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화 달빛 아래에서 문을 열어 맹렬하게 돌진하다 (3)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2백 명이 무수히 많은 가닥이 되어 유령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화살표를 따라 후궁 각처를 덮쳤다.
범한은 함광전 방향으로 최대 속도로 나아갔다. 그리고 꽃밭, 나무 숲, 호수, 정자를 지난 후 몇몇 호위병들과 맞닥뜨렸다.
‘병 당번인 칼을 찬 호위병들이로군.’
범한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한 호위병들을 보지도 않고 지나치면서 생각한 말이었다. 지금 이 구역에서 교대 근무와 순찰에 들어간 호위병들은 병 당번으로, 녀석들은 실수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범한이 이들 호위병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건 자신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이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독에 중독이 된 건지, 아니면 저주에라도 걸린 건지 모르겠지만, 대 태감이 궁문을 열 때도 그곳으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던 시위들은 깜짝 놀라 눈동자만 굴릴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들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쩐지 대 태감이 범한에게 후궁 궁문을 열어줄 때 너무 순조롭다 했더니!
정말 이상한 광경 아닌가. 황궁 호위를 책임지는 이들이 눈앞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자가 휘리릭 지나가는데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니!
척척, 하는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범한을 따라오는 이중 맨 뒤쪽 있는 6처 검수 둘이 쇠꼬챙이를 꺼내들고는 호위병들의 목을 깔끔하게 따버렸다. 그리하여 이 악몽과도 같은 심리적인 곤경 속에서 드디어 그들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다시 나무들을 지나고, 화원, 호수, 정자를 지났다. 그러자 함광전이 눈앞에 나타났다.
범한이 손을 흔들어 암기로 쓰는 쇠뇌를 발사했다. 철야 중이던 내관이 범한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화살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 * *
범한은 속도전을 펼쳐야 했다. 빠른 속도로 돌격해 상대를 제거해 감으로써 궁궐 내 모든 이들을 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범한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약물은 일반 호위병을 위한 것으로 저들이 자신을 발견할 시간을 조금 늦춰주는 역할만 할뿐이었다. 그렇기에 범한은 자신이 황태후의 머리맡에 가기 전에 데리고 들어온 2백 명이 단 한 명도 들키지 않을 거란 헛된 바람 같은 건 갖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이기 때문이었다.
함광전과 쏜살처럼 다가오고 있는 한밤의 살수 간의 거리가 30장도 안 되던 때였다.
측편 후방 멀리에서 갑자기 놀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병사가 칼로 맞서는 금속의 소리가 수차례 났다. 범한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광신궁 방향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니, 그렇다면 어둠을 틈타 호위병인 시위의 거처로 공격하러 간 부하들이었다.
한데 범한은 순간 움찔해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드디어 종적을 들켜 버려서였다.
“쏘고 흩어져!”
범한은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오른손 주먹을 꽉 쥔 후 신속하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딱 봐도 지령이었다. 그러자 평소 훈련이 잘 되어 있던 감찰원 6처 검수가 이내 범한 뒤쪽에서 흩어졌다. 그리고 함광전 옆에 자리 잡은 구불구불한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하며 수없이 많은 곡선이 되었다. 이들은 이렇게 길을 돌아 나무를 엄폐물로 삼으며 싸늘한 궁전을 향해 내달렸다.
한데 제일 뒤쪽에 있던 감찰원 검수가 맹렬한 기세로 잠시 멈추어 서더니 쇠꼬챙이를 땅속에 박아 놓고는 품에서 작은 대롱을 꺼냈다. 그런 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밝게 떠 있는 달을 잠깐 보고는 있는 힘껏 대롱에 달린 것을 잡아당겼다.
하늘로 쏘아 올린 연화(烟花: 불꽃, 폭죽)가 조용하고, 깊은 어둠에 휩싸여 있던 황궁을 밝게 비추었다. 그리고 경도 곳곳에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명확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두들 은신을 풀고 정식으로 급습에 돌입했다.
* * *
칼 한 자루가 날아 들어와 감찰원 검수의 오른쪽 어깨를 베었다. 한데 검수는 칼에 베여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피하지도, 연화를 손에서 떼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끄윽’ 소리와 함께 땅에 꽂아 두었던 쇠꼬챙이를 왼손으로 뽑아 들고는 옆에서 달려드는 호위병 둘을 단번에 해치워 버렸다.
이제 범한과 함광전과의 거리는 고작 10장 정도. 그러니 그에게는 충성스러운 부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싸늘하게 함광전만 주시했다. 한데 안쪽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아 범한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오싹해졌다. 후궁 쪽의 방위력과 반응 속도가 그의 계산을 훨씬 상회하고 있어서였다.
빨리, 조금 더 속도를 내야 해!
사방에 있는 호위병들이 대응에 나선 것 같았다. 그 순간 범한은 함광전을 마주한 채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몸 안의 살기를 몽땅 끌어올렸다. 체내 패도의 정기를 경맥이 용납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잠깐 끌어올려 한 발로 전각 측면에 있는 돌난간을 밟았다.
돌난간이 산산조각 났다.
범한은 거대한 반동을 이용해 새카맣고 거대한 새처럼 날아올랐다. 그리고 달빛 아래에서 거칠고 광폭한 자태로 함광전 위쪽으로 날아올라 자신의 결심을 드러내 보였다.
최고점에 다다르자 범한은 정기를 서서히 거둬들였다. 그러자 몸이 아래로 떨어지려 했고, 이에 그는 그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을 횡으로 휘둘렀다. 대벽관을 시전 할 때의 기세로 자신의 몸을 3할 정도 횡으로 이동시킨 후 함광전 유리기와를 손바닥으로 쳤다.
단 한 번 내리쳤을 뿐인데 유리기와가 이곳저곳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한데 달빛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라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순간 함광전 전체가 부르르 떠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도 범한의 속도를 이길 자는 없었다. 그리고 전례 없는 기세로 나선 범한을 감히 막아설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손바닥을 한 차례 내리치면서 얻은 힘으로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거대한 새가 날개를 활짝 편 것 같은 자세로 함광전 꼭대기까지 올라가 정기를 온 몸으로 보낸 후 아래로 낙하했다.
‘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범한의 패도 정기 때문에 함광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함광전 궁녀가 깜짝 놀라 첫 번째 등불을 켰을 때였다. 온통 검게 차려입은 범한이 바위덩어리처럼 함광전 뒤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의 곁에는 부서진 기와 때문에 생긴 먼지가 가득했고, 그의 발아래에는 청석판이 잘게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범한의 손에는 천자의 검이 들려 있었다.
* * *
어두컴컴하지만 그래도 등불이 켜졌다. 오늘 밤 함광전 측전(側殿)을 밝히는 첫 번째 불빛이었다. 희미한 불빛이 탁자 위 황궁 용 등잔에서 새어 나오자 방안은 이내 우울하고 슬픈 곳처럼 변해버렸다. 그야말로 궁전 꼭대기에 난 큰 구멍에서 들어오는 달빛보다도 못한 등잔불이었다.
궁녀가 잔뜩 공포에 질린 얼굴로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범한을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려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슥, 소리와 함께 범한이 양발을 잘못 디뎌 순식간에 바보처럼 여덟 걸음을 걸은 후 방 한 가운데에 있는 궁녀의 목구멍에 단번에 칼을 찔러 넣어서였다.
피가 여기저기 튀자 범한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팔목을 살짝 돌려 들고 있던 천자의 검을 다시 꺼냈다. 그런 후 겨드랑이 쪽으로 괴상하게 검을 넣어 내관의 목구멍을 찔렀다.
범한은 다시 급히 뒤로 세 걸음 후퇴해 왼발 발끝으로 중심을 잡고 무용수처럼 멋들어지게 회전을 했다. 손에 들린 천자의 검이 싸늘한 빛을 발했다. 그리고 회전축을 따라 몸 앞 수 척 안쪽에 둥글게 차가운 원을 그었다.
놀라 달려온 내관과 궁녀들은 검의 빛이 닿을 때마다 모조리 고꾸라져 버렸고, 바닥은 온통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오른발이 다시 청석판을 밟자 바닥석이 잘게 깨져버렸다. 그리고 범한의 몸은 마치 거대한 새가 낚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괴이한 자세로 훅 뒤로 빠져버렸다. 그런 후 범한은 누군가의 품속으로 사납게 파고들어 그의 골격을 산산조각 내놓았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오른쪽 팔에 용수철이라도 단 듯 팔꿈치를 튕겼다. 그러자 천자의 검이 손에서 빠져나가 우측에 있던 사람의 가슴으로 곧장 향했다.
검을 쥐고 있던 손이 자유로워지자 오른쪽 주먹이 맹렬하게 좌측을 공격했다. 그리고 단 일격으로 마지막 사람을 바닥으로 눕혀 버렸다. ‘파닥!’,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은 범한의 손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겁게 바닥으로 내리꽂혔고, 그의 머리통은 깨진 수박처럼 짓이겨져 있었다.
연달아 여덟 명을 순식간에 처리한 것이었다.
* * *
난폭하게 함광전으로 뛰어든 범한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싸웠다. 천자의 검, 패도의 정기를 최상의 법력을 지닌 영혼처럼 만들어 잠깐 사이에 실내에 있는 모든 적의 생명을 강탈해 버렸다. 이에 상대방은 찍소리도 못 내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범한의 검법은 사고검을 계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고검의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는 천도 살의(天道殺意)는 줄어들어 있는 반면, 그림자가 지닌 음산함과 차가움은 많이 들어 있었다.
범한의 손바닥을 사용하는 기술은 섭씨 가문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하지만 섭류운처럼 바다 위를 떠도는 담담하고 멋스러운 맛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패도의 정기로부터 자연스레 흘러나온 장렬한 느낌이 많았다.
하여 이런 기술들로 공격을 했는데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 * *
측전에 있는 사람 중 죽어 바닥에 있는 이들을 제외하면, 이제 의 귀빈 모자와 영 재인만 남은 거였다. 오늘 밤 영 재인은 3 황자의 상처를 보러 찾아 왔다가 자신의 침소로 돌아가지 않아 범한에게 큰 편의를 제공해 준 터였다.
이 세 귀인은 오늘밤에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이 천신처럼 쳐들어오자 이들은 제일 먼저 얇은 사 뒤쪽으로 숨어 범한의 일거수일투족을 긴장한 채 주시할 수 있었다.
한데 그들이 아무리 범한을 깊이 믿는다고는 해도 방금 전 광경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들이 본 작은 범 대인은 뜻밖에도 폭력적인 방법으로 단시간 안에 자신들을 지키고 있던 궁궐 내 사람들을 몽땅 제거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얇은 사를 젖히고 세 사람이 걸어 나오는데, 범한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놀란 건 매 한가지였다. 그들 눈에 비친 범한은 어떤 면에서는 대동산 사건 이전의 범한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의 귀빈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다. 범한이 후궁까지 들어와 자기네 모자를 구했으니 앞서 저녁 때 승평이 말했던 걱정은 사라지고 없는 거였다. 함광전에서 감시를 받으며 지내고 있던 의 귀빈 모자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서 밤중에 갑자기 구원의 별이 나타나 준 것이었다. 이에 긴장이 풀린 의 귀빈은 방안 가득 널린 시체와 잘려나간 사지를 보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했다.
그러자 3 황자 이승평이 옆에서 어머니를 부축하고는 감격한 눈빛으로 자기 스승님을 향해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가는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때 함광전 측전 안에서는 밖에 얼마나 많은 호위병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지, 전전(前殿) 있는 고수 태감들까지 와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범한은 거칠게 돌격을 한 덕에 세 사람과 무사히 만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을 완벽히 구출한 건 아니므로 자신들이 여전히 사지에 몰려 있다고 보았다.
이에 범한은 셋째나 마마들과 쓸데없는 잡담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냉정하게 말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뚫고 나갈 것입니다.”
‘뚫고 나가다니. 말이야 쉽지.’
범한이 여기까지 데려 온 2백 명이 온 후궁을 통제하려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황성 밖에 있는 금군은 안쪽 상황이 해결되었는지, 그리고 위험 국면이 해결되었는지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