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화 수많은 화살 (2)
연화령 령전이 발사되고 천 명이 움직였다. 그리고 형부 대감옥이 열리자 공략하기 어려워 보였던 경도부가 대문을 활짝 열고, 등불을 훤히 밝혔다. 얼핏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경도부는 경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고, 그들이 데리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아속과 차관(差官)이었다. 황성에서 연화령 령전이 발사되자 엄숙한 얼굴의 2품 대신 경도부윤 손경수가 무거운 얼굴을 하고는 정당(正堂)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랐던 아랫사람들은 눈과 입을 떡 벌린 채 부윤 대인을 바라보았다
‘이 한밤에 손 대인께서는 왜 관복을 빼입고 나오신 거지?’
숨 몇 번 들이쉬었다 내쉬는 사이 우레와 같은 발걸음 소리가 도착했다. 손경수가 복잡한 표정으로 부하들을 쓱 바라보고는 그 어느 때보다 실망과 후회가 담긴 한숨을 내쉬며 부하들에게 경도부 대문을 활짝 열라는 명을 내렸다.
대문이 열리자 감찰원 관원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리고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경도부 관원들 앞에서 그들은 정당 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는 손경수를 포위했다.
검은색 관복을 입은 감찰원 관원들이 둘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바로 감찰원 1처 수뇌인 목철이었다. 굳은 얼굴의 그가 냉랭하게 손경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인께서 하관을 시켜 물어보라 하셨습니다. 생각은 끝내신 것입니까?”
손경수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한참 후 두 다리 힘이 갑자기 풀린 듯 ‘팍!’ 소리와 함께 바닥에 꿇어앉아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신이 잘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공작 어르신께 용서를 구할 수 있겠나이까.”
이와 같은 광경이 연출되자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정당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은 줄곧 황태후의 명을 받들고 있던 부윤 대인이, 그것도 사활을 걸고 경도에 있는 범한을 잡으려던 대인이 왜 감찰원 관원이 나타나자 저항 않고 바로 투항해 버리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목철은 아무런 감흥도 못 느낀 사람처럼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무척이나 놀란 상태였다. 그는 경도부를 접수하라는 명을 이행하러 온 거였다. 그렇기에 인생에서 가장 처참한 살육전을 벌이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건 언빙운의 담담하고 짧은 분부 때문이었다.
경도부로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환하게 밝혀진 불이었다. 그래서 목철은 이것을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작은 언 대인의 말처럼 이상하리만치 순조로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손경수가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의 낯빛은 이상하리만치 참담했고, 왼손으로는 품에 있는 관모를 끌어안은 채 정말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경도부가 감찰원에게 저항하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앞서 후원에서 흰 옷의 공자와 나눈 대화 때문에라도 그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오로지 투항밖에 할 게 없었다.
오늘 밤이 되어서야 손경수가 알게 된 게 있었다. 범한이 자신의 저택에 수일 간 숨어 있었는데, 이번 경도 변란의 시점이 자기 집 후원에 있는 딸아이의 방이란 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황궁을 급습한 자객이, 그것도 4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경도부 문서를 가지고 몰래 경도로 잠입했다는 거였다.
그 일이 까발려진다면, 오늘 밤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든 태자마마와 장 공주마마에게는 용서 받지 못할 게 뻔했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 자신을 범한이 심어 놓은 간자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래서 손경수는 어쩔 수 없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바로 아예 범한 쪽으로 전향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도 작은 범 대인의 사람으로 오해 받을 테니 아예 그의 사람이 되어야 적어도 살아남을 수는 있는 거였다.
오늘 이후로의 앞길과 안위는······ 빈아가 나 대신 말을 잘 해주겠지?!
빈아 생각이 나자 손경수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아 하마터면 뒷목을 잡을 뻔했다. 황궁을 급습한 자객이 지니고 있던 경도 진입 문서 관련 비밀 누설을 막기 위해 그는 우선 자신의 서재를 출발점으로 놓고 따져보았다. 부하들까지 철저히 속인 문서였으니, 빈아 고 계집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자기 필적을 모사하고 관인을 훔쳐다가 쓸 리 없었다.
‘다음 생에는 다시는 딸을 낳지 않으리라. 딸은 팔이 밖으로 굽게 마련이니까!’
어쩔 수 없이 배신하게 된 경도 부윤 손경수가 그 어느 때보다 슬픈 마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 * *
황성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얼마 자나지 않았을 때, 금군 대대(大隊)가 정문을 통해 후궁을 급습해왔다. 천이 넘는 호랑이와 승냥이 같은 군인들 앞에서 정신을 잃은 궁정 호위병들과 내관들은 투항이라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강경하게 맞서봤자 소탕에 나선 금군 손에 시체가 될 뿐이어서였다.
이에 후궁은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가끔씩 일사분란 한 발걸음 소리, 그리고 갑옷과 투구에서 울리는 ‘착착착’,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범한이 침울한 얼굴로 동궁 대문을 열었다. 그런 후 이곳에서 급습을 펼쳤던 검수들은 궁궐 밖에 남겨두고 길가에 깔린 시신을 바라보며 복원된 지 얼마 안 된 궁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함광전에서 범한은 차분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지금 그가 얼마나 실망한 상태인지는 그 자신만 알고 있었다. 태자와 장 공주를 놓친 건 자기 계획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과 다름없는 거였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영원히 기우지 못할 큰 구멍일 수 있었다.
그가 포위당해 한 곳에 몰려 있는 내관과 궁녀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궁궐 담벼락 밖 저 멀리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였다.
환청임을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 황자의 행군 속도를 믿었다. 그리고 황궁 내부를 기본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 이상 1 황자는 분명 큰 대대를 따로 만들었을 것이며, 경도의 종심(縱深: 전방에서 후방까지의 세로의 선)을 따라 더 큰 범위를 통제하려 할 것이었다. 다만 13성문사와 마찰을 일으켜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기는 해야 했다. 1 황자는 범한과 마찬가지로 이왕 공격을 개시한 거 인정사정 봐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금군과 감찰원은 지금 경도에서 태자와 장 공주의 흔적을 사력을 다해 찾고 있었다.
제일 관건은 임완아와 임대보를 장 공주가 데려갔다는 사실이다. 자기 가족을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범한은 분노가 일고 침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궁궐 내 어느 조용한 방으로 들어서서 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얼굴에 여드름이 난 태감을 보는 순간 그는 속으로 대로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약해져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넋이 나가 있던 홍죽은 범한이 침울한 표정으로 들어오자 기듯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후 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방 안에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서 있는 범한과 꿇어앉아 있는 홍죽뿐이었다. 그리고 밖에서 들어온 은은한 빛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져 조금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정신이 나가 있는 홍죽의 얼굴을 바라보며 범한이 소맷자락 속에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가 천천히 힘을 뺐다. 그리고 조금 지쳤다는 듯 말했다.
“이 일은 해명이 필요하구나.”
홍죽이 고개를 들어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는 깊은 양심의 가책과 자책만 들어 이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기만 할뿐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 홍죽은 황궁 내 범한의 최대 조력자였다. 범한이 겨우 2백 명만 데리고 후궁 깊은 곳까지 들어와 일거에 함광전을 통제할 수 있었던 건 후궁 정세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호위병의 분포 및 각 귀인들의 세부 생활 방식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요 이틀 동안 홍죽이 모험을 감행하면서까지 황궁 밖으로 정보를 전달해 준 덕분이었다. 운이 좋아 높은 자리까지 오른 이 나이 어린 태감은 본래 함광전으로 보내졌었다. 그런데 태자가 동궁으로 돌아가자 매정하게 돌아서지 못하고 도로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이때 황태후는 태자의 보위 계승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그의 사소한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에 홍죽은 황궁에서 가장 독특한 사람이 되었다. 어서방에서 상주문 나르는 일을 하고, 또 함광전에서 황태후의 시중을 들고. 그리고 동궁에서는 황태후와 서로 의지하며 2달을 함께 보내고 말이다.
이상하게도 모든 귀인들이 그를 좋아했고 예뻐해주었다. 물론 범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홍죽이 황궁 내 범한의 첩자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홍죽은 범한 일행이 곧장 함광전으로 향하고, 병 당번 호위병들이 수상쩍게 중독되어 미리 경고를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었다.
이렇듯 범한이 황궁 급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홍죽의 공로가 지대했다. 하지만 지금 범한은 전혀 고깝지 않은 눈빛으로 홍죽을 바라보며 그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태자와 황후는 동궁에 있었으니 모두 홍죽의 시야 안에 있었다. 그러니 황궁 급습이 갑작스레 이루어진 상황에서 범한의 날카로운 칼날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들이 어떻게 도망을 갈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홍죽의 해명이 필요했다.
범한이 주먹을 꽉 움켜쥐기 시작했다. 치아 사이로 음울한 소리가 삐져나오더니 그가 이내 싸늘하게 웃기 시작했다.
“네가 몰래 기밀을 누설한 것이냐?”
범한의 싸늘한 눈동자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홍죽은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범한이 찬 공기를 쓰읍, 하고 들이마셨다. 그리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홍죽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뭐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 우리는 지금 반역을 하는 중이지 소꿉놀이 하는 게 아니다!”
동궁 안에 있는 누군가가 들을세라 범한은 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점점 더 미쳐 날뛰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마음이 약해진 게냐?”
범한이 이맛살을 강하게 찌푸렸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어투로 음산하고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마음이 약해진 탓에 경국에 피해가 갈 수도 있느니라!”
범한이 발 옆에 침을 퉤, 하고 뱉고는 분개해 험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황궁으로 들어왔더니, 네가 이런 장난질을 쳐 놓았다니! 살고 싶지 않다면 계속 그리 하거라. 하나 황궁에 있는 저들은 어찌 해야 하느냐? 네가 한 짓 때문에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도망갈 채비를 하게 생겼구나!”
평소에는 보기 힘든 범한의 분노가 시작되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였다. 주도면밀한 계획을 위해 황궁에 있는 첩자에게 그토록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는데! 그런데도 이리 큰 착오가 생긴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니!
왜지? 왜냐고! 범한은 홍죽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도깨비불 같은 불이 번쩍이고 있었다.
“태자께서는 쇤네에게 정말로 잘 해주셨습니다.”
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홍죽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눈가에서 흐른 눈물이 홍죽의 뺨을 타고 내려가 그의 옷을 적셨다.
“황후마마께서 너무 불쌍하십니다. 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는데, 결국에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홍죽이 대성통곡을 했다. 그리고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말했다.
“대인,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저도 살고 싶지 않사옵니다. 수아가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 때문에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