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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34화 (734/1,108)

734화 영광 (2)

범한이 고개를 들어 정양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과 1 황자가 황궁 밖에는 저 하나의 길에만 군사력을 집중시켜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곳을 통해 황궁으로 향하는 자가 있다면 참혹한 대가를 치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 진씨 가문의 2세 장군이 쇠뇌의 화살과 독 연기 속에서 힘겹게 돌진 중이란 걸 범한이 알았다면, 그는 어쩌면 소리 내어 웃었을지도 모른다.

진씨 가문이 산골짜기에서 습격한 일을 범한은 아직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잠시 후 충성심이 강한 감찰원 부하들과 자살 부대나 마찬가지인 금군의 기마병이 얼마나 살아남을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1 황자의 말처럼 고작 성문 하나만으로는 대세를 바꾸는 건 역부족이었다.

* * *

황성 아래쪽에 자리 잡은 광장 가장자리 길 입구에 기마병 하나가 나타났다. 금군은 모두 황궁 안으로 들어간 후라 황궁문 밖 광장에는 없었다. 그래서 이 기마병의 출현은 생뚱맞은 감이 있었다. 드넓은 천지간에 갑자기 조화를 깨뜨리는 검은 점이 나타난 것과 같았다.

이 기마병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말발굽 소리를 내며 광장 가장자리에서 광장 중앙까지 내달린 후 다시 황성 앞까지 왔다.

이 기마병 뒤에서 곧바로 두 번째, 세 번째, 열 번째, 백 번째, 천 번째 …… 기마병이 나타났다. 진씨와 섭씨 가문의 대군이 시커멓게 몰려든 것이다.

여덟 개 길을 이용한 반군이 중간에 저항하는 이들을 깨끗이 쓸어버린 후 먹구름이 성을 압도하는 기세로 황궁 앞까지 오고야 만 것이었다.

빽빽하게 몰려든 반군은 조용히 그리고 무정하게 온 황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침착한 기세로 조용히 살기를 뿜어내며 다가오자 황성의 금군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범한과 1 황자는 드디어 대화를 멈추고 자신들의 긴장감을 감추고는 조용히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여러 사람 눈에 아침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 들어왔다. 이 깃발은 광장 길모퉁이에 있는 긴 거리에서 나타났으며, 위에는 크게 진(秦) 자가 쓰여 있었다.

이어 다른 쪽에서도 기마병이 질주해 들어왔다. 그들도 손에 커다란 기를 들고 있었고, 깃발 위에는 섭(葉)자가 쓰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건 밝은 황색의 거대한 깃발이었다. 깃발 위에 글자가 쓰여 있지 않았고, 대신 운무 속에서 꿈틀대는 용이 황금 발톱으로 상서로운 구름을 쥐고 나는 모습이 황금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용 깃발까지 광명정대하게 내걸고 왔군.”

한참 동안 침묵하던 범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진씨, 섭씨 두 가문의 군사력은 대단했다.

범한이 제아무리 9등급 고수이고 굳건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해도 빽빽하게 들어선 군대 앞에서는 절로 머리가 멍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가?”

1 황자가 무표정하게 범한을 바라보았다.

“뭐든 숫자가 많아지면 무서워 보일 수밖에 없지요. 개미도, 쥐도, 바퀴벌레도 그러한데, 사람이라고 안 그렇다는 법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범한이 부하 하나를 불러 몇 가지 일러 주었다.

거대한 세 개의 깃발이 천천히 움직였다.

광장 내 반군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받으며, 황성 금군의 살짝 겁에 질려 경계하는 눈빛을 받으며 황궁 앞으로, 그리고 첫 번째로 광장에 들어온 기마병 뒤로 와 바람을 맞으며 펄럭였다.

“자네가 계속 포위를 뚫으려 하지 않기에 무언가 비장의 패를 숨겨 둔 줄로만 생각했지.”

1 황자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황궁 앞에 있는 기마병들, 깃발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비장의 패 같은 건 없습니다.”

범한이 낯빛을 바꾸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 늙은이들이 사지에 몰리면 구해줄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그리고 반군이 이미 경도성 안으로 들어왔으니, 그들이 뛰쳐나와 초사이어인이 되어줄 줄 알았지요. 하나 안타깝게도…… 제 추측이 틀렸나 봅니다.”

“초사이어인이라니?”

1 황자가 의문을 표했지만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1 황자가 입가를 끌어 올렸다.

“나도 수상쩍다는 생각이 드네. 진 원장이 설마 정말로 독에 당한 걸까?”

황궁 앞에 몰려든 이들의 기세를 보고 있던 범한이 갑자기 심호흡을 하고는 황성의 푸른 벽돌을 한 대 쳤다.

“우리 둘이면 또 어떻습니까?!”

1 황자가 범한을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네와 함께 죽고 싶지는 않아.”

비바람이 오려 하니 온통 근심뿐인데, 황성 각루에서 근심에 빠진 두 사람은 오히려 농담이나 하고 있다니.

주변에 있던 금군 통령들과 사병들은 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 어르신과 대원수로부터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영문은 모르겠지만 황궁 앞으로 몰려온 반군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두려운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 * *

1 황자가 황궁 앞에 덩그러니 나와 있는 세 개의 깃발과 최전방의 기마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기세를 꺾으려 세워놓은 것들이네. 금군에게 겁먹으라고 저러는 건데…… 내 부하들이 저런 걸로 겁먹을 리는 없지.”

“우리가 가진 패는 몽땅 정양문에 쓸어 넣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황궁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기마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방의 사기를 꺾으려는 거지. 우리의 사기는 진작시키고 말이지.”

“그렇다면 저 기마병들이 저리 오만하게 황궁 앞에서 시위하는 걸 용인해줘야 할까요?”

“군의 전통에 따르면, 첫 번째로 도착한 기병이 최고의 영광을 얻는 거라네.”

범한이 검은 점 같은 기마병을 노려보고 있다가 한참 후 갑자기 입을 뗐다.

“그렇다면 저자가 얻은 영광을 떼어주지요, 뭐.”

1 황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서군 대원수로 그는 경국군 측 전통을 있는 그대로 존중했다.

비록 저들 기마병이 황궁 앞에서 조용히 위세와 위용을 떨치고 있는 게 혐오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화살을 쏘아 맞히기 힘든 대단히 좋은 위치에 서 있지 않은가.

범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군인이 아니니 영광 같은 거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이건 죽고 죽이는 일일 뿐이란 것만 알뿐이지요. 저들이 아직까지 제 앞에 서 있는 건…….”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인데 범한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황성 각루에서 줄곧 조용히 있었던 수성용 쇠뇌가 느닷없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발사되었다. 마치 일찌감치 이 황궁 안에서 죽은 원혼들을 깨우는 소리인 것만 같았다.

칵!

거대한 용수철이 작동하는 소리가 난 후 아이 팔 굵기만 한 쇠뇌의 화살이 전광석화처럼 쇠뇌를 떠나 정해 놓은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황궁 앞에 덩그러니 나와 서 있던 기마병들과 깃발들은 외로워 보였지만, 그래도 오만방자했다. 그리고 황성에 있는 금군 병사들을 싸늘하고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강력한 압박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데 이 모든 게 방금 전 소리를 낸 쇠뇌 때문에 몽땅 깨져버렸다.

첫 번째로 황성에 들어왔던 기마병은 고개를 들 틈도 없었다. 거대하고 굵은 쇠뇌의 화살이 그의 몸을 꿰뚫고 다시 전투마의 몸까지 뚫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거대한 피의 꽃이 피어나면서 사람과 말이 잔인하게 광장 바닥에 꽂혔다.

이때서야 범한은 하려던 말을 마쳤다.

“……저들이 바보이기 때문입니다.”

* * *

수성용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이 짧은 창이 되어 사람과 말의 몸을 뚫고 들어가 이 둘을 광장의 청석판 틈에 박아버렸다. 정련된 철로 만든 아이 팔뚝 굵기만 한 화살은 ‘웡’ 하는 소리를 내며, 그리고 병사와 말 시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튕기며 계속해서 떨었다.

한데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반군과 황성 내 금군을 포함한 수만에 이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본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저리 거대한 쇠뇌의 화살이 기마병의 몸을 향해 날아들다니. 철제 몽둥이가 천벌을 내리기 위해 구천 밖에서 날아와 저들을 뭉개버린 것만 같았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흐르고 싸늘한 공포가 광장을 감쌌다.

영광이 사라졌는데도 깃발을 들고 있는 세 교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앞쪽에 죽어 있는 기마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그리고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 내장과 체액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며 어찌 반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말은 사람과는 달랐다. 비록 그 많고 많은 말 중에 고른 전투마이기는 했지만, 무서운 일이 벌어지자 말들은 쇠뇌의 화살에 공포감을 느꼈다.

세 마리의 준마는 생물이 지닌 본능에 따라 일제히 ‘이히힝’ 하고 울어댔으며, 너무 놀란 탓에 뒤쪽을 향해 어지럽게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군기 두 개가 아침 바람을 맞아 펄럭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낭패라는 듯 반군 진영 속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편 남은 밝은 황색의 용 깃발은 광장 평지에 처참하게 떨어진 후 돌돌 말려버렸다. 참고 봐주기 힘든 광경이었다.

모두 깃발을 들고 있던 군사가 수성용 쇠뇌에 놀라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타고 있던 전투마가 너무 놀라 광분하는 바람에 그는 순간 깃발을 안정적으로 잡고 있을 수 없었고, 이에 용 깃발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황성 위아래에 있는 수만의 경국 군은 여전히 죽음과도 같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시선만 광장에 있는 피떡에서 깃발로 옮겼을 뿐이었다. 그것은 경국 황가의 존엄을, 그리고 무적 경국 군의 의지를 대표하는 깃발이었다.

그러므로 언제나 대군 앞에서 휘날려야지 바닥으로 떨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런 깃발이 이리도 처참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수만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 분노,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담고 있었다.

황성 위에서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 모든 걸 지켜보면서 옆에 있는 황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효과가 괜찮지요? 안 그렇습니까?”

1 황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는 ‘오늘 태자가 군사를 일으켜 놓고 용 깃발마저 바닥으로 떨어뜨리다니. 정말이지 너무 창피한 일이야!’라고 생각했다.

황성에 있는 금군들이 갑자기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이 함성은 분명 황성 아래에 있는 수만 반군의 얼굴을 향해 날린 매서운 채찍질이었다.

* * *

바로 이때, 깃발을 떨어뜨린 기마병은 빈손으로 반군의 중앙 군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말 위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필시 군 규율에 따라 엄히 처벌을 받으리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기수는 영광된 자리이다. 그런데 실수로 용 깃발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다니.

반군 기마병 백여 명이 중앙 군영에서 서서히 갈라지며 길을 냈다. 그리고 반짝이는 갑옷과 투구를 입은 태자 이승건이 몇몇 대장의 호위 아래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실수한 기마병을 잠시 바라보기만 할 뿐 별말을 하지 않았다.

태자의 눈빛은 대단히 온화했다. 하지만 그 기마병은 무한한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 죽게 되더라도 광장으로 가 바닥에 떨어진 용 깃발을 가져오려 했다.

바로 이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태자 옆에 있던 대장 하나가 말을 급히 달려 그 기마병 옆에 섰다.

“교전 중이니, 깃발을 잃은 자는 참할 것이다!”

‘참’한다는 말에 기마병은 온몸을 휘청했고,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는 몸을 똑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후 목으로 날아드는 싸늘한 기운을 느껴야만 했다.

장군은 휘두른 칼을 거두고는 옆에 떨어져 있는 기마병의 시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싸늘하게 콧방귀나 뀌었다.

그가 말의 배를 툭 치자 준마가 중앙 군영에서부터 전광석화처럼 달려 순식간에 광장 중앙까지 갔다.

장군은 바닥에 둘둘 말려 있는 용 깃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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