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화 결전의 밤 (1)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승평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면서 비수를 꽉 움켜쥐었다. 얼굴이 점점 검게 변하는 두 태감을 바라보던 그가 결국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승평은 만약 비수에 독약이 발라져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독약을 바른 비수가 있다는 걸 태감들이 미리 알았다면, 그가 아무리 발버둥을 쳤어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죽은 태감들 옆에 앉아 있던 그는 이제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암살당할 위험에 처했고,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일찍 철이 든 황자라 할지라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12살 이승평이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옆에 있는 시체 두 구를 바라보는 그의 앳된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두려움, 놀람, 힘겨움, 약간의 흥분 등 온갖 감정이 섞여 있던 얼굴에 점차······ 침착함과 분노만 드러났다.
침착한 분노.
누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까?
이승평은 확실히 누구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형들이 이 일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엉엉 울면서 손에 든 비수를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둔감한 기계처럼 비수로 죽은 태감들을 치르자 검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태감들을 확실히 죽이기 위해 칼로 연신 찌르면서도 그는 독이 묻은 핏방울이 자신의 몸에 묻지 않도록 조심했다.
잠시 뒤 울음을 멈춘 그가 복도 기둥에 기대 몸을 일으키고는 텅 빈 복도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입술을 떨며 크게 소리쳤다.
복도 끝에는 냉궁이 있었고, 그곳에는 항상 궁녀가 있었다.
* * *
“어마마마, 소자는 어마마마를 아무도 찾지 않는 냉궁에서 지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초가을이라 아직 날씨가 춥지 않았지만, 함광전 뒤 곁채 안에서 3 황자는 이불에 꽁꽁 싸여 누워 있었다. 그가 울고 있는 의 귀빈을 바라보며 작지만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 죽고 싶지 않으니 어마마마도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의 귀빈이 자기 아들을 꽉 끌어안았다.
냉궁에서 소식이 온 뒤에야 사람들은 3 황자가 몰래 함광전을 빠져나갔다가 자객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에 분노한 황태후는 황궁 안 방어를 강화하라 지시하고, 함광전 안의 태감과 궁녀들뿐만 아니라 의 귀빈까지 호되게 질책했다.
한참 동안 옆을 지키던 황태후가 떠나자 이승평이 살며시 눈을 뜨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 말을 내뱉었다. 그는 황태후가 무서워 직접 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던 것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의 귀빈이 자기 아들을 끌어안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함광전 안에서 황태후 마마의 보호를 받는 이상 아무도 우리를 건들지 못할 거다.”
그 말이 이승평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어머니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거라는 걸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 귀빈이 고개를 숙여 자기 아들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렸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가 결국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를 공격한 태감들을······ 어떻게 죽인 거냐? 누가 보낸 사람인지 알고 있니?”
“모릅니다.”
이승평은 비수와 관련된 일은 말하지 않았다. 태감들을 죽이고 도움을 요청할 때 그는 비수를 복도 옆에 있는 나무에 숨겼다. 그가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갑자기 죽었습니다······. 소자도 누가 소자를 죽이려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조용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의 귀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곁채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태감과 궁녀들이 많았기에 그녀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폐하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함광전에 갇힌 그녀와 3 황자는 밖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범한이 반역자로 몰렸고, 범씨 집안과 유씨 집안이 궁정의 통제를 받고 있으며, 자신들을 바라보는 황태후 마마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궁전을 찬찬히 바라보던 의 귀빈은 뼛속까지 시린 한기를 느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함광전도 안전한 곳이라 할 수는 없어.’
바로 그때 중년 부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1 황자의 생모인 영 재인이었다. 의 귀빈이 재빨리 일어나 인사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황태자도 찾아와서는 아우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전한 뒤 누가 한 짓인지 반드시 밝혀내겠다고 약속했다.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었지만 의 귀빈의 귀에는 전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밤이 되고 사람들이 떠난 뒤 조용해진 방안에서 의 귀빈이 이불 안에 있는 아들을 향해 말했다.
“황태자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걸까?”
3 황자가 암살당한다면 경도에 있는 세력 중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볼까? 의 귀빈은 한 사람의 이름을 즉각 떠올렸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생각에 잠긴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승평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스승님은 아닙니다.”
그렇다. 의 귀빈은 범한을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 조정 대신 중 대부분이 범한 쪽에 서서 유훈과 대의명분을 가지고 황태자를 공격하고 있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황궁에 있던 3 황자가 암살을 당한다면 황태자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여론도 급격하게 안 좋아질 것이었다.
게다가······.
범한이 정말 황태자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3 황자를 뭣 하러 남겨두려 하겠는가?
의 귀빈이 아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가 네 스승이긴 하지만 친형제는 아니지 않니.”
“스승님은 저의 친형님이십니다.”
3 황자가 입술을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의 귀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황궁에서 형제나 사제의 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두 태감이 증표를 보여줘서 속았다면서······ 그의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증표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이니?”
증표는 사실 평범한 물건이었다. 바로 강남 항주 서호 옆에 있는 팽씨 장원에서······ 3 황자가 가장 즐겨 보았던 책의 일부분이었다.
이승평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저는 스승님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스승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 저를 죽여 이용하려 하셨다면 증표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쉽게 허점을 드러낼 분이 아니시니까요. 스승님은······ 단 한 번도 이처럼 허술하게 행동하신 적이 없습니다.”
의 귀빈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위급한 상황에 범한 외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녀 역시 아들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작은 범 대인이 우리를 구하러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의 귀빈이 이렇게 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작은 범 대인이 황태자를 계속 궁지에 몰고 간다면 황태자는 결국 피바람을 일으켜 억지로라도 군신들을 굴복시키려 하겠지. 그때가 되면 우리 모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
* * *
함광전에서 모든 사람들이 침묵한 채 궁전은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황태자와 황후는 각각 황태후 옆에 앉아 어깨를 안마하고 있었다. 이 두 모자의 상황은 의 귀빈 모자의 상황보다는 훨씬 편해 보였다.
“고모.”
황후가 황태후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히 말했다.
“셋째가 명이 긴가 봅니다······.”
그녀가 다시 황태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남다니 범한, 그 역모자가 셋째에게 많은 걸 가르쳤나 봐요.”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할마마마의 태양혈 부근 피부가 살짝 팽팽해지는 걸 바라봤다. 자기 어머니의 바보 같은 말이 황태후의 화를 돋우자 그가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대꾸했다.
“아우가 살았으니 그걸로 된 겁니다. 다른 일까지 거론한 필요는 없습니다.”
몇 번 깊이 숨을 들이쉬며 화를 가라앉힌 황태후가 황태자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그녀가 속으로 손자들이 많이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건 황태자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황태후는 자신의 선택을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경국은 황태자처럼 효도와 공경을 아는 사람이 책임져야 했다.
“너희들도 나가봐라.”
정신의 피로가 최고조에 달한 황태후가 기침을 하며 손을 내젓자 시중을 들고 있던 태감과 궁녀, 유모들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는 황후까지 나가자 안에는 황태후와 황태자만 남게 되었다.
황태후가 몸을 돌려 생기 없는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희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내가 노쇠한 몸임에도 모든 걸 직접 처리하고 있다는 걸 네가 알아주는 것 같아 기쁘구나.”
황태자가 아무 말 없이 한숨을 쉬며 황태후가 말하는 형제 중 범한도 끼어 있을지 생각했다.
마치 황태자의 생각을 읽은 듯 황태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제왕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내리고 관용을 베풀어야 할 때는 과감히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법이다······. 범한은 네 부황을 암살한 극악무도한 죄인이고, 또 그 애의 성은 이씨가 아닌 범씨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황태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자도 몇몇 사람들은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범한을 아직도 잡지 못한데 애석하구나.”
황태후가 눈을 살며시 감으며 계속 말했다.
“서무를 비롯한 대신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형부 감옥 안에 있습니다.”
황태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감찰원 감옥에 넣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대신들이 어째서 범한의 속임수에 속아 굴복하지 않고 멍청하게 고집을 피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황태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속임수에 속았다고? 너희 부황께서 책만 파고는 서생들을 너무 아껴주시는 바람에 방자해져서 그런 거지······. 어쩌면 범한이 가지고 있다는 유훈을 봐서 강경하게 버티는 걸 수도 있고.”
그 말을 들은 황태자는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이내 평정심을 회복하며 말했다.
“유훈 같은 건 애초에 없었습니다.”
“그래, 없었지.”
황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그럼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퍼뜨려 황가의 대신들을 속인 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느냐?”
황태자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그는 황태후가 자신에게 결심을 내리라 강요하고 있음을 알고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죽여야겠지요.”
“그래, 맞다.”
황태후의 안색이 점점 차갑게 변했다.
“안정을 원한다면 사람을 죽이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다만 감찰원에서 황명을 받으려 하지 않아 난처합니다.”
황태자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오늘 경도에서 많은 대신이 암살을 당해 민심이 흉흉하고 조정은 혼란스럽습니다······. 범한은 어둠 속에 숨어 날뛰고 있는데, 소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범한은 피를 뿌리고 머리를 베어 조정 대신들을 협박해서 경도를 큰 혼란에 빠뜨리려 하는 게다.”
황태후가 자신의 적손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말하고 싶은 걸 말해보렴.”
황태자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쳐들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 황태후 마마께 경도에 군을 불러들여······ 강력하게 진압해 달라 청하고 싶사옵니다.”
함광전이 다시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황태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태극전에서 안행서가 그 의견을 제시했다가 결국 반대에 부딪혔다는 걸 아느냐?”
황태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하중서 대학사가 모두 감옥에 갇혔는데도······ 고집을 부리는 대신이 더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조정에서 고집을 부린 대신은 관직은 높지 않았지만 특별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로 도찰원 좌도어사 하종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