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화 제 꾀에 제가 넘어가다
평온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분노가 들어 있었다. 과거 그에게서 보았던 시원스러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장 공주에 관한 수많은 진귀한 정보를 쥐고 있었는데 감찰원과 조정에 제공할 수 없게 되니 경국과 황제 폐하께 충성하고 있는 원 선생의 입장에서는 그 상황이 너무나 석연치 않아 결국 분노하고 만 것이다.
범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일단 침묵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범한 역시 지금 당장 진평평에게 묻고 싶은 지경이었다.
새벽바람이 높이 솟은 황성 각루로 불어왔다. 바람은 지난밤의 피비린내를 차츰 몰아내 주었고, 이에 경도 민가 주변에 눌어붙어 있던 냄새는 이제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불쌍한 백성들은 두문불출하며 감히 집 밖 나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백성들은 문을 걸어 닫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저 높은 사람들의 죽고 죽이는 놀이가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우우우우······.
황성에서 호각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웅장하고 힘찬 소리였다. 대체 얼마나 멀리까지 퍼져나갔을까.
범한이 차분한 표정으로 원굉도 옆에 섰다.
“경도수비사는 정오나 되어야 경도로 들어올 것입니다. 진씨와 섭씨 두 가문은 사흘 후에야 올 거고요. 우리가 빨리 움직인다면 9개의 성문을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원굉도의 눈에 잠시 경악하는 느낌이 번뜩이더니, 그가 이내 분노의 불꽃을 일렁이며 대로했다.
“설마 수비사 안에 감찰원 사람이 없다는 겁니까!”
범한이 속으로 깜짝 놀라 몸을 홱 돌리고 원굉도를 바라보았다.
원굉도가 범한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줘 말하기 시작했다.
“진씨 가문의 군대는 밤새도록 달릴 것이니 경도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범한이 양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의 낯빛은 어느새 창백해지고 있었다.
성문사의 반역 소식을 듣고도 범한이 당황하지 않은 건 자신이 진씨 가문의 움직임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거라 여겨서였다.
대군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이고, 군사력 면에서 실력이 뛰어난 금군과 살상력 면에서 뛰어난 감찰원이 힘을 합치면 자신에게는 아직 9개 성문의 통제권을 되찾아 올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런데 진씨 가문의 대군이 곧 도착할 거라니!
언빙운의 아버지는 지금 진씨 가문 쪽에 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대군을 출동시켰다는 소식조차 보내지 않은 걸까?
* * *
범한이 1 황자 곁으로 갔다.
“병사들을 궁으로 불러들이시지요. 진씨 가문의 군대가 곧 도착할 거랍니다.”
1 황자가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금군 대대가 이제 막 황성을 떠났는데, 벌써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 제일 중요한 건 반응 속도였으니, 그에게는 범한과 상의하고 말고 할 시간은 없었다.
이에 1 황자가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옆에 있는 병사에게 들고 있는 작은 황색의 깃발을 흔들라고 명했다.
황색의 깃발이 흔들리자 황성 위에서 다시 호각 소리가 ‘우우우’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호각을 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자 조금 전 몇 마리 황룡처럼 황성을 나섰던 금군 대대가 갑자기 들린 회군 호각 소리에 약속이라도 한 듯 촘촘히 모여들어 황궁 방향으로 내달렸다.
한편 이미 저 멀리 민가와 거리로 들어간 대열에게서는 무언가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범한이 옆에 있는 부하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에서 령전을 꺼내 쏘았고, 황성 앞에서는 처량하고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하늘을 갈랐다.
이어 추밀원이 있는 곳, 감찰원 본부가 있는 곳, 각부 관아가 있는 곳, 중요한 거리가 있는 입구 쪽에서 모두 응답이라도 하는 듯 령전이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울렸다.
령전이 떨어질 때가 되자 경도의 근 2천에 달하는 감찰원 밀정이 소리를 듣고 움직이기 시작해 거리와 골목 곳곳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경도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특히나 감찰원과 추밀원을 지나 황궁으로 직접 통하는 천하대도 위는 너무 썰렁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단지 유난히 푸른 나뭇잎 몇 장만이 급히 부는 가을바람에 아래로 떨어져 광활한 거리를 뒹굴 뿐이었다.
“태자가 황궁 급습 소식을 어찌 알고 도망쳤는지는 상관없습니다.”
범한이 1 황자 곁에서 말했다.
“하오나 장 공주의 출궁은 분명 준비한 게 분명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무언가를 일을 치를 것이라는 걸 눈치챘던 겁니다.”
1 황자가 이맛살을 강하게 찌푸렸다. 그리고 높은 위치에서 경도 전체의 동정을 주시하며 대군이 경도로 들어오면 어느 방향으로 들어올지, 자신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석했다.
“우리가 이들을 모두 황궁을 급습에 투입했을 때······ 장 공주는 섭씨와 진씨 두 가문의 군대를 지휘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성문사와 함께 그들이 진입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황궁은 우리에게 양보해 놓고, 다시 그 황궁을 포위하려는 속셈이 분명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게 아닙니까?”
“원래는 아가리를 지나 뱃속으로 들어가 꽃을 피워 사방에서 불타오르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한데 그 불로 그녀를 태우기는커녕 도리어 그녀가 지니고 있던 얇은 천에 그 불꽃이 폭 싸이게 된 격이로군요.”
범한이 황성의 견고한 푸른 벽돌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치며 작은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애당초 고모를 얕봤던 겁니다.”
장 공주는 범한과 감찰원이 어느 면에서 강점을 발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꺼이 후퇴해 범한에게 황궁을 급습하게 한 후 그가 모든 걸 장악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황궁에는 황태후, 3 황자, 의 귀빈, 영 재인 및 무수히 많은 귀인, 호 대학사와 서무 대학사, 범한에게 충성하는 무수히 많은 문신과 부하가 있었다.
이들은 범한에게는 역량인 동시에 부담이었다. 범한에게 날개가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범한 입장에서는 장 공주가 저들을 궁 안에 남도록 한 건 그가 날지 못하도록 날개에 달 무거운 추로 쓰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이런 거였다.
‘대군이 성을 둘러싸도 범한 너 같은 가공할만한 야행 고수는 못 막겠지. 하지만 어깨에 경국 계승권을 짊어지고 있는 이상 황궁에 있는 무수히 많은 목숨을 두고 범한 네가 어찌 도망갈 수 있겠어. 이런데도 잔인하게 혼자 도망갈 거야?’
1 황자는 천천히 명령을 내렸다. 황성을 지키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 것이다. 그는 동원할 수 있는 건 전부 동원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범한과 수다나 떨 여유 따위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곧 어떤 무시무시한 위기와 직면하게 될지 알고 있어서였다.
범한은 멍하니 경도 곳곳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름다운 이운예가 유약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그마하게 말해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우리 착한 사위, 내 자네를 위해 많은 걸 준비했다네.’
범한이 황성 내 궁궐을 향해 침을 퉤, 하고 뱉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상대방 얼굴에 침을 뱉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장모님이 그 방면으로는 확실히 자기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한 그 이유만 없었다면 본인은 지금 황성에 묶여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1 황자에게 가르침을 구하듯 물었다.
1 황자가 엄숙한 낯빛으로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황성은 담벼락이 높아. 그러니 만약 섭씨와 진씨 가문이 밤새 달려온 거라면 대형 공격 무기는 가져오지 못했을 거네. 그렇다면 우리는 마지막까지 싸울 수 있을 걸세.”
서정군 통수권자로서 1 황자는 이번 생에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수없이 치렀다.
이에 대군이 경도를 압박해오는데도 그는 전혀 놀라거나 허둥대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전 한 말 중 마지막 구절은 범한의 질문에 대해 모든 걸 답한 거였다.
“이운예가 일찌감치 이런 계획을 세웠는데 섭씨와 진씨 가문이 그런 준비도 안 했을라구요.”
범한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 갔다.
“마마께서 며칠 더 버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군을 이끌고 싸우는 건 모두 마마만 믿겠습니다.”
“사절이 각지 주군과 6로 총독에게 원조를 요청하러 갈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1 황자가 범한을 잠시 훑어보고는 바로 생각을 바꾸고 말을 이어 갔다.
“그런 생각은 버리련다! 사절이 아직 살아 있을 리는 없겠지.”
그러자 범한이 속으로 만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제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아닙니다.’
* * *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황성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하더니 갑옷과 투구를 입은 몇몇 금군 병사들이 두 사람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짧게 보고를 했다.
범한은 1 황자 옆에서 조용히 모든 걸 듣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 놀란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밤새 수색해 황후는 잡았지만 태자는 잡지 못했고, 또 진씨와 섭씨 두 가문으로 보냈던 병사들이 허탕을 친 상태였다.
장 공주가 처음에 범씨 가문 저택을 포위했지만 무기력하게 허탕을 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부모 세대의 인물들이라 과거처럼 투지가 넘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태 동향에 대해서는 정확히 보고 있던 것이다.
특히 진씨와 섭씨 두 가문은 장 공주의 치맛자락에 이끌려 반역을 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자기 사람이 범한에게 인질로 잡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다.
몇몇 교위가 1 황자에게 경도의 방어 상황에 대해 각각 보고를 했다.
1 황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내용을 경청한 후 손을 내저어 그들을 물리고는 몸을 돌려 범한에게 말했다.
“현 상황을 보아하니, 이미 정한대로 모두 황궁으로 들어오면 황궁 밖에 있는 모든 지역을 저들에게 내주는 것과 마찬가지야. 더군다나 반군이 제대로 진을 치고, 황성을 포위하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뒤집을 힘이 없는 거지.”
듣는 내내 범한은 1 황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문제는 반군이 경도로 들어온 후에 소요를 일으키면, 그건 교란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거네. 근본적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없어.”
1 황자가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쥐고 있는 병력이 너무 적군.”
어느새 떠오른 태양이 붉은 햇살로 주홍색의 황궁 담벼락을 비추더니 다시 황성과 앞쪽으로 펼쳐진 넓은 광장을 따스한 빛으로 감쌌다.
한데 황궁에서 비스듬히 뒤쪽으로 있는 수려하고 그윽한 해자는 누가 봐도 끔찍한 핏빛의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만약 시간을 끌려면, 반드시 저들이 경도 성문을 들어오는 순간 공격을 시작해야 하네.”
1 황자가 아침 해를 바라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말을 이어갔다.
“지금 당장의 문제는 자네의 감찰원 밀정이 사방에 둘러쳐진 성 담벼락에 막혀버리면 그 어떤 정보도 들여보내지 못한다는 거야. 그러니 대군이 어느 성문을 통해 경도로 들어올지 예측을 해야 하네.”
“성문에서 황궁까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 정도면 우리가 상대방의 예기를 꺾기에는 충분합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 갔다.
“대군이 성문을 통해 경도로 들어온다면, 저는······ 정양문에 걸겠습니다.”
“내 생각과 같군.”
1 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군의 원대 대군영이 경도로 직접 공격해온다면 가장 가까운 성문은 바로 정양문이었다.
더군다나 13성문사의 관아 역시 그곳에 있었다. 장덕청이 배신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건 정양문뿐이었다. 그러니 장 공주 쪽 대군에게는 정양문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