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화 결심에서 나온 강인함 (1)
범한이 내관 몸에서 자신의 장검을 뽑았다. 그리고 곁눈질로 영 재인을 잠시 바라보았다. 영 재인이 안도의 웃음을 짓고 있자 범한은 저도 모르게 웃기 시작했다. 범한이 장화 안을 더듬어 검은색의 비수를 꺼냈다.
3 황자의 비수는 진랑(辰廊) 옆에 있는 숲에 숨겨져 있었다. 이에 3 황자는 스승이 비수를 꺼내자 자신에게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머니를 보호하며 모시고 나아가라는 뜻으로 말이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범한이 비수를 3 황자가 아닌 영 재인에게 건넨 것이었다.
영 재인이 가느다란 검은색의 비수를 쥐었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잠시 영웅의 기개가 뿜어져 나왔다. 과거 북벌 전쟁 때 살아남은 여자 노예 아니던가. 그러니 그동안 철혈의 나날들을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범한은 아녀자들과 아이를 데리고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곧장 편전 쪽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이 문은 궁 밖이 아닌 함광전 전전(前殿)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궁 밖으로 나가는 게 쉽지 않다면, 궁궐 안으로 들어가는 편이 더 나았던 것이다.
* * *
나무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나무문이 느닷없이 무슨 종잇장처럼 거대한 힘에 의해 산산 조각 나 하늘 가득 날리었다.
나무 조각들이 아직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인데 범한의 손바닥은 이미 태감의 손바닥과 맞대고 있었다. 범한의 끄응 소리와 함께 둘의 정기가 서로 충돌했다. 고작 손바닥 하나를 서로 마주쳤을 뿐이지만, 범한은 앞에 있는 태감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궁정을 호위하는 사람 중에는 과연 와호장룡이 많았다. 늙은 홍 태감이 길러낸 제자와 손제자이니 과연 호락호락한 이들이 아니었다.
태감의 눈, 코, 잎, 귀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체내에 패도의 정기가 휩쓸고 지나가다 보니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전전에 있는 고수와 황태후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단순히 범한을 잠시 묶어 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가 시간을 끌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양 손바닥 사이에서 먼지가 일었다. 무공이 고강한 태감의 얼굴 쪽으로 곧바로 독무가 발사된 것이었다.
태감의 낯빛이 변했다.
이어 범한이 오른손을 잠시 떨었다. 그러자 장검이 웅웅, 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 쪽에서 발사되었다. 이는 실력 차이였고, 태감은 패도의 정기와 독연기의 합동 공격에 더 이상 반격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결국 그는 눈꺼풀 앞에서 반짝이는 빛을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범한이 왼쪽 팔목을 뒤집어 천자의 검을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런 후 고수 태감을 더는 쳐다보지 않고 양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이어 그는 거대한 새가 숲으로 날아드는 것처럼 몸을 내던졌다.
범한은 더 이상은 얼마나 더 많은 고수가 튀어나올지 모르겠는 길로는 가지 않으려 했다. 이에 아예 측전 담벼락을 들이받아 버렸다.
‘쿵!’,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무토막을 쌓아 만든 담벼락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범한은 뒤쪽에 있는 세 사람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큰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때, 문 입구에서 꼿꼿이 서서 버티던 고수 태감의 목덜미에서 ‘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피가 줄줄 흐르더니 목이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의 귀빈 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영 재인이 어두운 얼굴로 범한이 건네 준 검은색의 가는 비수를 든 채 놀란 모자를 데리고 큰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범한이 왜 이리 서두르는지, 그리고 왜 구멍을 뚫어 전전으로 들어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범한이 국면을 통제하기 전까지 이 세 사람의 안위는 모두 자신이 들고 있는 이 비수에게 달려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 * *
돌격을 위해 필요한 건 뭘까? 바로 전광석화 같은 빠른 속도,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몰아치는 천둥 번개 같은 움직임이다. 범한의 오늘 밤 행동은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그 모든 걸 관철했다. 입궁한 후부터 호위병들에게 발각될 때까지, 범한 및 그의 부하들은 속도를 높여 광풍처럼 후궁을 휩쓸고 있었다.
범한이 돌난간을 밟고, 황금 벽돌을 부수고, 전각 안으로 들어가 보이는 모든 이들을 해치워 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번개가 내리치는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 졌다. 만약 호위병이 내지른 첫 번째 고함에서부터 시간을 계산해 본다면, 손뼉을 십여 차례 치는 동안 함광전의 핵심이 되는 전각을 휩쓸어 버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번개 치는 듯한 속도였으니, 적만 대응을 못한 게 아니라, 심지어는 범한 자신에게도 다른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그는 순전히 수년 동안 수집해 온 황궁 관련 정보, 황궁 내 첩자들, 범인을 뛰어 넘는 직감에서 나오는 영민함에만 의지해 적을 해치워버린 것이었다.
물론, 이번 행동에서 그가 가장 의지한 건 평소 부족했던 용기였다. 그건 바로 사지로 몰린 후에야 비로소 갖게 된 오만할 정도의 기세였다.
범한이 최대한의 속도로 함광전을 정리할 때 그를 따라 온 오육십 명의 6처 검수들은 어둠속에서 부채꼴로 흩어져 함광전을 포위해오고 있었다. 한데 이들은 일부러 속도를 늦춰 행동한 거라 바로 때맞춰 함광전을 포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는 범한이 매우 정확히 계산을 한 거였다. 비록 후궁을 호위하는 이들의 역량과 반응 속도를 저평가 한 건 있었지만, 그래도 호위병인 대내시위들의 속도며 실력은 50, 60명의 6처 검수들이 막아내기에는 딱 적당한 정도였다.
감찰원 검수는 암살에 능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호위병인 대내시위는 경국 내 무공 실력자들 중에서는 정예였다. 비록 황가를 대신해 범건이 몰래 키워낸 장도의 호위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그래도 무력에서 만큼은 대단히 강력한 수준이었다.
함광전 밖에서는 이곳저곳에서 피 튀기는 싸움이 이루어졌다. 검과 칼이 부딪힌 순간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피를 뿜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불과 숨 몇 번 쉬는 사이, 수십 명의 검은색 옷을 입은 검수가 공격권을 구축하고 압박을 당해 함광전 방향으로 적지 않은 거리를 물러났다.
한데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들 검수들의 후퇴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비록 호위병들의 공격에 매번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검수들은 공격권을 점차 축소하면서 함광전은 갈수록 견고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방어권이 축소되면 힘이 집중되므로 반격하는 역량은 더 커지게 된다. 이에 현장에 많은 사람이 쓰러지게 되었고, 그 즈음이 되자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은 함광전 정문을 막아서게 되었다. 그리고 안에서 도망가고 싶어도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
더군다나 지금 함광전 안은 절대 조용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는 범한이 계획한 것으로, 사방에서 어지럽게 흘러들어 둘러싼 후 중심에서 꽃을 피우는 전술이었다. 그래서 감찰원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점점 늘어나는 호위병들의 주위를 어둠을 틈타 맴돈 후, 현재 황궁의 중추인 함광전 안에서 선명하게 독한 꽃을 피운 것이었다.
그러니 이 꽃은 반드시 범한이 자기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 * *
후궁에서 변란이 인 초기에 호위병과 궁정 고수들의 대단히 신속하게 반응했지만, 궁중 귀인들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었다. 이에 함광전 내의 나이든 상궁들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소리 없이 욕을 해댔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였다.
일부 행동이 민첩한 어린 궁녀들은 침대에서 나는 기침 소리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경국의 실제 여주인을 침대에서 부축해 일으켰다.
황태후는 요 몇 년 동안 두통을 앓던 터라 이마에 황색의 띠를 둘러 묶고 있었다. 살짝 지친 모습으로 그녀가 궁녀의 품에 기댔다. 하지만 눈에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반짝 스치고 지나갔다.
노인은 청력이 좋지 않다. 그래서 측전 꼭대기가 범한에게 부서질 때 난 커다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범한이 순식간에 여덟 명을 연달아 죽이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 노부인은 오랫동안 황궁에 거주하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세찬 바람과 커다란 파도를 겪은 터였다. 그러니 음모로 점철된 정치에 익숙한 그녀는 즉각 경계에 들어갔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싸늘함이 스쳤다. 그녀가 궁녀의 품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궁문을 닫아라! 전부 후퇴하라 하거라!”
황태후의 반응은 신속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궁에서 난이 일었음을 알아차린 순간 자신이 보유한 모든 무력을 한데 모아 자기 주변을 감쌌다. 그녀는 자신의 역량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적이 입궁을 한 이상 제1 목표는 자연스레 그녀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반응은 그녀가 자기 아들의 유고 소식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매우 간략하고 정확해 누가 봐도 정말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다만 오늘 밤 그녀는 실망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녀가 역량을 모으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며 함광전 한가운데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다.
함광전 밖에서 호위병과 6처 검수가 교전을 치루는 소리가 처음으로 났을 때 함광전에서 비스듬히 뒤쪽으로 있는 담벼락에서 갑자기 거대한 울림소리가 났다.
나무토막이 여기저기 날리고 커다란 구멍이 생겼으며, 검은색의 형체가 구멍 안에서 날아 들어왔다. 그 형체는 밤중에 움직이는 창룡처럼 순식간에 허공을 스치듯 지나가더니 곧장 황태후의 침대로 향했다.
* * *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는 문과 문의 사이가 아닌 벽이다. 건물 사이가 아무리 멀어보여도 그래도 그 사이에는 한 뼘 정도의 벽이 있기 미련이다. 그러니 이 벽을 뚫는다면, 건물에서 건물로 이동하는 건 지척지간이 될 수도 있는 거다.
한데 이 세계에서 범한처럼 행동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패도의 정기를 전신으로 보낼 수 있고, 또 동시에 천일도의 순수한 심법으로 심맥을 보호하고. 그런 후 패도의 정기에게 먹히는 걸 방지한 상태에서 자신을 거대한 망치로 변화시켜 두툼한 담벼락을 들이받아 깨버리고 말이다!
온통 검게 차려 입은 범한이 광풍과 우레와 같은 기세로 황태후에게 돌격했다.
범한이 달려가는 동안 공기 중에서는 스산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그의 속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정도까지 올라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사이 범한의 옷깃과 스치기라도 한 상궁과 궁녀는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도의 정기 때문에 뒤로 나가 떨어졌다. 이에 그녀들은 옷이 엉망이 된 채로 피를 흘리며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때, 그동안 황태후의 침궁을 지키고 있던 고수 태감들이 드디어 사방에서 소리를 지르며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의 말라빠진 손바닥 네 개가 활짝 펴지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범한의 몸을 움켜쥐려 했다. 그 모습은 마치 고목이 꽃을 피우며 숲 속의 거대한 용을 속박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네 개의 마르고 노쇠한 손바닥에서 얼마나 연마했는지 모를 순수한 정기들이 뿜어져 나왔다. 황태후가 영 재인의 생명을 가지고 강력한 군을 쥐고 있는 1 황자를 위협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들이 강력한 무공으로 함광전을 수호하고 있어서였다.
담벼락에서 종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황태후는 이미 고개를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때마침 범한과 고수 태감이 맞서는 장면을 보게 되어 그녀의 눈은 싸늘했지만 그래도 자신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마치 천신 같은 범한이 곧 시체로 변할 거라 확신하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