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3화 흑기가 여는 서막 (2)
맘속으로 말을 마친 범한이 천천히 성벽 꼭대기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성문 아래에서 반군과 용감히 맞서 싸우는 병졸들을 훑어보았다.
그 후 수성용 쇠뇌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각처 연락 담당자인 감찰원 측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창백한 얼굴로 황성 정면을 보고 서 있는 서무와 호 대학사를 바라보았다.
서무의 새하얀 수염이 바람에 나부껴 흐트러졌다. 범한은 마음이 살짝 암담했다. 이번 생에서 과연 저들의 살아 있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해서였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3 황자 이승평에게 몇 마디 건넸다. 그런 후 손바닥을 한 번 치고는 몸을 완전히 돌려 황성 위에 가져다 놓은 세 개의 관 위에 올라섰다.
가을도 이미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날아와 끼어든 먹구름 때문에 황성 위에 놓인 관이 완전히 검게 물들어 버렸다.
온몸에 검은 옷을 두른 범한이 차분하게 관 위에 서서 살짝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자신을 고뇌하게 하는 모든 걸 바라보았다.
황성 위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광경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피를 온 몸에 뒤집어쓰며 전투하고 있는 병사들은 한가롭게 그 광경이나 보고 있을 새는 없었다.
한편 반군 중앙 군영에 있는 사람들도 황성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검은색 옷을 입은 자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 * *
전투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범한의 잔재주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섭중이 태자를 만난 후 반군 중앙 군영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온 반군 진영에서 천천히 그리고 단계를 밟아 대오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정주군이 진씨 가문과 교대함으로써 모반자의 책임을 일부 떠맡은 것이었다. 이는 범한이 원했던 광경이라 그는 이 모든 걸 주시했다.
그러다 경국 군대가 훈련이 잘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씨와 섭씨 두 집안이 적게 동참하면 결국에는 대오를 교체할 때 전선에 틈이 생긴다는 걸 범한은 알게 되었다.
이때 정주군은 제 위치까지 이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진씨 가문은 여전히 중추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좌상방의 몇몇 거미줄 같이 이어진 거리에서 저들이 틈을 드러내고 말았다.
범한은 군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 발견한 틈은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 정도는 알았다. 이에 그가 속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이미 20년간 함께 해주었던 행운이 이번에 제대로 크게 발휘해주기를 바랐다.
그러자 하늘의 뜻이란 게 정말 있기라도 한 듯, 그리고 하늘이 범한의 마음속 기도에 귀 기울여 주기라도 한 듯, 반군이 대오를 바꾸느라 살짝 혼란이 일었을 때 결함이 있는 긴 거리 위에서 드디어 살의를 품은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전해져 왔다.
범한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곳을 주시했다. 그리고 두 눈이 오싹해지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원군이 아니라 진항이었다!
* * *
정양문에서 잔혹한 급습을 펼쳤지만, 진항은 과연 장수 가문의 장군이자 전쟁 경험이 있는 장수였다.
결국 강력한 5천 명의 기마병으로 감찰원과 금군 기마병의 연합 급습을 정면 돌파한 것이다. 그리고 한 시진이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결국에는 황궁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진항 수하의 기마병들이 순식간에 거리 입구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들 몸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있었다. 그리고 5천이던 기마병이 근 3천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양문 아래에서 얼마나 처참하게 급습을 당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범한은 심장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 왔다. 그의 가장 충성스러운 감찰원 부하들이 정양문 아래에서 중대한 손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1 황자가 파견한 금군 대대는 분명 전멸했을 터다.
씁쓸한 피비린내가 입술과 혀 사이에서 맴돌았다. 두어 번 기침을 한 후 범한이 붉게 충혈된 두 눈을 부릅떴다.
마황환이 자신의 경지를 강제로 높여 놓은 것은 물론, 심맥 깊은 곳까지 손상시켰다.
하지만 범한은 결함이 나타난 곳만, 그리고 진항이 이끈 기마병이 먼지를 일으키고 혈흔을 남기며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만 주시했다.
“시작하게.”
범한이 피가 흘러나오는 입을 틀어막으며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말했다. 비록 명확하게 들리지도 않고, 소리까지 작았지만 줄곧 범한 곁을 지킨 계년조 소속 측근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오른팔을 들어 무언가를 힘껏 당기자 손에 들려 있던 령전이 하늘로 발사되었다. 그러자 어두침침한 하늘에서 아름다운 연화(烟花: 불꽃)가 피어올랐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경도에 총 두 번의 연화가 피어난 것이었다.
* * *
연화령이 쏘아 올려지자 황궁 앞쪽 광장과 뒤쪽 민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져, 많은 이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그 좌측 전방의 세 갈래 골목길 중 정중앙 길에서 갑자기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진항의 기마병은 이미 도착했는데, 저 말발굽 소리는 누가 내는 소리지?
급박하면서도 진씨 가문의 피칠갑을 한 기마병보다 더 빠르고, 살기로 가득 찬 저 기마병은 대체 뭐지?
바람은 서로 만나게 되어 있듯이, 두 갈래 길을 따라 동시에 황궁 광장으로 돌진해 오던 기마병들이 드디어 골목 교차점에서 만나 갑작스럽고 격렬하게 서로 충돌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 기마병은 수는 별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일반 경국 군과는 다른 기세를 띠고 있었다.
살기뿐만 아니라 냉랭함이 극에 달해 저승의 느낌까지 섞여 있었다. 그들은 그 어떤 빛도 반사시키지 않을 것 같은 진한 검은색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다.
감찰원의 흑기는, 들리는 소문으로는, 경국에서 급습 능력이 최강인 기마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전투하는 방식과 강력한 실력을 본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이에 경국군 측 내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흑기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진평평이란 늙은 검둥개가 어찌 철혈의 기마병을 훈련시킬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던 중 오늘, 신비한 흑기 부대가 드디어 경국 정예 기마병과 충돌했다. 더군다나 피로 써 내려간 사실처럼 모두에게 말하고 있었다. 기마병의 소질만 놓고 따진다면, 흑기가…… 제일 강력하고 사나운 존재라고 말이다.
* * *
흑기의 갑작스런 출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처음에 눈을 반짝이며 잠시 흥분했던 진 영감님은 첫 순간 문제를 발견했다. 이에 그의 눈에서는 다시 싸늘한 빛이 스쳤다.
범한이 이 기마병 부대를 어떻게 반군 뒤에 위치한 민가에 숨겨뒀는지를 아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온통 검은색인 이 암흑의 기마병이 어떻게 기척도 없이 나타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진항은 기마병을 이끌고 빠르게 거리 입구로 내달렸다. 그러다 자기 옆쪽으로 난 길에서 비스듬하게 공격해 들어오는…… 검은색의 무시무시한 기마병 그림자를 발견했다.
이번에 나타난 흑기는 인원수가 너무 적었다. 고작 2백 명이었으니까.
1 황자가 아직 성벽 꼭대기에 있었다면, 저들이 어젯밤 범한이 파견한 병사들이란 걸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바로 흑기 부통령 형과를 위시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대오 말이다.
하지만 고작 2백이었지만, 흑기는 오히려 2천에 달하는 것 같았다. 아니, 마치 한 사람이 전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
우두머리인 장수는 은색의 가면을 쓰고 긴 창을 쥐고 있었다. 그는 마치 칼날에서 가장 날카로운 점이 된 것처럼 맨 앞에서 기이한 속도로 빠르게 돌진했다.
그의 뒤에 있는 나머지 흑기는 비수 뒷면의 날카로운 칼날처럼 대형을 유지한 채 매우 특이한 기마술을 펼치며 은색 가면을 쓴 형과를 바짝 쫓았다. 그러다 이들은 2천이 넘는 진항의 기마병 바로 앞쪽에서 사납게 파고들었다.
* * *
2백으로 2천을 상대하다니. 흑기라서 내릴 수 있는 결심이고, 가질 수 있는 용기였다.
수십 년 전 이들의 선배 흑기도 진평평의 인솔로 북쪽으로 가 3천 리에 이르는 지역을 급습한 적 있었다. 이들은 위나라 국토 깊숙이 들어가 근위병 수장인 소은을 산 채로 잡은 후 전원 흑기에서 물러났다.
3천 리 급습이라니. 흑기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때 인원수는 고작 3백 명이었다.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만 흑기가 천하에서 제일 강력한 기마병이란 걸, 그리고 왜 경국 황제가 진평평에게 흑기 인원수를 영원히 천 명 이내로 제한하도록 했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범한이 검은색 관 위에 서서 자신의 검은 기마병이 어둠의 습격에 나서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범한은 입술이 말라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반격은 이제부터란 걸, 흑기의 급습으로 자신이 하려는 도박의 서막이 올랐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 갈래 길에서 목숨을 건 충돌을 감행한 기마병 대오 둘이 바람처럼 각자의 골목에서 밀고 나왔다. 그런 후 황궁 앞 광장 서북쪽 모퉁이 공터에서 사납게 부딪혔다.
양쪽이 맞붙었을 때 전신에 검은색 갑옷에 고속으로 달리는 기마병은 한 손으로는 고삐를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이나 창이 아닌 쇠뇌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쇠뇌를 수평으로 받쳐 들고 상대가 반격하기도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경국 기마병은 마상 사격술에 정통했다. 그리고 충돌전에서는 습관적으로 창과 칼로 싸웠지 처음부터 쇠뇌를 들고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다.
쇠뇌는 무게가 좀 나갔다. 더군다나 이처럼 짧은 구간에서는 공격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하면 쇠뇌의 화살이 발사되기도 전에 양측은 충돌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흑기는 달랐다. 그들은 감찰원에 들어온 첫날부터 한 손으로 쇠뇌를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들고 있을 수 있도록 하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근 천 명에 달하는 감찰원 흑기는 실제로는 강력한 암살 집단이자 돌격용 무기가 되어있었다.
* * *
‘촥’ 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짧은 거리 내에서 독이 발린 수백 발의 날카로운 쇠뇌의 화살이 몽땅 발사되었다. 그리고 정양문에서 빠져나온 기마병들에게 반항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신음 소리가 무수히 많이 들려왔다.
정양문 아래에서 빠져나온 기마병 대대 중 앞쪽 대열의 기마병들이, 얼마나 많이 화살을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참하게 말에서 떨어졌다. 아직 말에 타고 있던 이들은 칼을 꺼내 들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흑기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흑기가 쇠뇌를 버리고 말안장 아래에서 칼을 꺼내더니 손을 뒤로 돌려 휘둘렀다. 그 순간 칼 빛이 번쩍이며 기마병의 머리가 잘라 갔다.
2백 명의 흑기가 동시에 같은 동작을 했다. 쇠뇌를 미련 없이 버리고 칼을 뽑아들고는 강산을 베어버릴 듯 휘둘렀다. 머리를 잘라버리는 것만 해도 이리 무시무시한데, 2백에 이르는 사람이 한꺼번에 고난이도의 공격 수행하니,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는 미적 감각이 극도로 발휘된 것만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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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은 반군의 기마병 대대였다. 이들은 정양문에서 천 여 명의 감찰원 부하들과 금군 대대로부터 급습을 받았다. 그리고 한동안 짓밟히다가 성공적으로 길을 트고 힘겹게 황성 앞까지 온 터였다. 다른 한쪽은 감찰원의 신비한 흑기였다. 오랫동안 숨어서 스스로 인내하고 날카롭게 다듬고 힘을 비축하며 제사 대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 가장 강력한 일격을 퍼부으려 하고 있었다.
양측은 기세, 정신, 체력 면에서는 원래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한데 전투 중 순식간에 감당할 수 없는 격차가 나고 말았다.
흑기 2백 명이 뜨겁게 달궈진 칼처럼 진씨 가문 기마병 대대 사이를 날카롭게 뚫고 들어갔다. 황궁 광장으로 들어가려던 진형(陣形)을 중간에 가볍게 잘라버리고 커다란 구멍을 낸 것이었다.
선혈이 사방으로 무수히 튀고 시체가 말에서 떨어졌고, 흑기는 진씨 가문의 기병대를 찢어 놓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진항 및 3백여 명의 기마병, 그리고 대대를 서로 분리시켜 각기 고립시켜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