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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56화 (756/1,108)

756화 왕도(王道) (1)

늙은 홍 태감의 눈, 코, 입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가슴뼈가 무너지고 오관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정기도 흩어져 생명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늙은 홍 태감의 눈에는 여전히 비웃음과······ 살기가 가득했다.

순간 손바닥에서 심연과 같은 공허함이 전해져오자 고하의 눈동자가 오그라들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비웃는 늙은 홍 태감을 바라보았다.

대종사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고하 국사는 북제 개국 황제의 친 숙부였으며, 과거 대위 시절에는 재능을 인정받은 고행자였다.

이에 살면서 오만가지 일들을 경험하고 신묘를 찾아가 도를 구하기도 했던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4대 대종사가 모두 대동산에 모이자 그 역시 저절로 자신의 득실을 계산하고 승부욕이 생기게 되었다.

경국 황궁 안에 숨어 있는 늙은 홍 태감이 방금 전 패도의 정기를 발산해 사방에 건조한 바람을 불게 했다. 이런 경지를 보면 그는 명실상부 대종사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고하 국사는 손을 쓸 쓰지 않거나 쓸 엄두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고하 국사는 산과 물에 의지해 두 번째로 홍 태감의 가슴을 쓰다듬었을 때는 연못 밑바닥만큼 자신의 체내 깊숙이 고여 있는 무상의 천일도 정기를 사용했다.

대종사들끼리의 싸움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넋이 나갈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고하는 늙은 홍 태감의 가슴을 쓰다듬고 누를 때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렇게 쓰다듬는 와중에 늙은 홍 태감이 체내에 있는 정기를 사용한다면 언제든지 튕겨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늙은 홍 태감의 정기를 운행하는 방법이 너무 난폭해서 오래갈 수는 없었지만, 고하는 늙은 홍 태감에게 자신의 두 번째 공격을 대처할 방법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늙은 홍 태감은 그를 막지 않았다. 늙은 홍 태감의 가슴이 무너지고 찢어지자 몸에 있던 난폭한 패도의 정기도 순식간에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이 상태에서 늙은 홍 태감의 가슴이 갑자기 철판으로 변해 두 번째 머리가 나온다고 해도 고하는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 놀라서 더 놀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하는 지금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막기 힘들 정도로 난폭하게 움직이던 패도의 정기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대종사는 사람이지 신은 아니었다. 설사 그와 사고검이 신묘한 수행을 했다고 해도 이렇게 짧은 순간 안에 절정에 이른 정기를 갑자기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절정에 이르러 위력이 충만하던 정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어떠한 힘이든 전달이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고, 시간이 짧을수록 그 과정에서 생기는 충격의 정도도 강렬했다.

고하든 사고검이든 섭류운이든 할 것 없이 만약 늙은 홍 태감처럼 순식간에 체내에 있는 모든 정기를 방출했다면 몸이 찢겨 사망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늙은 홍 태감은 어떻게 해서 체내에 있는 정기를 순식간에 모두 사라지게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어째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단 말인가?

고하의 눈동자가 수축하였다. 그의 눈에서 반 촌 정도에서 앞에서 멈춘 빗방울에 옅은 검은 색 빛이 반사되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낯선 위험을 감지했다. 그건 바로 죽음의 냄새였다. 오랜 삶의 여정을 거쳐 온 고하 대사는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했다.

경력 5년에 장님과 재회 했을 때도 상당한 위험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생각이 하늘에 내리는 비처럼 고하 대사의 머릿속을 쓸고 지나갈 때 홍사상의 가슴뼈를 부순 그의 오른손은 날카로운 칼처럼 늙고 수척한 몸을 안을 파고들더니 등을 뚫고 나왔다.

심장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오장육부도 망가진 상태였다. 만약 비가 그쳤다면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을 거였다.

홍사상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이 세상에 심장이 산산조각이 나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굽은 그의 몸은 사고검이 산에 올라왔을 때 보였던 난폭하고 위풍당당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야말로 평범한 노인의 몸이었다. 피로 범벅이 된 그의 몸은 고하의 오른손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홍사상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 심장이 산산조각이 나고 숨이 끊어졌지만, 그의 몸의 경맥은 여전히 죽기 직전의 상태를 유지하며 모든 진기를 있는 힘껏 세상에 방출하고 있었다.

그의 경맥 말단에서 방출된 진기는 주변 자연으로 흡수되어 들어갔다.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검은 구덩이처럼 쥐 죽은 듯 고요하면서도 어떤 신비한 규율에 따라 자신의 시체의 경맥을 교량으로 삼아 방출하고 흡수하는 듯했다.

홍사상의 몸 안에 있는 팔도 포함해서 말이다.

고하 대사가 온 힘을 다해 몸을 뚫자 체내의 풍부한 정기가 모공마다 침투해 들어왔다. 홍사상의 섭리를 거스르는 생명을 대가로 한 비법에 쉬지 않고 외부로 방출했다.

고하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깨달을 것도 없이 그냥 저절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한 치 앞에 있는 빗방울이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 순간 고하는 자신이 계략에 빠졌으며, 이 대동산 자체가 거대한 장기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홍사상은 대종사가 아니었다. 그가 아까 산 정상에서 방출한 패도의 정기는 가짜였고, 대종사처럼 보였던 모습도 가짜였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몸과 정신이 부서지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있는 힘껏 정기를 방출할 수 있던 것이었고, 사람이 가능한 정도를 벗어난 난폭하고 거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던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홍사상은 이미 죽을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누군가가 홍사상의 죽음을 이용해 그의 정기를 약간 흡수했다. 그리고 그는 산과 물에 의지해 홍사상의 가슴을 쓰다듬었을 때 체내 깊숙이 고여 있는 무상의 천일도 정기를 이용해 몸과 목숨을 보호하는 데 허점이 생긴 상태였다.

홍사상의 죽음을 이용한 그 사람은 바로 이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이룬 신묘한 경지를 홍사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고하 대사는 사고검과 섭류운이 있는 곳에서 일어난 변화를 감지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눈이 밝게 번뜩였다. 마치 아무 조짐도 없이 푸른 호숫물에 떠오른 가을 달처럼 맑은 눈이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여제자인 해당타타는 세상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고하의 눈동자와 비교한다면 그녀의 눈동자는 밝은 달 아래 있는 보잘것없는 반딧불에 지나지 않았다.

고하는 세상의 환경과 가장 세밀하게 감응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심성도 무척이나 부드러운 사람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강인한 사람이기도 했다. 오래전 갖은 고난을 뚫고 결국에는 신묘에 찾아갔던 걸 보면 그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늙은 홍 태감이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는 즉각적이고 신속하게 반응했다.

그는 이 일을 꾸민 사람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반응했지만, 치명적인 시간의 격차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하의 눈은 밝은 달처럼 밝게 빛났고 외로운 별처럼 깨끗했다. 그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마치 대동산 정상에 있는 모든 공기를 빨아들일 기세였다.

늙은 가슴이 높이 부풀어 올랐다. 숨을 들이쉬는 동시에 그의 체내에 있는 천일도 무상의 정기가 오른손에서 흡수되기 시작했다.

천지가 내쉬고 들이쉬는 것이 따라 홍사상의 시신에서 가볍게 벗어난 그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자신의 경맥 안을 운행했다. 이렇게 빠른 운행은 천일도의 법문을 안정되게 펼칠 수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시간과 정지에 어떠한 구별도 없었다. 어떤 근육으로 통제하는 동작은 모두 할 겨를이 없었다. 수은이나 광선처럼 사람의 체내에 흐르는 정기는 어렴풋하게 시간의 제약을 돌파해 자신의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정기가 되돌아 흐르자 덜컹하면서 늙은 홍 태감의 노쇠한 몸이 자욱한 피 안개로 변했다. 하지만 주변에 흩뿌려지지는 않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고하 대사가 왼손을 내려뜨리고는 손가락 하나를 들고 공중에 반원을 그렸다. 이 대륙에서는 지금껏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었던 수식이었다.

수식이 그려짐에 따라 하늘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다시 멈췄고, 대동산 정상을 휩쓰는 비바람에 혼재되어 있거나 낡고 오래된 사원의 폐허에 스며들어 있는 옅은 기운이 기괴한 속도로 다가오더니 그의 몸에 흡수되었다.

이러한 기괴한 수식으로 불러들인 기운은 아주 미약했지만, 이런 위급한 고비에는 나뭇가지 하나 물방울 하나까지도 모두 대종사들 사이에서는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하는 진귀한 존재였다.

그렇다면 고하가 보인 수식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텅 비어 있는 공기와 부서진 사원 폐허에서 정기를 흡수할 수 있었던 걸까?

바로 술법이었다. 바다 멀리에 있는 법사들이 수행하는 술법이었다.

그것이 지금 고하 대사의 손에서 출현한 것이다.

폭우에 흠뻑 젖은 대동산에서 북제 국사 고하는 마침내 자신이 가진 비장의 법보를 꺼내 들었다. 평상시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이 최대한 빨리 진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이 되어 주었다.

지금 그는 오죽과 싸웠을 때도 사용하지 않았던 법보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용했다.

왜냐하면, 늙은 홍 태감이 죽는 순간에 피 안개가 흩뿌려지지 않는 순간에 손 하나가 옥처럼 맑은 손 하나가 피 안개 안에서 불쑥 나왔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기괴하고 이상한 장면이었다. 백옥처럼 하얀 손이 침착하게 피비린내 나는 안개 쏙에서 나오는 모습은 마치 저승에서 산 사람의 영혼을 잡아가기 위해 나온 손처럼 보였다.

그 손을 감지한 순간 고하의 눈이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그는 처음 반응은 아주 정상적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손이 섭류운의 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섭류운의 손이어야 이처럼 침착하고 신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고하는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체내의 천일도 정기가 일찌감치 자신의 몸에 돌아와 있었고, 신기한 술법을 사용해 불러들인 옅은 천지의 원기도 3만 6천 모공을 통해 자신의 경맥 안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의 체내의 정기는 가장 충만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한 번의 움직임에 사람이 허용할 수 있는 가장 최고 상태에 이른 것이다.

상대방이 늙은 홍 태감의 죽음을 이용해 그의 기세에 허점을 만들려 했다면, 고하는 기괴할 정도로 빠른 반응과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술법 수식을 사용해 그 허점을 완벽하게 메웠다.

심지어······ 그것은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새하얀 손에서 갑자기 피부 위의 빛이 사라지자 더욱 공포스럽게 보였다. 이처럼 빠른 상황의 변화 속에서도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믿기 어려운 정도로 안정되고 힘이 있었다. 기괴한 정도로 빠른 속도로 피 안개를 뚫고 나온 손이 ‘톡’하고 건드렸다.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 그 손은 집게손가락을 살짝 세우더니 곱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고하 대사의 한 치 앞에 있는 빗방울을 ‘톡’하고 건드리고는 그대로 양미간 사이로 떨어졌다.

마치 손가락으로 고하의 양미간 사이에 붉은 반점을 찍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손가락이 건드린 그 빗방울이 중심이 되어 주변에 아름다운 물결이 일어나더니 점점 확장되었다.

그리고 고하의 미간은 붉은 반점이 나타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밝아졌다. 마치 어두워지고 있는 고하의 눈동자 안에 있던 빛이 모두 양미간 사이로 옮겨간 것 같았다.

고하 대사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수련한 천일도 무상의 정기와 술법으로 부른 천지의 원기를 양미간 사이에 응축시켜 아름다운 손가락을 막고 있었다.

살짝 치켜 올려진 안정된 집게손가락은 양미간 사이에 응축된 순수한 정기와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종의 원만하고 부드러운 방식을 사용해 안에 주입했다. 난폭한 기운도 없었고, 살기도 없었으며 자연의 기운도 없었다. 그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정정당당한 규칙만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왕도(王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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