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화 도망 중인 진평평의 그림자와 아이 (1)
언빙운은 부러진 한 손을 허리 쪽에 무기력하게 늘어뜨린 채 암담해 보이는 눈빛으로 장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쪽에는 통증이 있었다. 아까 부딪혔을 때 내상을 입은 것이다. 장 공주 옆에 있는 군산회 고수는 언빙운이 저항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13성문사는 병사들로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고, 긴 창이 언빙운을 겨누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 공주 옆에 있는 군산회 고수가 둘로 나뉘어 언빙운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그들은 날카로운 칼을 들고 언빙운을 질식할 것 같은 적막 속으로 몰아갔다.
“폐하께서 안지의 말대로 군산회를 쓸어버리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죽음을 눈앞에 둔 언빙운이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토했다.
언빙운도 알다시피, 그는 고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하늘에 있는 신묘에 자신이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그가 침울한 얼굴로 품을 더듬어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령전 한 발이었다. 성문사에서 변고가 일었으니 어떻게든 죽기 전에 황궁에 있는 범한에게 장덕청의 배신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언빙운의 집게손가락이 령전의 줄을 올렸다. 그 사이 검은색의 검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언빙운의 동공이 살짝 수축되었다. 그가 탁하게 숨을 내쉬고는 양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힘껏 줄을 당겼다.
‘촤락!’ 소리와 함께 령전에 불이 붙었다. 하지만 하늘로 쏘아 올리지는 못했다. 무언가가 그의 팔을 툭 건드려서였다. 살짝 미지근한 액체가 그의 손등이 흩뿌려졌다. 언빙운이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바람에 령전은 비스듬히 발사되었다. 이에 령전은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지 못하고 성문사의 어느 병사 가슴으로 직행해 ‘팍!’ 소리를 내며 폭발해 버렸다.
언빙운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곁눈질로 손등을 가득 적신 피를 바라보았다. 피가 후드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언빙운의 집게손가락이 띠줄을 잡았을 때였다. 그로부터 제일 가까이 있던 군산회 고수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마치 이상하고 두려운 걸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고수의 목에 가느다란 혈선(血線)이 생겼다.
혈선은 순식간에 커지더니 어느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로 변해버렸다. 그러자 고수의 목에서 새하얀 후골(喉骨)부터 시작해 이상하리만치 역겨운 기도며 식도, 피가 엉겨 붙은 살점이 드러났다.
이어 ‘칵!’ 하는 소리와 함께 고수가 언빙운 얼굴 쪽으로 달려들더니 ‘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때의 충격으로 반 정도 잘린 목이 인후두 아래로 쪽으로 툭 떨어져 달랑거렸다. 머리가 목에서 척추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등 쪽으로 힘없이 돌아간 것이다.
고개가 뒤집혀 매달린 머리는 눈을 부릅뜬 채 군산회 고수와 병사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장 공주, 장덕청을 노려보았다.
한편 목구멍 기도 쪽에서는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선혈은 언빙운의 손을 적시고, 그의 손등을 붉은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정말 절묘하게도 령전이 공중으로 발사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데 언빙운에게 접근했던 군산회 고수는 더 끔찍한 말로를 맞게 되었다. 그는 언빙운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저 횃불이 비치는 곳에서 옅은 그림자가 나타나 자기 곁을 스치고 지나간 것만 순간적으로 봤을 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목 쪽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우아한 느낌의 검이 번쩍하며 그의 오른쪽 후방에서 파고들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매정하게 그의 목을 찔러 칼날이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촥’ 하는 소리와 함께 검 끝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반대쪽으로 삐져나왔다가 바로 들어가고는 번개처럼 그의 목에서 사라졌다.
고수의 목에서 검이 뽑히자 그 즉시 그의 온몸에 있던 정기와 생명력도 빠져나갔다. 고수의 눈동자가 죽은 물고기처럼 변했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쥐려 했다. 하지만 몸의 그 어떤 근육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만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고수는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대소변을 아래로 쏟기 시작하며 땅으로 고꾸라지더니 조롱박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언빙운이 서 있는 곳까지 굴러와 성문사 관아 대청의 높은 문지방에 부딪힌 후에야 겨우 구르는 걸 멈추었다.
그의 몸에서 진한 피의 기운과 역한 비린내가 풍겨왔다.
* * *
지옥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검이 음험하고 무시무시한 수단으로 전광석화처럼 군산회 고수 둘을 해치웠다. 그 누구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다. 덕분에 목숨을 보전한 언빙운도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경악해 제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언빙운은 온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그림자가 그의 목깃을 잡고 성문사 관아 대청 위로 날아가 버렸다. 이윽고 높은 성문 담벼락 아래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따라 경도의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여명이 오기 전, 어둠이 더욱 짙어질 무렵이었다.
* * *
언빙운을 죽이기 위해 몰려 있던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장면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여러 사람 앞에 스르륵 나타나 두 고수를 신속하게 처치한 후 언빙운을 낡은 마대자루 가져가듯 채 갔으니 말이다. 그것도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언빙운을 가볍게 데리고 빠져나갔으니 대단한 실력인 게 분명했다.
심지어 그렇게 가볍게 처리해 버리니 두려움이 더욱 배가 되었다. ‘팍, 팍, 팍’, 하고 소리가 세 번 났는데 어느새 언빙운을 구출해 갔으니 말이다.
성문사 관병들은 손에 들고 있던 활을 쏘기 위해 치켜들 새도 없었다.
저 검은 그림자는 대체 누구기에, 저리도 가공할만한 실력을 지닌 걸까!
고수와 병사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최후방에 있던 장 공주는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손을 내저어 앞에 있는 부하들을 물리고는 사람들 속에서 걸어 나와 그림자가 도망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더 반짝이고 있었다.
“감칠원은······ 정말 무서운 존재야.”
이런 생각이 들었음에도 경도 반란의 주모자는 절대 좌절하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천하제일 자객이,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언빙운만을 구하고 떠났으니 그녀로서는 행운이었다. 애초에 저지할 방법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운예는 이런 생각을 하며 성 문 밖에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평선 아래에 있던 태양이 무수히 많은 반짝이는 물고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고기들에게 배를 불쑥 내밀어 빛을 반사해 경도의 짙은 어둠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희미한 새벽빛이 모든 이에게 비추어 지면에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하여 이제는 횃불도 그다지 밝지 않았다.
* * *
감찰원은 무서운 존재다. 8대처에 얼마나 많은 영웅호걸이 기꺼이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고, 과거를 버리고 경국의 위대한 특무 사업에 뛰어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력자들이 한 곳에 뒤엉켜 있으니, 이들이 발휘하는 위력은 경국 최고 강자인 황제도 줄곧 암암리에 경계할 정도였다.
감찰원은 명의상 경국 황제가 직접 관리하는 특무기관이다. 하지만 감찰원이 그리 많은 고수를 흡수하고, 경국에서 30여 년 동안 횡포를 부릴 수 있었던 건 모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늙은 절름발이 때문이라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경도에 있는 감찰원 관원 수는 고작 천여 명밖에 안 되었지만 그들은 가공할만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황궁을 급습하고, 형부를 굴복시키고, 감옥을 강제로 열고, 경도부를 수복하는 걸 고작 하룻밤 안에 다 처리함으로써 온 경도를 뒤집어 놓았다.
범한의 계획이며, 언빙운의 행동력 모두가 좋았다. 하지만 위와 같은 효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건 그래도 감찰원 관원의 강력한 조직력과 굳건한 복종 덕분이었다.
이러한 감찰원의 독특한 특징은 모두 진평평이라는 늙은 절름발이와 제1대 8대처 수뇌들이 수십 년이란 시간에 걸쳐 영혼에 조금씩 불어넣어 새긴 것이었다.
그래서 감찰원에서 가장 대단한 건 흑기도, 범한도, 천하제일 자객도 아닌 진평평이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게 있었다. 태자와 장 공주는 대동산에 간 황제를 암살할 계획을 짰고, 장 공주는 감찰원의 위력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감찰원을 향한 관심은 너무 적은 것처럼 보였다.
항상 불안해하는 태자의 경우 용좌에 앉으려면 우선 진평평부터 통제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진평평이 독에 중독이 되어 경도 밖에 격리되어 있기는 했다.
태자는 그 모든 게 고모가 직접 한 일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그 일이 이운예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건 그 누구도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운예는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경도 밖 진원에 있는 늙은 절름발이를 상대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진평평을 중시하지 않아서도, 진평평을 영원히 소멸시킬 수 없는 늙은 괴물로 여겨서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그녀에게 비밀이 있어서였다.
비밀이란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획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진평평이 동이성의 독 대사(大師)에게 당해 쓰러졌다는 소식이 경도로 전해지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리고 늙은 절름발이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동산에서 황제가 자객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황태후는 곧장 진평평에게 입궁하라 전했다. 하지만 진평평이 계속 진원에 머물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생각했다.
설마 진평평이 정말로 독에 당했단 말인가?
진평평과 수십 년간 교우했던 노인은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 노인은 아무도 모르게 진평평을 향한 공포심과 경계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죽여야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묘한 정세 속에서 병석에 누운 진평평의 목숨을 취하지 않으면 노인은 자기 자신에게 미안할 짓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노인, 배추 심는 진씨 가문의 영감님은 경도를 떠나 다시 군대를 지휘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경도수비사의 군권을 되찾아오자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은 바로 진원을 도륙하라는 거였다.
* * *
지금 진원은 이미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강남 명씨 가문 정원보다 훨씬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진원이 지금 이 순간에는 곳곳이 검은 재가 되어 잔해만 남아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답고 우아하기 그지없던 조경과 숲은 이미 모두 불타 검은 재가 되어 있었다. 정교하고 대담한 저택은 반 토막이 되어 돌로 된 담만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사방에서는 연기만 일뿐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아, 너무나도 처량해 보였다.
만약 범한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가슴이 무너지는 듯 아파하며 귀한 것의 가치도 모르는 놈들을 향해 거침없이 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고로 군대는 예술적 심미관이 가장 필요 없는 단체였다. 그러니 진씨 가문의 군대는 벼락 치듯 진원으로 들어간 후 당연하다는 듯 불을 놓은 거였다.
이번 불의 원인은 전쟁 약탈자가 낸 불과는 전혀 다른 거였다. 전쟁 약탈자라는 강도는 약탈한 물건이 너무 많아 다 옮길 수 없자 그 나라 백성들에게 그 물건을 남겨주지 않기 위해 불을 놓는 거였다. 그런데 진씨 가문의 군대가 불을 놓은 이유는······ 그들이 물건을 훔칠 것도 아니었고, 또 그 안에 잡을 수 있는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서였다.
진원 밖에는 일찍이 범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함정과 장치들이 아직도 있었다. 이에 진씨 가문의 군대는 삼백 여 명이 사망한 후에야 겨우 진원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원에서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