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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38화 (738/1,108)

738화 성벽 꼭대기에 신주(神主)를 세우다 (2)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의 범한에게 인간성 따위는 없었다.

단순히 태자의 성정을 정확히 계산해 행동했을 뿐이었다.

이에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1 황자 옆에 서서 말했다.

“저는 그냥 고슴도치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승평이는 왜 이리 데려온 것인가? 아직 어린애인데.”

1 황자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는 대신과 황태후, 황후, 숙 귀비, 그리고 3 황자를 잠시 바라보며 범한의 행동에 반대하는 말을 했다.

“훗날 경국의 제왕이 될 몸이니 반드시 이 모든 걸 똑똑히 봐둬야 합니다.”

범한이 3 황자의 떨리는 두 손을 잡아주었다. 3 황자는 이리 많은 반군을 직접 보게 되자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범한이 옆에 있는 측근에게 미소 지으며 분부를 내렸다.

“숙 귀비마마는 각루 좌측에, 황후마마는 각루 우측으로 모시거라. 그리고…….”

그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태후마마, 제 옆에 서시지요.”

“신주(神主) 세 분을 여기에 모셨으니…… 저들의 화살이 정확히 꽂히는지 봐야겠습니다.”

황성 위에 있는 사람들은 범한의 말에 심장에 한기가 드는 기분이었다.

* * *

한바탕 소란이 인 후, 범한이 반군 진영에서 현재 격렬한 논쟁 중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자든 진 영감님이든 결국에는 타협해서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 분명 둘 다 찝찝한 결정이 되겠지요!”

1 황자가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까지 계산한 것인가?”

범한이 고개를 틀어 냉담하고 준엄한 2 황자와 그 옆에 작은 기둥처럼 서 있는 섭중을 잠시 바라보았다.

“제가 생각해 놓은 건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만약 오늘 지휘자가 둘째라면, 이미 화살비가 쏟아지고 남았을 수 있습니다. 황후께서 숙 귀비만큼 정겨운 분은 아니시나 그래도 명은 훨씬 기신 게지요. 왜냐하면 아드님이 숙 귀비의 아들보다 강하니까요……. 화살은 쏘지 않는다 해도 반군이 공격은 해 올 테니…….”

범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 갔다.

“가서 준비하시지요. 제게는 아직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1 황자가 범한을 쓱 보고는 부하에게 3 황자를 겹겹이 둘러싸고 보호하라 분부를 내렸다. 그 후 그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황태후를 잠시 바라보았다. 수많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래도 더는 아무 말 않고 그냥 자리를 떠났다.

범한이 3 황자의 손을 놓고는 황태후의 늙고 살짝 뻣뻣해진 손을 잡고 좌측으로 몇 걸음 움직였다. 그런 그의 모습은 조부모를 부축해 걷는 손자의 모습 같았다.

범한은 밝은 황색의 봉황 복장을 한 황태후를 성벽 꼭대기에 세웠다. 그러자 그녀는 밝은 등불처럼 아침 하늘 높은 곳에서 모든 반군의 눈에 띄는 곳에 놓이게 되었다.

반군의 궁수는 무의식적으로 시위를 느슨히 하고 있었다. 상사의 명령이 떨어질 기미가 없자 팔이 시큰거리고 힘이 빠지기 시작해서였다.

더군다나 제일 중요한 건 봉황 복장을 입고 있는 나이 많은 부인께서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황제 폐하의 어머니이자 태자마마의 할머니 아니던가! 경국 내 이씨 황실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어르신이고 말이다.

이런 존귀한 분께는 말을 나눈 것조차 모멸을 안겨주는 행동인데, 전장 앞에 데려다 놓다니. 혹시라도 황태후의 털끝을 하나라도 건드리는 날에는 누가 그 죄를 감당하란 건지.

경국 백성이라면 황태후에게 손해를 끼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이 황태후를 데리고 황성으로 올라갔을 때 1 황자는 껄끄러운 기분이었다.

서무와 호 대학사는 말렸지만 범한이 말을 듣지를 않아 한숨만 내쉬어야 했다.

하지만 어젯밤 황궁에서 일어난 변란의 세부 사항을 아는 사람이라면, 범한이 지금껏 가장 음험하고 악독한 수단으로 가장 존귀한 분을 대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황태후 목에 검 때문에 생긴 상처가 바로 그 증거였다.

범한이 황태후를 대신해 봉황 옷에서 높이 솟아 있는 옷깃 부분을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한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매만져주며 온화하게 말했다.

“과연…… 황태후마마께서는 황실 정복을 입으셔야 위엄이 나오는군요. 늙은 상궁들에게 꾸며드리라 하고 시간을 들인 보람이 있습니다.”

황태후가 느닷없이 고개를 홱 돌렸다. 늙고 지친 눈빛에서 갑자기 범한을 씹어 먹어 버리겠다는 듯한 엄청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범한은 그런 황태후의 눈빛을 못 본 척하고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여 주었다.

“저도 압니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크시겠지요. 제 약을 드셔서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하나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씨 가문은 아무래도 대가를 치러야 할 운명인가 봅니다……. 이건 제 어머니를 대신해서 벌을 드리는 거고요.”

새콤달콤한 맛. 이는 범한이 황태후에게 억지로 먹인 환약의 맛이다. 범한은 이 환약을 줄곧 지니고 있었다.

최근 2년 동안 생과 사의 갈림길을 경험하고, 바다에도 산에도 들어가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범한은 이 환약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는 십여 년 전 담주에서 범한의 스승인 비개가 그의 작은 손에 진지하게 얼굴로 쥐여준 약주머니 안에 있었다.

범한이 패도의 정기를 연마하다가 일시에 폭발해 죽을 수도 있기에 이를 염려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범한은 이 약을 먹지 않았다. 정기가 드디어 폭발한 건 경도부에서 2 황자의 측근인 사필안을 제거하고, 곧이어 그림자와 정면 대결을 펼친 후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맥이 갈가리 찢어지고 그는 폐인이 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범한은 이 약을 먹지 않았다.

이 약이 공력을 흩어버리는 약이란 걸 알게 되어서였다.

범한은 그동안 수련해 온 걸 흩어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경맥이 갈가리 찢어지는 고통에도, 움직일 수 없이 경직되어 가도 비개 스승이 준 환약을 먹지 않고 버텼다.

다행히 나중에 해당타타가 천일도의 무상 심법을 훔쳐 강남으로 가져왔고, 이로써 범한이 입은 중상은 천천히 치유될 수 있었다.

한데 그런 약을 범한은 오늘 황태후의 입에 넣어버렸다. 이 환약은 약성이 대단히 강했다.

걷는 행동 자체만으로도 몸 안의 기운이 흩어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직접적으로 오장육부로 파고들어 서서히 인체의 생기를 꺼뜨리는 작용을 했다.

범한도 천일도의 심법이 없었다면, 몸 안에서 정기가 폭발할 것이니, 그때가 되면 미쳐 날뛰는 패도의 기운과 지나치게 왕성해진 생기 흩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이 환약을 반드시 복용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환약을 황태후가 복용한 것이다.

황태후는 이미 늙고 쇠약해져 살날도 몇 년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한데 약 때문에 체내에 남은 생기가 점차 체외로 빠져나가게 되었으니, 이는 곧 사망 시간을 앞당긴 것이었다.

이에 황태후는 생명이 점점 줄어들어 늙은 몸으로 버텨내기 힘들 정도로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가 되어 있었다.

범한이 이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한 건, 당연히 공공연하게 황태후에게 독을 먹일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비개 선생이 남겨준 이 환약은 독약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세상의 그 어떤 명의가 와서 진료한다 해도 수상한 건 발견할 수도 없는 약이었다.

황태후에게는 이미 말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또 손을 들려 해도 들 수 없어 그녀는 몸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대종사 중 하나가 순수함이 극에 달해 있는 정기를 이용해 강제로 치료를 해주기 전까지 그녀는 이렇게 말도 못 하고, 손도 들지 못하는 처참한 폐인의 상태에서 서서히 죽음만 기다려야 했다.

범한이 모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복수를 하고픈 욕망이 들불처럼 번져 이성을 압도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또한 남모를 커다란 걱정을 지닌 상황에서 범한은 현재와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이와 같은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현재 반군이 황궁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황태후가 신주처럼 서 있으면 반군의 공세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후의 안전이란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걸까?

* * *

황태후는 자신이 먹은 환약에 어떤 음험함과 악독함이 숨어 있는지 전혀 몰랐다.

단순히 벙어리를 만드는 약일 거라 여겨 계속해서 범한을 독하게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황태후의 암담하고 분노로 찬 눈빛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싸늘한 눈빛으로 황성 아래에 있는 두 세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2 황자 옆에 있는 섭중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작달막하면서도 건장한 장수의 눈동자에서는 이채가 번뜩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주군이 바쳐야 하는 포로는 아직 경도로 들어오지 않았고, 정주군의 수는 수천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섭중과 2 황자가 경도로 데리고 들어 온 이들이 1만은 족히 넘는 걸로 보아, 이들도 일찌감치 준비한 것이었다. 다만 반군 대열에서 이홍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범한은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었다.

저 먼 곳을 보니, 반군의 고위 장수들이 말다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자는 계속 침묵하며 우울한 눈빛으로 황성 위의 동정이나 살폈다. 어머니와 조모님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속으로는 범한과 1 황자, 서무와 호 대학사 및 연로한 대신들을 인정사정없이 저주하는 중이었다.

범한이 눈을 갑자기 가늘게 떴다. 반군 고위 장수들이 상의를 끝내서였다. 그러자 말발굽 소리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진씨와 섭씨 두 가문이 각각 병사를 일부 나누어 양 날개 방향에서 압박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범한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있는 1 황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1 황자가 범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되었으니 염려 말라는 의미였다.

이제 보니, 반군의 주공격 방향은 황성 정문 말고도 태평방 쪽도 포함되어 있던 거였다. 그곳은 담벼락이 약간 낮고, 태감과 궁녀들이 함께 기거하고 있으며, 출입구 경비도 삼엄하지 않았다.

1 황자는 일찌감치 그 점을 예측하고 많은 병력을 그곳으로 보내 지키도록 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이 정서군에서 길러낸 충성스러운 고위 장수도 열에 일고여덟을 그곳으로 보냈다.

그저 잔머리를 굴리고 시간 끌기만 하고 있는 거였다. 대세를 바꿀 수 있는 도망가 버린 그 하나는 도무지 잡히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범한은 머리가 갑자기 다시 멍해졌다. 그의 두 눈은 황성 아래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반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그 모습은 마치 그들의 존재를 꿰뚫어 보고, 더 먼 곳, 과거와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이 한마음으로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 그리하여 나타난 변수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3만 대 수천이라.

제아무리 황궁 성벽이 높다 해도, 반군이 감히 활을 쏘지 못하게 되었을지라도, 인원수가 충분하니 황궁을 보호해 주는 해자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터다. 사다리를 가져와 높은 곳까지 올라와 황궁의 모든 걸 궤멸 시킬 수 있을 테니…….

반군이 후방에서 바삐 움직이고, 공성(攻城)용 구름사다리가 점점 높이 올라오자 범한은 가슴이 오싹해져 동공이 수축되었다.

황실 금고 3대 작업장 중 병방에서 만든 3단 사다리의 운반을 마쳤으니, 드디어 공성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 병기는 모두 황실 금고 작업장에서 생산되었다. 그래서 황실 금고를 관할하는 범한 입장에서는 절로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생산한 물건이 도리어 자신을 공격하는 데 쓰이다니. 그런데도 정작 자신은 대응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니.

범한은 심박 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머리가 얼얼해지고 미간이 더 강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다 갑자기 호흡에 문제가 왔는지 숨을 몇 차례 가쁘게 몰아쉬었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해져서 쇠뇌가 놓인 곳 쪽의 푸른 벽돌 벽에 기대어 천천히 몸을 웅크리며 앉기 시작했다.

황성 위에 있던 이들은 순간 깜짝 놀라 범한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큰 전투가 임박했는데 지휘관 중 하나인 범한에게 갑자기 문제가 생기면 금군의 사기에도 큰 타격이 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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