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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54화 (754/1,108)

754화 나무 아래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람 (3)

장 공주가 쉴 새 없이 계속 말을 하는 바람에 범한은 입을 열기도 쉽지 않았다. 장 공주의 말을 듣던 범한은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이기만 할 뿐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장 공주가 처음부터 대동산에 모인 대종사들이 모두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 역시 신선이 아니니 모든 세세한 부분을 완벽하게 계산해 낼 수는 없지만 지금 상황의 흐름은 그녀의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였다.

유일한 변수는 대동산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경도에서 출현했다. 범한이 대동산에서 살아 들어왔고, 섭중이 배반을 한 것이다.

“4대 종사가 황제 오라버니와 함께 죽었으니 이제 너는 용상에 누구를 앉힐지를 고민하고 있겠지? 네가 경도를 장악하는 바람에 승건이가 용상에 오르지 못하게 된 게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건 실패라고 할 수도 없지.”

장 공주가 범한을 바라보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폐하의 다섯 아들 중에 셋째는 아직 어리니까 제외하고, 남은 네 명 중에서 비록 둘째는 가장 영글지 못했지만, 경국에 천하를 안겨줄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어.”

“4대 종사는 모두 폐하와 함께 죽었어.”

장 공주의 얼굴에 거만함과 광인의 기질이 드러났다.

“그러니 황제 오라버니도 만족할 거야. 4대 종사의 호위를 받으며 저승으로 가는 셈이니까. 또 내가 그의 아들에게 천하를 안겨 준다면 황제 오라버니를 뵐 면목이 서는 셈이고.”

“그러면 장모님은요?”

범한이 살짝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와 진평평 대인이 입을 열 때마다 장 공주가 미쳤다고 말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정말 미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큰일을 벌이면서도 경도 싸움에서 마지막에 누가 살아남을지, 누가 용상에 앉을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 이씨 가문의 자제들이었고, 폐하의 아들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나?”

장 공주가 뭐 저런 천치가 다 있냐는 눈빛으로 자기 사위를 바라보았다.

“땅을 덮고 있는 흙과 하늘을 밝게 비추는 별 중에서 넌 뭐가 되고 싶니? 살면서 자신이 가진 광채를 발산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거야. 사람들이 뭐라 떠들든 역사책에 뭐라 기록되든 상관없어. 항상 체면을 생각하던 황제 오라버니도 결국에는 내 도움이 필요했잖아.”

범한은 장 공주와 황제가 마지막에 갈라서게 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명확하지 않은 질문이었음에도 장 공주는 무슨 의미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그녀가 태평 별궁의 고풍스러운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가 나를 저버렸으니까.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남자들이 오랜 시간 장악해 왔던 역사를 여자도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그녀가 천천히 일어나자 몸 위에 있던 꽃잎들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범한이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장 공주가 마지막 말은 이전에 광신궁에서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귀에 거슬리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말이었다.

이운예가 미련이 담긴 눈빛으로 태평 별궁의 풍경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 여기를 무척 좋아했어. 하지만 오라버니는 항상 내가 오지 못하게 했지. 그래서 내가 부황께 부탁을 드렸더니 오라버니가 불같이 화를 냈어. 그때 이 별궁의 여주인은 정말 제멋대로였는데.”

그녀가 은은히 웃으며 몸을 돌리자 가까이에 있던 꽃나무가 살짝 떨리면서 꽃잎이 떨어졌다. 그녀가 범한을 바라보며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봤을 때 본궁이 네 어미를 이긴 것 같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범한은 이 말을 듣자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맨발로 선 장 공주가 푸른 잔디 위에서 천천히 춤을 추었다. 홀가분하고 즐거운 감정이 담긴 춤사위였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범한은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그렇다.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서서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었다.

황제 폐하든 이운예든 시선은 처음부터 경도가 아니라 대동산을 향해 있었고, 애초부터 인간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됐던 네 명의 대종사들에게 향해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경도 안에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야 했던가? 역사책에 자신의 보잘것없는 이름을 남기고자 얼마나 많은 장사가 목이 베이고 생명을 잃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슬픔에 겨워 통곡했는가?

“장모님은 제 어머니만 못합니다.”

범한이 갑자기 말했다.

잔디 위에서 사뿐사뿐 춤을 추던 장 공주의 맨발이 순간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범한을 노려봤다. 설명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는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약간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어머니는 이 세상에 오신 뒤 최소한 경국인들을 웃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장모님은 반대로 천하 사람들을 울게 만드셨지요.”

이운예가 우두커니 서서 자조 섞인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범한의 이어진 말은 그녀를 분노하게 했다. 왜냐하면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당연하다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어머니의 초상화를 봤었는데, 확실히······ 장모님보다 훨씬 미인이시더군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섭경미를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어난 범한이 이운예의 표정은 바라보지 않은 채 엉덩이에 묻은 지푸라기를 털었다. 처음 계획을 세웠을 때부터 장 공주는 마지막으로 세상에 자신의 광채를 드러낸 뒤 죽어 저세상에 가서 황제 오라버니에게 따질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된 범한은 더는 그녀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상대방을 자극하고 변수를 계산해서 완아와 대보를 구할 방법을 찾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아주 큰 의문 덩어리가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긴 했지만 말이다.

‘황제는······ 정말 대종사들의 싸움 속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 * *

만약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면, 시간의 전후의 진행 방향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 당시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을 반대 방향으로 이동시켜 당시 대동산의 상황으로 돌아가 본다면 비에 흠뻑 젖은 용포도 볼 수 있고, 낡은 검도 볼 수 있으며 날카로운 칼날이 중년 남자에게 향하는 모습과 빗속에 있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정지. 초침을 정교하게 움직여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시간을 돌려 보자.

공중에 떠 있던 장검은 사고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반원을 그리며 돌아 경제의 등을 찌르려 했다.

그리고 이때 이미 경제의 옆까지 온 섭류운은 백옥처럼 하얀 손을 뻗었다.

검은 이미 공기를 뚫고, 대동산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농후한 원기를 찢으며 경제의 등을 향해 날아왔다.

검이 경제의 등을 찌르려 하는 순간 옥처럼 하얗다 못해 심지어는 앳되어 보이기까지 한 손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 검을 가볍게 잡았다.

대동산 정상에서 종사들이 경제를 둘러싸고 죽이려 하는 상황이 되자 마침내 세상이 경악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섭류운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검은 황제를 향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살기를 품은 검과 접촉한 건 섭류운의 소매였다.

삼배를 엮어 만든 넓은 소매가 찰나에 아주 부드럽게 변해 마치 대동산 산허리를 감싸고 있는 구름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검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찢긴 소매 천 조각이 나비처럼 하늘 위로 날아갔고, 살기를 내뿜고 날아오던 검은 소매와 부드럽게 뒤엉켜 힘을 잃어버렸다. 가지고 있던 차가운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검은 일순간에 볼품없는 고철처럼 변했다.

검이 너무나도 맹렬하게 다가오는 바람에 섭류운은 본래 계획과 달리 폐하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그의 진짜 역할을 드러난 셈이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기습 공격을 하려 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앞으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하얀 수염이 빗물에 젖은 섭류운이 눈을 내려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사고검의 정기가 담긴 검을 제압하고도 그의 표정은 전혀 자신만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예상보다 일찍 정체를 드러내는 바람에 사고검을 죽일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진지한 눈으로 손에 쥔 검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순간 이 평범한 검에서 무수히 많은 영혼이 튀어나와 산 정상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집어삼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옥처럼 고운 양손으로 동그란 원을 만들자 광택 없는 검이 공중에서 하늘 위로 솟구쳐 날아가다가 멈춰 섰다.

그는 대종사였기에 이 검에 사고검의 검의가 전부 실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면 검은 황제의 몸을 찌를 것이었다.

그가 그동안 천하를 주유해온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지만 계획보다 앞당겨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고검은 백치라고 불렸지만 정말 바보는 아니었다. 훗날 장 공주가 예측했던 데로 그와 고하는 섭류운이 경제 쪽에 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북제와 동이성 사람인 이들은 경국 사람의 교활한 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후의 순간에 이르지 못했는데 자신들이 위험에 빠지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삿갓을 쓴 왜소한 체격의 대종사는 세상에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대종사다운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검 한 자루만을 이용해서 경제가 세운 계획을 무너뜨리고 섭류운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태양처럼 경제 앞을 지키고 선 섭류운이 양손을 펼쳐 동그란 원을 만들어 다가오는 검을 막았을 때 사고검의 몸도 함께 떨렸다.

삼베옷을 입은 그의 몸이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강렬하게 진동했다. 하늘 높이 날아가던 그의 검은 섭류운의 양 손바닥 사이에서 멈춰서 있었다. 그의 몸이 진동하자 강력한 검의가 뿜어져 나와 그가 입고 있는 삼베옷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강렬한 검의가 뿜어져 나오자 섭류운의 양손에서 통제되고 있던 검이 미친 듯이 떨기 시작하더니 공중에서 ‘웅, 웅’ 소리를 내며 다시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이때 대동산에 내리던 비는 아직도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시간을 쪼개서 보면 빗방울이 하늘 위에서 떨어져 땅에 흡수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세차게 내리던 빗물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에 옥구슬처럼 천천히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투명한 옥구슬 같은 빗물 뒤에는 삼베옷을 입은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바로 검이었다. 천지를 찢어버릴 기세로 잠깐 동안 10여 장을 거리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번개처럼 빠르게 섭류운을 죽이려 했다.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몸에 차고 다니며 이미 하나가 된 평범한 검을 잡았다.

사고검의 손바닥이 다시 자신의 검을 잡았다. 검날에서 빛이 번뜩이는 모습이 은색 뱀에 어지럽게 춤을 추는 것처럼 서슬이 퍼렜다.

장대비가 정지한 것처럼 천천히 내려 사고검의 삼베옷에 부딪혀 부서지자 섭류운의 눈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흘러가는 구름이 태양을 휘감아 태양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처럼 그가 ‘흡!’하는 소리를 내더니 원을 그리고 있던 양손을 하나로 합쳤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단단한 금속이 부딪치는 것처럼 ‘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뒤 하얀 양 손바닥이 강제로 칼날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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