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737화 (737/1,108)

737화 성벽 꼭대기에 신주(神主)를 세우다 (1)

범한은 1 황자를 잠시 바라만 봤을 뿐이지만 그의 낯빛이 갈수록 음울해지고 있었다.

그는 1 황자가 대세의 압박에 밀려 태자와 2 황자의 가족애에 호소한 공격에 넘어갈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범한은 분석을 할 때 줄곧 사람의 성품을 기반으로 하는데, 그가 본 1 황자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범한이 아직도 소리치고 있는 2 황자를 바라보며 아주 살짝 미간을 구겼다. 2 황자 옆에 있 섭중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섭중은 30년 전에 이미 경도수비사 통령으로 임명된 사람으로 지금은 쉰이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외모만 보면 조금도 나이든 티가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자체는 경국의 일반 명장들처럼 맹렬한 기세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키가 조금 작고 뚱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한은 절대 섭중을 저평가하지는 않았다. 그가 일찌감치 9등급 고수로 이름을 날려서였다. 그는 섭류운과 가장 친한 조카였고, 본인의 무시무시한 어머니와도 싸운 적 있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20대 때 이미 경도수비사 통령이 되었으니,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호락호락하지 않다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범한의 미간 주름은 갈수록 깊어졌다. 한데 눈빛은 갈수록 반짝였다. 그것도 아침 햇살이 나왔는데도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반짝였다.

* * *

1 황자가 성 아래에서 반군을 향해 느닷없이 고성으로 꾸짖었다.

“그만하거라!”

2 황자가 유감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을 멈추었다.

1 황자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때가 어느 때라고 이러느냐! 범한을 모함할 생각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구나! 황위를 위해 너희가 추악한 일도 불사했다는 걸 내 다 알고 있느니라. 하나 어떤 일들은 내가 할 수 없다는 걸 잊지 말거라! 공격하려거든 하거라. 입으로 말만 재잘거리지 말고 말이다!”

황궁 담벼락 아래에 있는 태자와 2 황자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단호하고 기세등등한 말이었다.

줄곧 온화했던 2 황자의 얼굴이 드디어 음침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화가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노한 그가 황성 위쪽을 향해 소리쳤다.

“큰 황형! 진짜 형제는 우리란 걸 잊지 마십시오!”

“형제라고?”

1 황자는 수일간 황궁 수비와 범한이 계획한 대사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터였다.

하여 심신이 극도로 소모되어 눈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 것만 같았다.

그가 태자를 보았다가 다시 2 황자를 바라보고는 갑자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형제라니! 너희들은 아들 노릇도 하지 않는데, 어찌 나와 형제임을 자처하느냐!”

침묵이 흘렀다. 방금 전 1 황자의 말이 너무 많은 일들의 정곡을 찔러서였다.

황성 위의 금군들은 일찌감치 유조를 통해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들의 눈에 잠시 슬픔과 분노, 아픔의 정서가 흘러나왔다.

반면 황성 아래에 있는 반군의 얼굴은 오히려 괴이하게 변했다.

비록 황제 폐하가 대동산에서 자객의 공격을 받아 붕어하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제 폐하의 위엄은 아직 남아 있었다.

경국 군 소속으로 태자의 깃발을 받들었지만, 실제로는 군주 시해에 합류한 거라니. 놀라고 두려워 가슴 두근거리지 않을 자가 어디 있을까.

1 황자는 황성 꼭대기에서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서 있었다. 그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태자를 바라보며 비통하게 말했다.

“대동산 일은 장 공주께서 하신 일이다. 네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건 내 다 안다. 하나 그 같은 계획을 분명 알고는 있었겠지! 부황께서 너를 폐위시키려 하셨으나 너는 아들이다. 어찌 아들이 되어 그런 금수만도 못한 짓을 벌였단 말이냐?”

태자의 낯빛이 조금 암담해졌지만, 그는 일단 잠자코 있었으면서 1 황자가 성을 내게 내버려 두었다.

그 옆에 있던 진 영감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손을 휘 내저어 뒤에 있는 반군에게 공격할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러자 후방에서 이를 악물고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 * *

황성 위아래에서 황자 셋이 황실의 지밀한 비밀을 놓고 격렬하게 말했다. 이들은 분노에 휩싸여 서로 입씨름을 하느라 범한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범한은 어느새 성벽 꼭대기에서 떠난 후였다. 그리고 긴 돌계단을 따라 황궁 내부로 내려온 후 텅 비고 넓은 광장을 지나 태극전으로 걸어갔다.

가는 내내 범한은 진지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1 황자가 들판에서 벌어지는 야전(野戰)에만 능한 줄 알았는데, 해자를 이용한 성곽 전투도 매우 심도 있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 처는 이미 준비를 마쳤고, 심지어 돌계단 입구에서는 이미 황성의 각루 두 개를 해체해 석재와 단단한 나무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이제 보니, 잠시 후 있을 공성전에 대비해 준비를 마쳐놓은 것이었다.

한편 황성 아래에 있는 궁 문 세 곳 옆에는 이미 기이한 형태의 석재를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한데 석재 위에 이끼가 끼어 있다니.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살피다가 무언가가 생각했다.

‘설마 황궁에 있는 가짜 산을 큰 형님께서 헌 거야?’

막 이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는데 앞쪽에서 대열 하나가 다가왔다. 금군 몇 명의 감시하에 피곤해 쓰러질 것 같은 내관들 백여 명이 푸른 이끼가 낀 석재를 실은 마차를 밀고 있었다. 역시나 황궁 가짜 산에서 온 돌이었다.

황궁 정성(正城)에는 세 곳에 궁궐 문이 있고 평소에는 하나만 개방을 했다. 하지만 반군이 진격을 해오면 당연히 딱 한 군데로만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범한은 1 황자가 가짜 산의 돌을 이용해 궁궐 문 세 곳을 단단히 막아놓으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어쩌면 새벽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작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반군은 황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면서 자신은 황궁 안에 가두려 하니 그야말로 목숨 걸고 지키려 하고 있었다.

범한이 탄식을 했다. 큰형님은 이미 필사의 결심을 마친 후였다.

오는 내내 봤지만 금군은 수적으로 부족했다. 넓디넓은 황궁과 비교하면 좀 성근 것 같아 저력 같은 건 정말로 없어 보였다.

범한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금군 천여 명이 내관과 궁녀가 일상 거주하고 있는 궁방처(宫坊處)로 가 있었다. 이는 첫째는 황궁 내 불안 요소가 되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전체 황성 중 그곳이 제일 뚫기 쉬워서였다.

태극적으로 들어서니 걱정에 휩싸여 있는 대신들, 잔뜩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영 재인과 의 귀빈, 좌불안석인 3 황자가 눈에 들어와 범한은 세 번째로 탄식을 했다.

범한은 서무와 호 대학사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뒤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짓고 3 황자에게 말했다.

“승평아, 곧 전투가 시작될 건데 막 흥분되지 않니?”

3 황자 이승평은 그래도 아직은 애였다. 자신이 황궁에 갇혔다는 걸 안 후로는 겁을 먹고 있었다. 억지로 그런 감정을 억누르며 얼굴로는 아닌 척하고 있는데 범한이 그런 말을 하자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입을 내밀고 삐죽거렸다.

지금 너무 무서운데 범한이 농담을 해주자 너무 웃음이 난 것이다.

범한이 몸을 돌려 창백하게 질려 있는 황태후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이어 긴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는 황후를 바라보고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황태후마마, 황후마마 성벽에 올라 전투를 참관해 주시지요.”

* * *

자고로 반역을 하려면 대의명분을 내걸어야 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 일은 이미 1 황자가 화를 내며 태자와 2 황자를 꾸짖음으로써 우울하게 막을 내린 상태였다.

황성 아래쪽에 있는 반군은 이미 가까이 다가온 상태였다.

특히 후군(後軍) 중에 있는 수천의 궁수는 벌써 일제히 활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성벽 꼭대기에는 금군이 천여 명밖에 없었다. 그러니 반군의 화살이 일제히 발사되면 적지 않은 손실을 입을 수 있었다.

1 황자가 장검을 들고 아무 말 없이 성벽 꼭대기를 걸었다. 그러다 불시에 몇 차례 호령을 내려 장수와 병사들에게 반군 공세에 맞설 준비를 하도록 했다.

이제 곧 경국 황궁은 맨 처음으로 빗발치는 화살의 세례를 맞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화살 비가 내린 후에는 또 어떤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어와 씻어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사전에 황궁을 지켜야 한다는 계산도 안 했고, 또 성문사를 손에 넣지도 못해 금군의 방어력은 전략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수중에는 화살도 충분치 않고, 황성 네 귀퉁이에 있는 4기의 수성용 쇠뇌만 있을 뿐이었다.

반면 반군은 그 수만도 수만에 달했다. 그러니 저들에게 수성용 쇠뇌로 공격을 해봤자 대포로 모기 잡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대체 얼마나 죽일 수 있을까?

“준비!”

1 황자가 보검을 꽉 움켜쥐고 황성 아래에 새카맣게 깔린 반군을 주시했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그의 마음마저도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수천 대의 활이 시위가 당겨지자 찌찍, 하며 두려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성에 있는 모든 이의 고막을 뚫고 들어가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려는 소리 같았다.

황성에 있는 금군은 이미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난 후였다. 방패를 든 병사들은 1 황자 뒤에 대기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모두가 하늘 가득 화살이 빗발칠 순간을 대비했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이 모든 걸 일어나게 할, 그리고 황성 공격 광경을 감상할 취향 따위는 없었다. 또한 금군이 참혹한 손실을 입은 후에야 자신이 묘수나 악수를 내놓을만한 허세는 더더욱 없었다.

돌계단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범한이었다.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늙은 대신들이 숨을 헐떡이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태감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절반은 호송되어 오고 있는 몇몇 아낙네들도 있었다.

이들 아낙네들은 천하 여인들 중 가장 존귀한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천하에서 가장 비천하고 굴욕적인 역할이 되어 있었다.

범한이 3 황자의 손을 이끌고 1 황자 뒤로 걸어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화살을 쏘려는 반군 대군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속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리 많은 화살이 날아오면, 염병할, 황궁을 어떻게 지켜!’

그가 소리 내어 정기를 끌어올린 후 황성 아래쪽에 있는 반군을 향해 고함쳤다.

“승건, 둘째! 얼른 멈추시오!”

태자와 2 황자는 범한의 고함에 어안이 벙벙해 고개를 들어 황성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모후!”

“어머니!”

“할마마마!”

황성 위쪽에 불쑥 등장한 아낙네들을 보며 태자와 2 황자가 참다못해 소리쳤다. 진 영감님과 섭중 두 사람도 참다못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들에게 아낙네들 옆에 있는 범한이 소리쳤다.

“막무가내로 공격하지 마시오. 내 그대들의 어머니, 할머니, 동생을 데리고 그대들을 보러 왔소이다.”

범한의 말에 많은 사람들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시선(詩仙)으로 이름을 떨치고, 감찰원 제사로 어둠의 힘을 발휘하는 범한이 이런 비열한 말을 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범한 혼자만 아는 게 있었다. 초원에서 생사의 싸움을 펼친 후 그는 인생에서 드디어 지극히 만족스러운 변화를 맞이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로써 두 번의 삶을 살면서 간직하고 있던 음산한 기운을 벗어버렸다.

또 점점 원점으로 접근해 어릴 때 담주에서 지붕 위에 올라가 비가 오니 빨래를 걷으라고 소리치던 소년 시절의 자신과 하나가 되어갔다.

이러한 범한은 사랑스럽고, 짓궂은 짓을 하며, 염치를 모르는, 무서운 범한이었다.

태자와 2 황자가 제아무리 마음을 굳건히 먹고 있다 하더라도 가슴 떨리게 무서운 광경에 결국에는 절로 분노가 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2 황자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범한! 정말 후안무치하구나!”

범한이 뒤돌아보며 받아쳤다.

“이제야 아셨소?”

태자도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해 있었다.

한데 그는 제일 먼저 옆에 있는 진 영감님에게 황급히 부탁부터 했다.

“화살을 쏘면 안 됩니다!”

진 영감님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저 귀인분들이 황궁에 계셨군. 범한이 저분들로 위협하는 건 당연한 거야. 설마 태자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하신 건가…….’

나이 지긋한 장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태자는 어진 사람으로 요 2년간 나약한 모습에서 점점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 결국에는 그런 면을 다시 드러내다니.

군인으로서, 특히나 이렇게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싸울 때는 조금도 망설여서는 안 되었다. 이른바 쥐를 때려잡고 싶어도 그릇 깰까 봐 무서워한다는 말처럼, 태자의 지금 행동은 군인 입장에서는 단순히 비겁한 행동일 뿐이었다.

그래서 진 영감님은 결국에는 태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비겁함의 다른 이름이 인성이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