고 옥새를 찍었다. 폐하가 가지고 있던 행새는 작은 범 대인이 가지고 갔지만, 폐하에게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인장이 하나 더 있었다. 밀지는 휴대하고 다니는 인장을 찍어야만 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한바탕 비가 퍼부은 대동산의 공기는 맑고 깨끗했다. 흰 비둘기 몇 마리가 ‘구구구’ 울면서 산 정상에 날아오더니 푸른 하늘 위를 몇 바퀴 돈 뒤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비둘기들은 홍수가 끝났다는 소식을 전하거나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력한 군왕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날아갔다.
줄곧 조용하던 대동산 산 정상에서 갑자기 ‘쿵쿵’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모래와 자갈이 진동하고 물보라가 일더니 조물주가 망치로 내리친 것처럼 산 정상 중간이 3척 정도 아래로 가라앉았다.
대종사들끼리 싸운 여파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가 드러난 것이었다.
대종사들의 힘이 서로 맞붙으면서 진기가 땅속에 침투해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지형까지 변하게 된 것이었다.
황제가 큰 구덩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들고 흰 비둘기가 하늘 위에서 춤을 추며 점차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침착하고 자신감에 찬 얼굴이었다.
* * *
연달아 밀서 몇 통을 보낸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요 태감에게 작은 목소리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요 태감은 분수에 맞지 않는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대동산에서 경제는 두 대종사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천하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예측하고 준비해 두었다. 예를 들면 대동산 아래 5천 명의 반란군이나 경도에서 발생한 반역과 같은 일 말이다.
장 공주는 이처럼 큰일을 계획한 이상 경국을 통제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거였다. 그리고 이 기회는 사실 경국 황제가 그녀에게 준 것이었다. 그러니 상황을 재빨리 수습해 경국을 안정시키고 발전을 유지하고 싶다면 최대한 빨리 대동산에서 내려와 경도로 돌아야 했다.
황제는 강북 1로에서 이미 주군을 굴복시키면서 추밀원의 인사이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로지 설청 및 강북로 총독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되도록 했다.
이에 자연히 진씨 집안의 세력을 놀라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군대를 가지고 대동산 아래 주둔해 있는 5천 명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을까?
반역자들은 황제를 함정에 빠진 호랑이라고만 생각했지, 호랑이가 줄곧 함정 옆에 서서 사냥꾼이 발을 헛디디기를 기다리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경제가 재빨리 경도로 돌아간다면 내란은 손쉽게 진압될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진평평과 함께 어서방 앞에서 두 차례 대화를 나누면서 이번 계획을 정했을 때부터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일단 대동산 일이 끝나면 대군을 이끌고 동산로를 소탕한 뒤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조정을 수습할 생각이었다. 대동산의 일은 비록 바다와 인접한 외지에서 발생한 일이었지만 경국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인 만큼 그에게는 얻기 힘든 기회였다.
대동산에서의 일은 오랜 시간을 거쳐 세운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목표는 당연하게도 경국의 천하 통일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 두 개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렇게 밖에 있는 장애물을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면 안에 있는 장애물은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