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8화 일순간에 알게 된 이중간자
한 달 전, 대동산 아래에서 섭류운이 바다에서 배를 타고 나타났다. 그때 그가 날린 검은 바닷속 암초를 부수고 검 자루만 밖에 남겨둔 채 절벽에 박혔다.
그때 범한은 암초에 있다가 화살 공격을 받아 다쳤지만 다행히 바닷속으로 들어가 도망갈 수 있었다.
몇 년 전, 소주성 포월루에 섭류운이 삿갓을 쓰고 나타나 검으로 건물 절반을 날려버렸다.
그는 군산회를 위해 나섰으며, 그 회계 선생이란 자를 강제로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그때 범한은 험한 소리를 해댔었고, 내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섭류운이 지닌 능력과 대종사로서의 위엄을 생각했을 때, 이는 기이한 일이었다.
범한이 그와 두 번이나 부딪혔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이를 단서로 경국의 옛일을 살펴보니, 명확히 보이는 게 있었다.
2년 전, 현공 사당에서 국화감상을 하던 때에 궁전이 괴이하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경국 황제를 노린 갑작스러운 자객의 출현에 현공 사당에서는 큰 혼란이 일었고, 범한은 중상을 입었으며, 섭중은 범인을 쫓았지만 공을 세우지 못했다.
조정은 깜짝 놀랐고, 황제 폐하는 진노해 섭중을 경도수비사 통령 자리에서 해임시킨 후 정주로 쫓아버렸다. 궁전은 하옥되었지만 다행히도 감옥에서 살아서 나올 수는 있었다.
2년하고도 2개월 전, 범한은 북제 상경성에서 2 황자와 섭령아의 혼사 소식을 듣고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섭중이 황자 간 황위 다툼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황제 폐하께서 그에게 자리에 물러나라 은연중에 압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8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범한이 12살이었을 때, 담주 절벽에서 패도의 공결을 힘들게 연마했을 때였다.
그때 섭류운이 노래를 부르며 나타나 오죽과 무공 연구를 하고는 반으로 쪼개진 배를 타고 사라졌었다.
* * *
현공 사당에서의 일이 발생했을 때 범한과 진평평은 밤새 긴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다. 그리고 그때 두 사람은 황제 폐하께서 이번 사건을 가지고 일부러 섭씨 가문을 압박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궁전을 금군에서 잘라버린 것도 섭중에게 경도를 떠나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범한과 진평평은 여러 의혹에 쌓여 있었고, 황제 폐하의 의심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단지 황권과 대종사 간의 싸움이라고만 생각해 꼼꼼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경국 황제 폐하가 섭가를 처리한 일은 많은 의심을 낳게 하는 약점을 한꺼번에 드러낸 것이었다. 더군다나 모호한 수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정당당한 수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이때 범한은 12살 때 처음 만났을 때 노래 부르던 대종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모든 게 하나로 꿰어지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명확해졌다.
황제의 과도한 의심, 황제의 실책은 뜻밖에도 일부러 약점을 드러낸 것이었다.
섭씨 가문이 자신에게서 마음을 돌리도록 함으로써 천하의 적에게 자신을 공격하게 할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이다.
‘8년이나 되었다니.’
범한은 사대종사 중에 왜 자신이 유일하게 섭류운만 만나게 된 건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왜 섭류운이 천하를 주유하다가 하필 담주에 들렀는지도, 그리고 그 많은 사람이 찾고 싶어도 전혀 찾을 수 없는 오죽 아저씨를 어찌 그리 쉽게 찾아낸 건지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오죽이 어디에 있었는가?
천하 사람들은 알 수 없었지만 일부 사람은 알고 있었다.
범한이 있는 곳에 오죽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당시 범한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서 황제 폐하, 진평평, 범건 이 세 사람뿐이었다.
여기까지 분석해보니 모든 게 분명해졌다. 섭류운이 담주로 온 건 분명 누군가가 알려주어서였다.
섭경미의 아들이 담주에 있으니 오죽도 자연스레 담주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섭류운에게 이 모든 걸 말해준 이는, 당연히 황제 폐하였다.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 섭류운에게 담주로 가 신세가 기구한 자신의 사생아를 보고 와 달라 정중히 부탁했을 수도 있다.
그런 걸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황제 폐하가 제일 신임하는 사람이어야 할 터.
그리고 그런 사람이 어찌 황제 폐하를 배신할까!
황제 폐하의 과한 의심, 섭씨 가문의 배반, 2 황자와 섭령아의 혼사, 섭류운이라는 초연한 존재의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단순한 허상이었다. 어쩌면 필연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 할 수도 있을 터.
그리고 이런 것들이 완벽한 이중간자를 만들어내는 한 부분일 뿐이었다.
이 계획이 세워진 지 이미 1년, 2년, 3년······. 만약 섭류운이 군산회에서 받들어 모셔지는 존재가 된 때부터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 계획은 십여 년 전에 세워졌을 수 있었다.
긴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가며 천하 모든 사람을 속인 것이다. 범한 자신과 장 공주의 눈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는 경국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이중간자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와 비교한다면, 감찰원이 꽂아 놓은 언약해와 원굉도는, 별 것 아니지 않을까?
* * *
딱 1초였다. 범한 머릿속에 방금 전의 무수한 장면이 지나가기까지 말이다.
범한이 눈빛을 거두었다. 차분한 표정의 섭중을 보고 있자니 마치 석빙고에 떨어지기라도 한 듯 몸에 갑자기 한기가 드는 기분이어서였다.
이 계획은 분명 진평평도 모르고 있을 터. 범한은 황제가 정말 너무나 무서웠다.
섭중을 보고 있는데 입술이 말랐다. 범한이 품에서 자기만 가지고 있는 요패를 꺼내 건네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이때 이 작은 공작 어르신을 바라보고 있던 섭중도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처음 진 영감님을 급습할 때 황성 위쪽에 있던 범한이 대세를 이용해 자신을 돕는 데 합류할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해서였다. 그래서 섭중도 깜짝 놀라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에게 이 계획을 모두 말씀하신 건가?’
그런데 범한이 질문을 던졌을 때 섭중도 동시에 질문을 던졌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살아 계신가?”
두 사람은 동시에 똑같은 질문을 해놓고 다시 또 똑같이 놀라버렸다. 그리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제야 두 사람 다 알게 된 게 있어서였다. 지금까지 경도 사람들은, 심지어 황제가 누구보다 신임하는 범한과 이 계획의 제일 중요한 요소였던 섭중도 아직 황제 폐하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운예는 어디에 있습니까?”
“태평 별궁이네.”
두 사람이 말을 멈추었다. 섭중이 범한이 건네는 요패를 받아들었다. 궁전은 진 영감님의 시신을 들쳐 매더니 싸우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광장 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진업을 죽이고 지금까지, 고작 순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당사자들은 그 사이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대화를 통한 문답이라 칭할 수 있는 건 방금 범한과 섭중이 나눈 딱 두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 처음 내뱉은 말은 이미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모두가 큰 장기판 속의 말일 뿐이었으니 제 본분만 지키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일을 꾸미는 건 사람이래도 일은 성사시켜주는 건 하늘 아니던가. 그러니 대동산의 일이 어찌 되었는지는 잠시 제쳐두고, 더 생각할 필요 없었다.
범한이 무겁게 숨을 들이마셔 체내 패도의 정기와 약물이 주는 불쾌감을 강제로 억누르고 오싹한 기분도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는 벽에 있는 작은 구멍은 의식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계획을 황제 폐하가 이토록 긴 시간 동안 그리 많은 신경을 써서 계획했다니. 분명 대단한 걸 도모하고 있을 터였다.
경국 내부의 반대 세력 제거가 첫 번째 목표였을 테고 말이다. 그리고 황제 페하의 진짜 목적은 어쩌면 이것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었다.
진평평의 말을 빌려서 말한다면, 천하에서 경국의 황제 폐하만 제일 높은 곳에 올라 제일 높은 곳까지 볼 수 있었다.
황제 폐하는 20여 년 동안 당연히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 우아한 경치를 보아왔을 것이다. 특히나 잠시 그에게 속해 있지 않은 땅과 사람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섭씨 가문를 이중간자로 이용한 계획은 어쩌면 북제와 동이를 목표로 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대동산에 고하와 사고검이 모두 당도했고, 섭류운은 도리어 황제 폐하의 숨은 조력자였으니, 어쩌면 천하의 대세는 이미 저 산에서 경천동지할 변화를 맞이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아무리 섭류운이 대동산에서 갑자기 행동을 바꾼다 해도 고하와 사고검도 대단히 뛰어난 이들이 아니던가. 그러니 4대종사가 대동산에 모여 고하와 사고검이 손해 보는 상황이라 해도, 어찌 황제 폐하가 저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겠는가?
범한의 미간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대동산을 대세를 결정지을 지역으로 선택하셨다. 그렇다면 제일 중요한 건 오죽 아저씨가 나서주느냐인데. 한데 오죽 아저씨의 성정이면 황제 폐하를 실망시킬 수도 있다고 범한은 생각했다.
뒤쪽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범한을 복잡한 심경 속에서 끌어 내주는 한편, 그가 아직은 전쟁터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니 경도 국면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아직 무수히 많은 사람이 다년간 꾸며진 음모를 위해 뜨거운 피를 뿌리는 중인 것이었다.
그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잠시 대동산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벽을 밀쳐서 치웠다.
겹겹이 둘러싸인 민가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행동에 나서려는 찰나, 범한에게 갑자기 슬픔이 밀려들었다.
문득 장 공주, 태자, 2 황자, 황궁 앞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경국의 장병들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도 동정심이 생겼다.
경도에서의 교전이 오늘 이 지경으로 맹렬해졌으니, 경도 국력은 대체 얼마나 많은 손실을 입었을까? 설마 생사조차 알 수 없는 황제 폐하께서는 정말로 일이 이 정도로 커질 줄 모르셨던 걸까?
4대 종사가 대동산에 모였다. 그들의 실력은 팔을 한 번 내젓고,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경천동지할 정도인데, 황제 폐하께서 정말로 살아 계시기는 한 걸까?
그분은 왜 이리 큰 위험을 감수하고 또 이리 많은 신경을 써가며 이번 일을 벌이신 걸까? 설마 정말로 천하를 통일하시려고? 고작 만세의 주인이란 명성을 얻으려고?
* * *
섭중, 궁전, 범한 세 사람이 진 영감님을 해치우자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정주의 중간 장수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의 눈 속에서 결연함과 멍함을 동시에 보았다.
장수들은 경도로 들어올 때 섭중 대장군님과 궁전 장군으로부터 비밀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아래에 있는 병사들을 쉬이 동원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섭씨 가문의 정주군도 공격에 나서야 할 때였다. 반군 중앙 군영에서 이상 징후를 보아서였다. 다만 군사는 명령을 바로바로 잘 따르는 기계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보니 자기편을 향해 반격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그동안 어떤 전투에도 동원되지 않다 보니 군사들은 좀 멍하니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까는 황궁 공격을 준비하다가 지금 와서는 갑자기 창끝을 전우에게 돌려야 하다니. 정주군의 군 기율이 아무리 엄해도 전투력은 최대치로 떨어질 수 있었다.
다행히 정주군의 우수한 부장군과 내부 사정을 아는 중급 장수들은 ‘누구를 위해 전투를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일부 대단히 천재적으로 해결해 낸 터였다.
그들은 2 황자의 측근을 밖으로 밀어내고 차단했다. 그런 후 자신들이 2 황자를 둘러싸며 고함을 쳤다.
“2 황자마마의 명령이다! 태자가 부친이신 황제 폐하를 살해했으니, 이는 개만도 못한 행위이다. 하여 경국의 아들들아, 모두 일어나 공격하자!”
상황이 이쯤 되자 2 황자는 그제야 이상한 걸 감지하고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줄곧 공손하고 예의 바르던 장수들이 왜 자신을 둘러쌌으며, 또 왜 그들이 갑자기 이런 황당한 군령을 내리는지 2 황자는 이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