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화 도망 중인 진평평의 그림자와 아이 (2)
그들을 맞은 건 텅 빈 진원이었다. 소문에 중독되어 줄곧 누워 있기만 하다던 진 원장도, 아름다운 시녀들도, 남녀 종들도 진원에는 없었다. 모두들 일찌감치 도망간 것만 같았다. 그것도 매우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 후였다. 진원 담벼락에 걸려 있던 서화도 모두 가져가고 없었다.
진평평은 그 서화들을 좋아했다.
진씨 가문이 통제하고 있는 군대는 주로 경도수비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 군을 이끄는 이는 진씨 가문의 2세인 어느 장군으로 진항과는 당형제 사이였다. 그가 텅 빈 진원을 허둥지둥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군을 몰고, 이리도 많은 희생을 치르며 들어왔는데 그 결과가 빈 진원이라 폭발해 객혈을 할 뻔했다.
화가 너무 많이 난 나머지 이 진씨 장군은 불을 놓아버렸다.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을 속에서 그가 말을 서둘러 몰아 원대가 있는 대병영으로 가 보고를 했다. 하지만 군을 이끌고 돌아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진 영감님이 기필코 이행해야 하는 명령을 내린 때문에 진원 공격에 나선 이상은 진평평을 죽여야 회군할 수 있어서였다.
어쩔 수 없이 그는 평소의 오만함을 지우고 검은색 옷을 입은 옆 사람에게 공손하게 가르침을 구했다. 이 자는 영감님이 도와주라고 보낸 사람이었다. 그는 군대가 공격하러 가는 길목에서 진원에 분명 아무도 없을 거라 말한 적 있었다.
그때 진씨 장군은 그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 ‘감찰원 원로이니 진평평이 얼마나 대단하고 어찌 계산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겠지!’라고 탄식했다.
얼굴을 가린 언약해가 말을 타고 진씨 장군 옆으로 가 섰다.
“원장이 사라졌으니, 장군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네······ 단시간 안에 그를 잡을 생각도 하지 말고 말이지.”
진씨 장군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언약해가 그를 잠시 바라보고는 비웃듯이 말했다.
“그가 진평평이란 걸 잊지 마시게.”
말을 마친 언약해는 활활 타오르는 진원을 더는 볼 수가 없어 말머리를 돌려 진원에서 나갔다. 그리고 나중에 원장 대인께서 진원에 불을 놓은 장군을 능지처참 형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약해는 진씨 집안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비밀은 진씨 가문에서만 알고 태자와 장 공주 쪽은 모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감찰원 사람이란 건 오직 감찰원에서만 알고 당연히 진씨 가문에서는 모르고 있었다.
* * *
경도 내부는 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갔다. 이에 각 로와 군의 상주문이 경도로 들어왔지만 그들에게 다른 지시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은 현재 정보 교류 속도가 비교적 느린 편이라 모두가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습관이 되어 있다는 거였다.
이에 경도 외곽에 머물게 된 관원들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는 했어도 경도의 위기 국면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요 며칠 동안 경도와 동산로를 제외하면 경국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위주의 새벽과 경도의 새벽은 다를 바가 없었다. 원래는 경도에서 황위 문제를 처리하고 있거나, 아니면 진원에서 독을 빼는 치료를 받고 있어야 하는 감찰원 원장 진평평이 눈을 들어 사합원(四合院: 건물이 정원을 ‘ㅁ’ 형태로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집) 뜰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후 젓가락을 들어 멀건 죽과 왕만두를 먹었다.
진원에서도 그는 이 두 가지 음식을 좋아했다.
황태후의 명령이 진원으로 전달되자 경국 특무기관의 우두머리인 그는 곧바로 하인에게 마차를 준비시키고 짐을 꾸렸다. 그 후······ 경도로 가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내뺐다.
범한과 1 황자도 황성 위에 서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도망가고 싶어 했다. 한데 그들과 가장 가까운 어른이 그들보다 훨씬 더 명쾌하게 결정을 내린 거였다.
마차 행렬이 진원에서 나와 경도 남쪽의 초야를 뱅글뱅글 돌았다. 마차 행렬을 쫓는 진씨 가문의 군대는 진평평을 죽이기 위해 끈질기게 마차의 행방을 찾았다.
진평평은 서두르지도, 마차 대열의 속력을 높이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일부러 자신의 종적을 지우지도 않았다. 진씨 가문의 군대를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진평평은 저들이 자신의 꽁무니까지 바짝 쫓아오면 그때서야 곧바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마차가 경도 남쪽에서 세 번을 도는 동안 군대도 세 번을 돌아야 했다. 그런데도 이 둘은 마주치지 않았다. 이건 감찰원이 민간에 강력한 정보 체계를 구축하고 은닉 능력을 갖춰 놓은 덕도 있지만, 그것 말고도 군대 안에 대단히 우수한 길잡이 도우미를 심어 두어서였다.
언약해는 진씨 가문의 군대를 이끌고 진평평을 쫓는 중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은 궁둥이로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진평평이 원치 않는 이상 저들은 영원히 그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행 다니듯 도망 다니던 마차 대열이 드디어 경도 남쪽의 제일 큰 주(洲)인 위주성 모처 장원에서 멈추었다. 진평평이 계산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진평평은 아직 치아 상태가 좋았고, 기력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지만, 죽을 즐겨 먹었다. 아니, 즐겨 마셨다.
옆에 있는 몇몇 감찰원 노인들은 원장이 조금 뻔뻔하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경도에서 이렇게 소란이 일고, 원장 대인의 조카 두 분은 지금 사지에 있는데, 어찌하여 혼자서만 도망오신 겁니까?’
진평평과 함께 아침밥을 먹고 있는 세 사람 중 하나는 진원에서 수십 년 시중을 들어 온 늙은 종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범한이 감찰원 감옥에서 만난 적 있는 7처 전임 수뇌인 그 대머리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왕계년과 이름을 나란히 한 감찰원의 두 날개 중 한 사람, 바로 종추였다.
장원 뒤쪽에서 묘령의 희첩들이 기침해 세수하고 양치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들 여인은 자신들이 피난 중인 걸 알지 못했다.
감찰원 원로 세 사람의 낯빛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종추가 입을 살짝 오므려 긴장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병사들이 가까이 추격해 왔습니다. 원장께서는······ 무슨 계획이 있으신 거겠지요?”
“곧 그들이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올 테니, 그건 급한 일이 아니네.”
진평평이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긴급한 상황임에도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입가를 닦았다.
“나가서 준비들을 하게나.”
“알겠습니다.”
종추와 7처 수뇌였던 대머리가 명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집안에는 진평평과 늙은 종 이렇게 두 사람만 남았다. 바로 이때 진평평이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괴로운 듯 기침을 해댔다. 노인의 낯빛이 붉게 변했다가 이내 창백해졌다. 그리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늙은 종이 울먹였다.
“어르신, 비 대인을 불러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독을 어쩐단 말입니까?!”
진평평은 정말로 중독이 된 거였다!
그가 의자에 앉아 자조적으로 웃었다.
“독은 사람을 죽이지 못하네. 그냥 괴롭게 만들 뿐이야.”
“어르신······ 경도가 조금 위험합니다. 설마 작은 범 대인 걱정은 정말로 안 하시는 것입니까?”
늙은 종이 진평평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평평의 창백한 얼굴 위로 갑자기 주름이 더 많아졌다. 한참 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 실패한다 해도 그 애는 살아남을 거라 생각하네. 살아남기만 한다면야, 다 잘 될 거야.”
늙은 종이 생각했다.
‘황위 쟁탈전에서 작은 범 대인이 정말로 패한다면, 어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태자가 정말로 대통을 이어받는다면, 우리 일행도 이 넓디넓은 경국 대지에서 몸 누일 곳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일이 생각이 난 늙은 종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범 상서와 정왕야께서는 아직 나서지 않으셨습니다.”
요 며칠 진평평은 수하로 둔 이 종과 자주 경도 국면에 대해 논의했다. 늙은 종은 줄곧 옆에서 듣고 있던 터라 경도에 있는 이들의 실력 차에 관해 명확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만약 13성문사를 정말로 지켜내지 못한다면, 섭씨와 진씨 두 가문의 대군이 경도로 들어온다면, 경도 감찰원이 어찌 막아낼 수 있을까? 그러니 범건과 정왕야에게 세상을 뒤엎을만한 힘이 있어야 진 원장이 이 바퀴 달린 의자에 편안히 앉아 범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을 터였다.
“정왕과 진씨 늙은이는 똑같은 이들이야. 땅바닥에만 신경질만 낼 뿐이거든.”
진평평이 살짝 자조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범건은 이번 생에 꾹 참아서 이겼지만, 이는 오히려 진 것이기도 해. 그러니 그의 손에 어찌 현 시국을 바꿀 힘이 있겠는가? 황궁 쪽에 의심을 받는 걸 꺼려서 그동안 범 상서는 힘겹게 꾹 참았거든. 이번에야말로 잘 됐어. 그냥 계속 참으면 되니까.”
말을 마친 진평평이 침묵에 들어갔다. 그는 범건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황제 폐하께서 이번에 천제를 지내러 가실 때 그들을 모조리 데려가셨다는 점, 그리고 그들 중 과연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파닥파닥.
흰색 비둘기 몇 마리가 새벽빛을 따라 정원으로 날아들었다. 늙은 종이 앞으로 나가 한 마리를 잡아 진평평에게 바쳤다.
진평평이 비둘기 발에 달린 가느다란 통을 열어 그 안에 있는 내용을 보았다. 그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한참 후 감찰원 부하를 불러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전에 명령했던 것처럼 전원 행동하게. 동산로에서 오는 소식은 모두 봉쇄하고. 조정의 사자(死者)를 맞으러 오는 행렬이 곧 도착할 걸세.”
“알겠습니다.”
* * *
한참 후 진평평이 정신이 나가 있던 상태에서 돌아왔다. 지금까지 경국 제일의 음모가였던 이가 드디어 무기력감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 독약 때문이라거나 늙어서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밀려와서일 수도······.
“범한은 그리 쉽게 죽지는 않을 거야.”
늙은 종을 위로하려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위로하려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진평평이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녀석 대신 6천 대군을 끌어 왔단 말이지. 녀석이 받는 압박감이 많이 줄었을 테지. 사람 하나를 죽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걸 알아야 한다니까.”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후원으로 나갔다. 그러자 늙은 종이 서둘러 의자를 밀어 주었다. 화단 옆을 지나칠 때 그 안에 펼쳐진 가을 안에서 살며시 떨고 있는 작은 흰 꽃이 진평평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멈춰 서서 그 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굽혀 한 송이를 따 살포시 귀에 꽂았다.
늙은 종이 잠시 웃고는 다시 진평평의 의자를 밀고 후원에 있는 곁채로 들어갔다.
곁채로 들어가자 진평평이 갑자기 그에게 말했다.
“범한이 아비의 도리를 안다면 분명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더 많이 배웠겠지.”
곁채로 들어오는 햇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하지만 20세 전후로 보이는 여인이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품속에 있는 갓난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건 똑똑히 보였다. 모성으로 빛나고 있는 이 여인은 경도 외곽 범씨 장원에서 실종된 사사였다. 그리고 그녀의 품 안에 있는 아기는······.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사사에게 향했다. 그리고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사사가 건네주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갓난아이를 받아들었다. 아기 얼굴의 홍조, 아기가 서둘러 두 눈을 감는 모습, 벌린 입 사이에서 움직이는 혀를 보며 “구구”라고 말하며 장난을 쳤다.
“정말로 착한 딸아이로구나. 네 아비가 보면 분명 무척이나 좋아할 거다.”
사사가 기분 좋게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가 진평평 귓가에 꽂힌 작은 흰 꽃을 발견하고는 궁금해서 물었다.
“원장 대인, 어찌 꽃을 꽂고 계십니까?”
“지난번에 아이를 앉았을 때 바로 울기에 내가 너무 못생겨 그런 것 같아, 오늘은 꽃을 꽂고 왔네만······ 오늘 보니, 과연 안 우는군.”
진평평 얼굴 위에 주름이 국화처럼 활짝 폈다. 아이를 아껴 생긴, 진짜 미소가 만들어 낸 주름이었다. 어쩌면 진평평은 품 안에 있는 아기를 자기 친손녀로 여기며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사사는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진평평을 바라보며 갑자기 슬프게 말했다.
“한데······ 도련님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기약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