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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17화 (717/1,108)

717화 결심에서 나온 강인함 (2)

모든 이들의 예측대로 범한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내내 휘몰아치던 기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만 같았다. 범한은 허공에 떠 있었지만, 그래도 갑자기 사라진 것만 같았다.

범한은 아직 날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몸 곳곳으로 내보냈던 패도 정기는 모두 거두어들인 상태였다. 그러자 범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유순하고, 평온하고, 그윽하리만치 편안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지극히 맹렬했다가 갑자기 지극히 유순하게 변하다니! 그것도 완전히 다른 정기가 한 사람의 몸 안에서 나오고 말이다!

너무나도 의아한 상황에 네 명의 고수 태감들의 동공이 수축되었다. 이들은 서로 충돌하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정기를 정점까지 연마한 경우가 있다는 건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 두 종류의 정기가 모두 이 세상에서 최정점에 가 있는 절학(絶學)이라니!

이렇듯 태감들은 속으로는 많이 놀라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격을 늦춘다거나 자신감을 잃은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황태후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늙은 홍 태감 휘하의 궁정 고수 4인방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범한이 아무리 대단해도 자신들 4인방의 연합 공격을 무시할 수는 없을 거라 여겼다.

그렇다. 범한은 대종사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천하에서 몸놀림이 두 번째로 빠른 이에 속했다. 그래서 과거 해당타타도 범한과 처음 겨룰 때 그를 찌르거나 벨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범한은 완전히 다른 각오로 임하고 있고, 또 두 종류의 정기가 점점 융합해 그를 관통하고 있었으니, 과연 이런 범한을 당해낼 수 있을까?

그런 범한을 당해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오죽 하나 뿐이었다.

범한이 공중에서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 그런 후 왼쪽 무릎을 들고 왼쪽 어깨를 돌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반동으로 힘을 받을 수 없는 허공에서 이상하고 신기하게 몸을 옆으로 틀었다.

몸을 떠는 순간 방향이 살짝 틀어진 것이었다.

이에 메마른 첫 번째 손가락이 범한의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었지만, 구름을 쥐기라도 한 듯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이어 메마른 두 번째 손가락이 범한의 왼쪽 팔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소맷자락 속에 엉큼하게 숨어 있던 날카로운 검을 잡고 말았다. 그 순간 검 끝이 소매를 찢고 나와 순수한 정기를 담고 있는 손바닥을 길게 그었다. 그러자 그 안에 있는 새하얀 뼈가 드러나고, 정기의 자극 때문에 붉은 피가 촤르륵 분출되어 범한의 상체는 온통 피로 물들어 버렸다.

한편 메마른 세 번째 손가락은 범한의 오른쪽 무릎을 잡아 그의 옷을 찢어버렸다.

그리고 메마른 네 번째 손가락은······ 공중이 비어버린 탓에 범한의 신발만 잡고 말았다.

* * *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황태후의 동공에서 싸늘한 기운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이내 서슬 퍼런 한기로 변했다.

바람이 훑고 지나간 것 같았는데, 범한의 왼손에 들려 있던 검은 어느새 황태후의 목에 놓여 있었다.

범한의 찢어진 옷소매에서 떨지는 선혈이 황태후의 옷에, 그녀의 얼굴에 똑똑 떨어졌다.

낯빛이 창백한 범한이 양 입술 사이로 선혈을 왈칵 쏟으며 검은색 옷의 절반을 피로 물들였다. 결국에는 네 명의 태감에게 상처를 입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했다.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검 끝으로 함광전 내 모든 이의 마음을 싸늘하게 얼려 버렸다.

* * *

함광전 정전(正殿) 안. 죽음 같은 침묵과 고요함이 흘렀다. 그리고 모두들 놀라 공포에 빠진 눈으로 바로 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지켜보았다. 방안에서는 ‘똑똑똑’, 하고 피가 침대 아래로 떨어지며 내는 소리 말고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범한의 옷에서 그리고 검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황태우의 귓불을 타고 내려갔다. 그런 후 그녀의 한쪽 뺨을 물들이고는 점점 그녀의 옷에 스며들었다.

서늘한 기운을 번쩍이고 있는 검은 이상하리만치 안정적이고 냉혹하게 황태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자객이 황궁 깊은 곳까지 침투한 건 경국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누군가가 검 끝을 황태후의 목에 겨눈 것도 개국 이래 처음 발생한 일이었다.

고수 태감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놀라 제자리에 서 버렸다. 그리고 범한이 황태후를 협박하는 장면을 두 눈을 뜨고 똑똑히 바라보기만 할뿐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다.

이 모든 게 너무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함광전 밖에서 경보 소리가 들리고, 범한이 살신처럼 강림을 해 황태후가 있는 침소까지 들어 와 그녀를 인질로 잡기까지, 모두 숨 몇 번 쉬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앞서 측전에서 범한은 담벼락과 부딪기 전에 먼저 나무문부터 골랐다. 그런 후 그 태감 고수와 손바닥을 부딪치며 싸우고 검을 휘둘러 단칼에 그의 머리를 잘랐다. 그렇게 궁정 고수들의 주의력을 측전에서 정전으로 통하는 긴 복도로 돌린 후에야 그는······ 직접 담벼락을 들이받았다. 이러한 남이 생각지도 못한 모험을 했기에 범한은 고수 태감 넷과 힘겹게 맞선 후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나 빨리 반응하고 결단을 내렸으니, 오늘 밤 범한의 행동은 그야말로 강력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더욱이 깜짝 놀라 지금의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한기가 일었다. 마치 범한이 언제든 장검을 당겨 황태후의 목숨을 끊어버릴 것만 같았다.

한데 범한의 표정은 너무 차분하고 냉담했다. 그래서 검 아래에 있는 이가 천하대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황태후 마마가 아닌 보통 사람인 것만 같았다.

* * *

“바깥에 있는 호위병들에게 멈추라 명을 내리시지요.”

함광전 안에 죽음과도 같은 고요가 흘렀다. 이에 함광전 밖에서 죽이고 참담하게 비명 지르는 소리가 더 명확히 들려왔다. 갑자기 궁궐로 들이닥친 6처 검수들이 대내시위인 호위병들과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범한은 황태후를 검으로 제압한 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리고 조심스레 황태후 뒤로 몸을 숨겼다. 이어 장검을 팔 뒤꿈치로 보내 황태후의 어깨 쪽을 겨누고는 피에 물든 뺨 옆으로 다가가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범한은 차분하게 말했지만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기운을 뿜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황태후가 밖에 있는 호위병들과 함광전 내 고수 태감들에게 공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어쩌면 범한은 정말로 황태후를 검으로 찌를 수 있을 거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황태후는 어찌되었든 일반인은 아니었다.

경국의 황태후는 과거 성왕비였을 때부터 여러 왕조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걸 보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심성이 차분했으며, 결코 평범한 노부인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십 수 년 동안 황후와 황태후 자리에 있으면서 황궁 깊은 곳에 기거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녀는 위엄과 강력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황태후가 고개를 돌려 범한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녀가 눈을 한 곳에 고정시키고 타고난 위신을 드러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대역무도한 놈! 감히 나를 위협해?”

그녀가 황금도, 옥도 잘라버릴 날카로운 기세로 말하자 함광전 내에 있는 모든 이들이 흠칫 놀랐다.

범한도 슬쩍 가슴이 뜨끔했다. 이처럼 위태로운 상항에서 더군다나 낭패에 빠져 있는 황태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게 나와서였다. 하지만 황태후 입장에서는 자신의 기세를 유지해야 더 많은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는 걸 범한은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사람들이 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일이 뒤이어 일어나고 말았다. ‘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태후가 범한에게 따귀를 올려붙인 것이다.

범한의 얼굴에 불그스름하게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 황태후는 자기 목에 겨눠진 싸늘한 검 끝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오로지 멸시와 몰염치하다는 생각만 가득 담은 눈으로 범한을 주시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기어코 나를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함광전 내부에 있던 이들은 놀라 멍하니 있었다. 범한이 날카로운 검으로 위협 하고 있는데 황태후께서 이리도 횡포한 방법으로 도발을 하시다니. 설마 범한이 자신을 죽인다 해도 두렵지 않으시다는 건가? 몇몇 상궁들과 궁녀들은 놀라 기절해 버렸다.

그런데도 황태후는 여전히 싸늘하고 사나운 표정으로 범한을 응시했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태후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노부인이 왜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범한이 황궁을 통제하려면 지금 그녀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더욱이 그녀는 황태후였다. 범한과 혈연관계에 있는 친 할머니란 말이다. 이에 그녀는 이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범한이 감히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걸 정확히 꿰뚫었다. 설령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녀 입장에서는 기세를 유지해야 반전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거였다.

* * *

황태후가 이상하리만치 사납게 범한의 따귀를 때릴 때, 함광전 안에서 갑자기 이변이 발생했다. 함광전 주변에서 줄곧 조용히 있던 후 태감이 갑자기 날아왔다.

그것도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게 날아왔다. 그러고는 곧장 범한과 황태후에게 향한 게 아니라 범한이 부딪혀서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향했다.

범한의 동공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하지만 황태후 곁은 감히 떠날 수 없어 그는 후 태감과 다른 고수 태감들을 그냥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구멍 근처에서 ‘팍, 팍’ 하는 소리가 몇 차례 울리더니 몇 명이 저지당했다.

후 태감의 손바닥이 3 황자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의 귀빈은 어느 태감에 의해 저지당한 상태였다.

영 재인은 검은색 비수를 휘둘렀지만 오히려 태감들에게 포위만 당하고 말았다.

* * *

“작은 공작 어르신, 섣불리 나오지 마시지요.”

후 태감이 3 황자의 목을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말했다.

범한의 손은 이상하리만치 안정적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후 내감을 바라보고 있는 범한의 눈동자에서 이채가 스쳤다. 요 태감 바로 아래에 있는 두 번째 수령 태감의 무공이 이렇게나 고강한 줄은 범한으로서도 처음 안 것이었다.

지금 상황은 범한이 황태후를 통제하고 있는 중에 후 태감과 다른 태감들이 범한이 신경을 쓰고 있는 세 사람을 통제하게 된 거였다.

그렇다면 정세는 어떻게 바뀔까?

모두들 범한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후의 표정은 싸늘했다. 하지만 옷으로 스며들고 있는 핏물 때문에 살짝 추워진 그녀는 손가락을 살며시 떨고 있었다.

범한은 고개를 숙이고 황태후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너무 오래 침묵만 유지할 수 없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모든 태감 고수들이 이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경계하기 시작했다.

범한이 고개를 들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후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황태후의 노쇠한 뺨을 내리쳤다.

* * *

‘짝!’,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황태후가 앞서 범한의 뺨을 때린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울렸다. 황태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 어르신의 치아가 모두 흔들리고 있을 수 있었다.

함광전 내 모두가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쩍 벌어졌다. 방금 전 범한이 황태후에게 날린 따귀가 자신의 얼굴에도, 자신의 심장에도 떨어진 것처럼 같았다.

그런데 범한이 누구의 뺨을 때린 거지? 황태후이자 황제 폐하의 생모니, 바로 범한의 친 할머니 아니던가! 그런데도 범한이······ 그런 분의 따귀를 때리다니!

이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굴욕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번 행동으로 따귀도 때릴 수 있으니 죽일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은 거였다.

범한이 황태후의 부어오른 반쪽 뺨을 주시하며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놓아주라 하시고, 공격을 멈추시지요. 한 번 더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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