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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18화 (718/1,108)

718화 황성 안팎에서 울리는 살육의 소리 (1)

황태후는 화가 나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한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냉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이씨 성을 갖지 못한 손자를 저평가했음을, 그리고 상대방의 냉혹함과 사나운 성미를 얕잡아 봤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황태후는 목을 겨누고 있던 칼날과 더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황태후 입장에서는 순간일수도, 아니면 긴 시간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드디어 살짝 적막감 같은 게 돌더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따르게.”

“황태후께서 친히 소리치시고, 소리를 좀 높여 말씀하시지요.”

범한이 말했다.

황태후가 분노한 눈으로 범한을 주시했다. 그리고 강요에 못 이겨 노쇠한 목소리로 함광전 밖을 향해 소리쳤다.

“호위병들은 명을 들으라. 모두 멈추어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태후의 명령이 나간 후 함광전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한 시름 놓았다. 어쩌면 범한이 한 말에 이들이 모두 겁을 집어먹어서일 수도 있었다. 손자가 할머니를 살해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될까 봐, 신하가 황태후를 살해하는 무서운 장면이 벌어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 순간 3 황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후 태감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보니, 후 태감은 마마께서 죽기만 바라는 것 같습니다.”

범한이 황태후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황태후가 후 태감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늙은 태감 넷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후 태감 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그러자 후 태감이 한숨을 내쉬며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3 황자는 아직 겁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오후에 자객에게 찔린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3 황자는 서둘러 어머니를 부축하고는 영 재인과 함께 다급히 범한 곁으로 달려갔다.

태후의 명령이 떨어지자 함광전을 둘러싸고 들려오던 살육 소리가 바로 사라졌다. 범한과 함께 입궁한 검수들은 일찌감치 지시를 받았는지, 호위병들이 공격을 하지 않자 그들 역시 반격하지 않았다.

함광전의 모든 나무문이 동시에 누군가에 의해 열렸다. 찌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온 함광전 궁궐 문이 탁 트여버렸다. 이에 궁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밖에서 펼쳐지고 있는 긴장 국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직도(直刀)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함광전 호위병들을 포위하고 있었고 함광전 밖 공터에는 시신이 무수히 많이 널려 있었다.

초가을 바람이 함광전 밖에서 불어왔다. 그런데 함광전 안 분위기를 맑게 정화시켜주기는 커녕 오히려 싸늘한 기운만 더욱 가중시켰다. 바람에 오히려 피비린내가 함광전 안까지 불어 들어와 사람들의 코를 자극해서였다.

온통 시커먼 색으로 무장한 검수 수십 명이 함광전 안으로 전속력으로 들어와 태감들을 포위했다. 궁정 내 고수인 이 나이 많은 태감들은 굴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감찰원이 특수 제작한 철제 손가락 수갑까지 차야만 했다.

황태후는 범한 수중에 있었고 범한은 자기 손으로 그녀를 죽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 궁정 고수들이 반항을 할 수 있었을까?

후 태감은 반항하려 했지만 그래도 대세에 압박을 받아 쓸데없는 행동을 과하게 할 수 없었다.

범한은 부하들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자 다시 눈썹을 씰룩이고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함광전 밖에서 이루어진 습격전은 비록 짧은 시간 안에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십여 명의 충성스런 부하들이 하늘나라로 가 있었다.

황궁 습격에 나섰으니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리고 이 정도로 적은 대가를 치르고 단시간 내에 함광전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그들은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범한이 눈꺼풀을 내리고 검 아래에 있는 황태후를 향해 말했다.

“제가 죽일 수 있다는 거 아시겠지요······. 만약 제가 마마를 시해한다면, 어찌 돌아가셨는지 모르게 죽여드릴 방법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황태후가 극심하게 기침을 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러다 범한이 대고 있는 검에 살이 스쳐 목 부분에 상처가 났다.

그러자 황태후에게 충성을 바치는 태감과 궁녀들의 얼굴에 그녀에게 다가가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히 황태후에게 달려갈 수는 없었다.

황태후가 고개를 돌려 원망 섞인 독한 눈빛으로 범한을 노려보았다.

“너도 네 어미와 똑같이 야심으로 가득 찬 승냥이로구나! 네가 이 황궁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 지켜볼 것이니라.”

그렇다. 아무리 범한이 황태후를 인질로 잡고 황궁을 통제하고 있다지만, 이 다음부터 그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범한을 지켜보고 있는 시커먼 옷을 입고 있는 검수들을 포함해 모두가 범한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범한은 황궁으로 들어온 나머지 세 개 조의 소식과 황성 근처의 동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온전한 성공을 이룬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든 일이 어그러지면 성공을 코앞에 두고도 실패하게 되어 있어서였다.

범한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냥 한가롭게 있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검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후 태감을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후 태감은 순간 심장이 싸했다. 몰래 정기를 운기 시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후 태감이 대경실색하며 양 소매를 뒤집고는 싸울 준비를 했다. 한데 눈꺼풀을 들어보니 이미 작은 쇠뇌 열 대가 검은 빛을 반짝이며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범한이 데리고 들어온 2백 명은 궁궐밖에 있는 적들을 놀라게 할 우려가 있어 위장하는 데 지대한 공을 들였다. 이에 모두가 쇠뇌를 지닐 수는 없었고, 그 결과 범한을 따라온 수십 명 중 암기용 쇠뇌를 지닌 이는 딱 열 명 뿐이었다.

지금 그 쇠뇌가 후 태감을 겨누고 있었다.

후 태감이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한데 어쩐단 말인가······ 고작 1자[尺] 일어났을 뿐인데도 그는 고슴도치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의 몸을 깊숙이 파고 든 쇠뇌의 화살 열 발은 쉼 없이 그의 선혈을 탐했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후 태감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런 후 두 어 번 몸을 팔딱거리고는 눈도 감지 않고 죽어 버렸다.

범한은 냉랭하게 이 모든 걸 지켜보았다. 그는 후 태감이 장 공주의 심복인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직감에 따라, 그리고 아까의 일로 경계심을 갖고 있던 터라 갑자기 일이 터졌음에도 부하들에게 후 공공을 쏘아 죽이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시기이니 범한은 살인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기꺼이 살인을 했고, 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으려 했다.

후 태감의 죽음으로 함광전 안은 놀라 술렁였고, 차분하게 만들어 놓았던 국면이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함광전 밖에 있는 시위들도 긴장하기 시작해 함광전 방향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하지만 범한은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황태후의 목에 겨누고 있던 검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고 현장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그러자 범한의 눈빛이 닿는 곳마다 그 누구도 감히 범한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범한이 황태후 옆에 앉았다. 그런 후 고개를 숙이고 기를 운기 해 후궁 각처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귀담아 들었다. 세 개 조도 강한 저항에 부딪힌 게 분명했다. 다행히 후궁에서 고수 태감이 제일 많고 호위 역량이 집중된 함광전을 자신이 맡는 바람에 형과를 포함한 다른 조는 분명 조금은 수월한 것 같았다.

함광전 안은 고요했고, 범한과 황태후는 한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증조모와 손자는 둘 다 타인의 피로 물든 채 냉랭하게 있었다. 할머니와 손자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나란히 앉아 있다니. 그걸 본 이들은 마음이 오싹해졌다.

함광전 밖에 있는 호위병들은 무장해제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한데 범한에게는 이 중요한 일에 투입시킬 여유분의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검은색 옷을 입은 검수들이 이미 함광전 안으로 돌아와 있어 그는 현 상황에 변화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이에 범한은 잠시 후 1 황자가 금군 문제를 해결하면 그에게 호위병 문제는 맡기려 했다.

범한은 그냥 기다리는 중이었다. 부하들과 흑기의 실력을 믿어서였다.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광전 밖 호위들이 갑자기 좀 소란스러워졌다. 진영 뒤쪽에서 무슨 놀랄만한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그러자 범한이 앉은 자리에서 옆에 있는 황태후에게 말했다.

“저들에게 길을 열라고 하세요.”

황태후는 참으로 처량해 보였다. 흰 머리카락은 피로 물든 뺨에 흘러내려 있고, 피가 묻지 않은 반대쪽 뺨은 범한이 세게 날린 따귀 때문에 퉁퉁 부어 있고. 그런 그녀가 범한의 말에 생기 없는 두 눈으로 잠시 밖을 내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광전 호위를 맡고 있던 교대 근무조의 대장이 이를 악 물고 포위하고 있던 곳의 한쪽을 터주었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자객 십여 명이 의복이 흐트러진 비(妃)를 데리고 함광전 안으로 들어왔다.

인원수를 확인한 범한은 심장이 쿵쾅, 하고 내려앉았다. 이번 조에서 사상자가 너무 많이 나와서였다. 이에 범한은 수려하고 아름답지만 비참한 모습으로 있는 비를 보며 가슴이 한 구석이 살짝 저렸다.

함광전으로 온 이는 숙 귀비로 2 황자의 생모였다. 황태후는 태자에게 보위에 오르고 2 황자에게는 신하로 복종하라는 명을 내린 후 태자, 황태후, 장 공주, 숙귀비에게 각자의 궁으로 돌아가도록 지시했었다. 그리고 함광전에는 의 귀빈 모자와 영 재인만 남겨두었던 터였다.

범한이 숙 귀비를 바라보며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기가 앉아 있는 폭신한 침대 옆을 두드리며 말했다.

“마마, 여기 앉으시지요.”

숙 귀비는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하고 심성이 맑고 담백한 사람이다. 더군다나 범한이 황궁으로 찾아오면 잘 지낸 편이었고, 2 황자 때문에 범한과의 사이가 틀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명철보신하며 조용히 사는 사람이라 범한도 그녀에게는 악의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오늘 밤 황궁을 급습하다 보니, 범한이 통제해야 하는 사람 중 하나가 숙 귀비였을 뿐이었다.

숙 귀비는 오늘 밤 자객에게 강제로 잡혀 온 상태라 이제는 죽었구나란 생각을 했었다. 한데 누가 이런 대역무도한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후로는 심하게 화를 내고 욕을 날려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막상 범한을 보니 참을 수 없이 공포감이 밀려올라와 결국에는 하려던 것을 하지 못했다.

숙 귀비의 눈에 낭패에 빠진 황태후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에 오싹해진 숙 귀비는 위축되어 순순히 범한 곁으로 가 앉았다.

숙 귀비가 먼저 붙잡혀 온 건 범한이 예상한 바였다. 동궁과 광신궁은 함광전 다음으로 중요 지역이니, 범한이 보기에도 숙 귀비 쪽 보다는 부하들이 해결하는 데 오래 걸릴 게 뻔했다.

그래서······.

은색 가면을 쓴 형과가 조용히 부하들만 끌고 함광전으로 들어오자, 범한은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상황이 번거롭게 되어서였다.

역시나 상황은 번거롭게 되어 있었다. 형과가 고개를 숙이고 범한 귓가에 몇 마디 속이는데 범한의 낯빛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눈썹 언저리에 수천 근에 달하는 거대 돌덩어리를 얹어 얼굴을 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또 다른 고위급 부하가 보고를 해왔다. 역시나 나쁜 소식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범한이 마음속 고충을 털어내려는 듯 힘껏 미간을 문질렀다. 그리고 한참 후,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 있는 사람을 향해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온 가족이 한데 모이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보니 안 되겠군요.”

지금 범한과 한 침대에 앉아 있는 이는 황태후와 숙 귀비였다. 그리고 그 뒤로 의 귀빈, 영 재인과 3 황자가 앉아 있었다. 가족 중 거의 대부분이 이 침대에 와 있는 거였다. 한편 범한은 절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생사를 통제하는 중이었고, 동시에 세 사람의 목숨도 보호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른 바 온 가족이란 바로 천자의 가족을 이른 것이었다. 현재 경국 황제는 이미 붕어하고 없으니, 천자의 가족은 이 침대에 있는 여섯을 빼면 모자 관계인 황후와 태자, 그리고 광신궁에 있는 장 공주마마만 더 오면 되는 거였다. 범한은 화초를 키우는 농부는 무의식적으로 배제했다. 왜냐하면 정왕야는 이 집안에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깨끗하게 여겨져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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