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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52화 (752/1,108)

752화 나무 아래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람 (1)

태평 별궁 앞에 선 범한이 신양 쪽 고수들 뒤로 보이는 푸른 정원을 바라봤다. 이곳에 도착해 ‘그분을 뵈러 왔다.’라는 한마디 후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양 쪽 고수들은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이들은 경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한 건지, 황궁에 갇혀 있어야 할 감찰원 제사 대인이 어떻게 태평 별궁 앞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그때 대나무 숲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주변 더위를 식혀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신양 고수들이 낮은 고함을 지르며 범한을 향해 돌진해왔다.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몸을 뒤로 빼더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주먹을 날려 고수의 얼굴을 가격했다. 깔끔하고 빠른 주먹질에 이빨이 부러진 고수가 피를 뿜으며 땅에 쓰러졌다. 움직이질 않는 걸 보니 그대로 기절해 버린 모양이었다.

발끝으로 선 범한이 체내에 난폭한 정기를 내뿜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리고는 옅은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포위망을 돌파했다. 그의 눈에 이를 악물고 돌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눈에 붉은 핏발이 서고 양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

이전에 언 공자와 만나서 계획을 상의할 때 그가 말했던 대로 지금 경도에는 범한의 상대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 가장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은 모두 황제 폐하와 함께 대동산에 묻혀 버렸다.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북제 고수들이나 동이성 9품 검객들도 모두 자석처럼 대동산에 빨려 들어가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경도 안에는 9품 고수라고는 세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그중에서 진씨 집안 어르신은 이미 죽었고 섭중은 그의 편이었으니 군대에 포위당하지 않는 이상 범한이 죽을 일은 없었다.

그가 정중하게 태평 별궁의 문을 두드린 이유는 완아와 대보의 안전 때문에 함부로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런 모습이 자신의 실력만 믿고 거만하게 구는 거로 보일 수 있었지만, 사실 그에게도 이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도박이었다.

장 공주가 범한처럼 음흉한 방법을 사용하려 하니 그는 잠시 다른 방법으로 대응해야만 했다.

하지만 신양 고수들은 작은 범 대인이 말로 싸우러 왔다는 걸 몰랐기에 두려워하면서도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 단 한 번의 일격에 중상을 입었으니 분명 참혹한 혈전이 펼쳐질 것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범한을 향해 돌진해오던 고수들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태평 별궁 담장 위에서 설치된 석궁들도 화살 머리를 올려 범한을 겨냥하는 걸 그만두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석궁을 바라보던 범한은 순간 마음이 섬뜩해졌다.

인생에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범한은 완아와 대보만 안전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범한이 태평 별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고수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막지 않았지만 범한은 밝은 곳과 어두운 곳에서 무수히 많은 눈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분명 그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모습을 보인다면 당장 공격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가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이유는 바로 태평 별궁 안에서 우아하고 그윽한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물소리처럼 평온한 소리가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장 공주마마가 거문고 소리를 통해 명령을 내렸으니 태평 별궁 곳곳에 배치된 고수들은 범한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지 않았다. 다만 의문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주마마께서는 어째서 범한을 들여보내라 하시는 걸까? 설마 범한이 얼마나 두려운 인물인지 모르시는 것인가? 범한이 혼자일 때 총공격을 펼쳐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십여 명의 고수들에게 압송 또는 감시를 받으며 태평 별궁 정문 안으로 들어간 범한은 다리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다리 너머는 진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장 공주마마가 직접 명령하지 않으면 누구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리 앞에 선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다리 나무판을 바라봤다. 나무판 사이로 흐르는 맑고 깨끗한 강물이 보였다. 태평 별궁이 있는 유정강은 섬에 막혀 있어 잔잔한 호수처럼 물결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다리 맞은편 안뜰에서 울려 퍼지는 그윽하고 부드러운 거문고 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범한은 눈으로는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귀로는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마치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것 같았다.

잠시 뒤 그가 의복을 꼼꼼히 정리하고는 성큼성큼 다리를 넘어 섬 안으로 들어가 나무문을 벌컥 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섬 중심에 있는 작은 호숫가 위에 있는 정자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가 양손을 잡고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마마를 뵙습니다.”

갑작스러운 인사에 거문고 연주가 중단되었다. 곱고 가는 손가락이 거문고 줄을 가볍게 누른 채 멈췄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이운예는 시선을 거문고 7현에만 집중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현의 오른쪽 끝으로 미끄러져 가더니 이전보다 부드럽게 우아한 소리로 연주를 시작했다.

가을바람에 섬 중심에 있는 작은 호수 물결에 살짝 파문이 일어 호숫가 청색 돌과 낮은 언덕에 부딪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장 공주와 거문고는 언덕 위에 있는 정자가 아니라 꽃나무 아래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활짝 펴 있는 이름 모를 꽃들이 잎이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자 꽃잎들이 비 오듯이 떨어졌다. 장 공주의 넓은 소매에도 꽃잎이 떨어져 언뜻 보면 소매에 수를 놓은 것처럼 보였다.

범한이 조용히 장 공주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운예의 평온하고 침착한 얼굴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요염했다.

오늘 장 공주는 화려하게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녀만이 가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윤이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비단 끈으로 간단하게 뒤로 묶은 것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 끝으로 거문고 현을 튕기는 그녀의 피부는 옥처럼 고왔고 속눈썹도 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은 자기 아내의 눈이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만약 그녀의 나이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남자라면 누구나 빠져들 만큼 그녀는 매력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범한이 호숫가 청색 돌판을 따라 걸어갔다. 눈을 가늘게 뜨고 거문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가 대뜸 말했다.

“연소을이 죽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장 공주는 아무 말 없이 낮게 울리던 거문고 현을 튕겨 떨리는 소리를 내었다.

“진항도 죽었습니다.”

범한이 그녀의 두 손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이운예의 오른손 손가락 두 개가 거문고의 네 번째 현을 쓸며 가볍게 누르자 거문고에서 그윽한 소리가 났다.

범한이 망설이지 않고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업도 죽었습니다.”

이운예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거문고 7현을 튕기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소리가 점점 애달파지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슬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담백했다. 다만 양쪽 넓은 소매가 살짝 떨리는 게 어렴풋하게나마 장 공주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갑자기 거문고 소리가 다시 우렁차졌다. 다만 현을 아무리 빠르게 튕겨도 나지막하고 예스러운 소리가 특징인 거문고의 음역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현을 뜯는 속도와는 완전히 상반되게 소리는 담담하고 순박한 맛을 풍겼다.

자신 있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정확한 음이었다.

이미 나무 아래까지 걸어간 범한이 그녀 옆에 서서 파도처럼 위아래로 일렁이는 거문고 현을 바라보았다.

“세상 사람들은 저를 뭐든 잘하는 인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음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연주하셔도 ‘쇠귀에 경 읽기’일 뿐입니다.”

이운예는 ‘쇠귀에 경 읽기’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에 고개를 숙이고 거문고 연주를 하는 데 집중했다.

그녀는 누군가가 연주를 듣고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냥 연주를 하고 있는 데 마침 범한이 찾아왔을 뿐이었다.

원래부터 성격이 뻔뻔스러운 범한은 계속 무시를 당하는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뻔뻔스럽게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장 공주 옆에 앉더니 그녀의 옆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섭중은 배반했습니다.”

거문고 소리가 갑자기 묵직해지더니 세 번째 현이 끊어져 버렸다.

장 공주가 고개를 천천히 들고 범한을 바라봤다. 고개를 드는 찰나의 순간에 평정심을 회복한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네가 찾아왔을 때는 좋은 소식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군.”

지난 몇 년 동안 장 공주와 범한은 각자의 입장에 서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충돌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그동안 벌인 싸움은 몇 년 동안 조정에서 일어난 큰 사건들을 관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줄기차게 서로를 물고 뜯으면서도 두 사람은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엄연히 말해서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가장 큰 적인 상대방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듣고 싶으신 그 좋은 소식이란 제 머리를 가져왔다는 거겠지요.”

범한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자 그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장 공주는 두 손으로 줄이 끊어져 버린 거문고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원래부터 흰 피부가 더욱 하얘져서 투명하게까지 보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던 양 볼의 발그스름한 혈색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었다.

범한이 태평 별궁에 갑자기 나타날 거라고는 그녀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이것은 그녀가 남겨둔 반란군 사람들이 경도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고하는 것보다 범한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어렴풋하게나마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범한을 안으로 들였다.

그녀는 범한의 약점을 쥐고 있기에 애처가이고 누구보다 가족을 아끼는 사위가 자신을 위협할 거란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범한의 입에서 네 가지 소식을 들었을 때 장 공주도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연소을이 죽었을 거라는 건 범한이 경도에 등장했을 때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사실을 전해 들으니 마음이 슬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소을은 그녀가 직접 발굴해낸 사람으로,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이었다.

또 진항과 진업의 사망 소식은 장 공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경도의 상황이 이런 방향으로 흐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후 범한의 입에서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된 이유가 나오자 그녀는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분노를 내비치는 동시에 평정심을 회복한 장 공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슬픔이 어린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자네는 여전히 나에게 간청을 하러 왔지.”

“제가 이렇게 왔으니 경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장 공주 옆에 앉아 있는 범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와 장 공주 모두 지금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은 홀로 이곳을 찾아올 수 있었던 것과 장 공주가 그를 안으로 들일 수 있었던 건 바로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모든 가능성을 단번에 잘라 버리고 싶지 않았다.

장 공주는 임완아와 대보를 잡고 있었고, 범한은 경도 안에서 뒤집힐 수 없을 만큼 유리한 고지에 올라 있었다.

이운예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넓은 소매로 줄이 끊긴 거문고를 가렸다. 옅은 색 홑옷 아래 팔이 살며시 떨리는 게 무척이나 가련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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