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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05화 (705/1,108)

705화 누구의 저택일까? (1)

책장 앞에 서서 벙찐 표정을 지은 범한이 은은하게 먹 향기가 나는 책들을 한참을 바라봤다. 그는 기절해 있는 낭자가 어느 집 가문의 규수인지도 알지 못했고, 그녀가 무슨 이유로 자신의 작품을 이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범한은 두 번 살 기회를 얻어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으니 조물주의 은혜를 충분히 받은 셈이었다. 더구나 이 세상에 작품을 널리 알리기까지 했으니 지금 죽는다고 해도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물론 그가 쓴 문장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가 가진 사상이나 이론도 그의 머리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그가 여기 세계에서 쓴 것들은 모두 다른 세계에서 있던 것을 가지고 온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범한의 마음속에는 자긍심이 용솟음쳤다. 그건 두 세계를 하나로 잇고, 어떠한 흔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이었다. 그는 지금 섭경미가 맨 처음 이 세계를 바꿨을 때 느꼈던 감동과 아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창밖은 이미 밤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것이라고는 하늘에 은은히 빛나는 달빛뿐이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저녁밥을 아주 일찍 먹는 데다가 기절해 있는 낭자는 분명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을 테니 지금 종들이 방에 찾아올 리는 없었다. 덕분에 범한은 혼자서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감정을 추스른 범한이 책상 앞으로 걸어가서는 자질구레한 문구가 적힌 종이를 바라보고는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체내에 정기가 충분해 오감이 발달한 덕분에 굳이 불이 밝히지 않아도 되었다.

“모두들 작가가 미쳤다고 말하는 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누가 알겠는가?”

어두운 방 안에서 범한이 종이에 적힌 글자를 작은 목소리로 읽었다.

지금 기절해 있는 낭자는 분명 《홍루몽》에 미쳐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종이에 적힌 글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게 학식 수준도 상당한 것 같았다.

책상을 둘러보던 범한은 한쪽에 붉은색 무언가가 놓여 있는 걸 보고는 호기심에 손을 뻗었다.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이 그의 손에 잡혔다. 크기가 8촌 정도 되는 책은 붉은색 표지에 아무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무심하게 책을 펼친 범한은 속표지에 적힌 ‘풍월보감(風月寶鑑)’이란 글씨를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 책이었지.’

그는 경도에 맨 처음 온 날 일석거를 가던 길에 만났던 책 파는 중년 여인에게 이 책을 구매했었다. 이건 이 세계의 첫 번째 《홍루몽》 해적판이었다.

멍하니 손에 든 책을 바라보던 범한은 이제껏 만나보지 못한 옛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그동안 경도와 강남을 오고 가며 보고 느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난 뒤 자신이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경도의 살벌한 권력 싸움에 휘말려 자신이 처음이 가지고 있었던 명랑하고 밝았던 마음마저 잊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과거와 비교하면 그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저 낭자가 도대체 어느 집안 자제인지 모르겠군.’

손에 든 책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던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의자에 있는 낭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낭자는 상당한 미모를 갖추고 있는 데다가 얼굴 피부가 무척이나 깨끗했다. 더구나 미간에는 창산 정상을 덮고 있는 눈처럼 차가운 기운마저 보였다.

낭자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던 범한의 머릿속에 남들 앞에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는 약약 누이와 지금 황궁에 갇혀 있는 아내 완아가 떠올랐다.

기절한 와중에도 차갑고 고결한 자태를 잃지 않는 모습이 범약약과 임완아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리운 사람들이 떠오른 범한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낭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바로 그때 낭자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이더니 깨어나기 시작했다.

* * *

서서히 깨어나던 손빈아(孫顰兒)는 눈꺼풀이 돌처럼 무거운 느낌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자신이 저녁 식사를 한 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는 것과 잠깐 쉰 뒤 돌아가신 폐하를 위해 내일 정원에서 태울 시를 필사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경도부에서 사람을 잡으러 온 것인지 저택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어느 남자가 난데없이 들어오더니······.

차가운 한기를 뿜어내는 검은색 비수가 보이더니 순간 짙은 피 냄새가 나는 양손이 자신의 입을 막고 귓가에는 남정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귀족집 자제로 곱게 자란 손빈아는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무례한 경우를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자기 방에 쳐들어온 남자가 땀 냄새가 물씬 나는 더러운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자 화도 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숨을 헐떡거리다가 기절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한참을 기절해 있던 그녀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어렴풋하게 어떤 얼굴이 보였다.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춰보니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귀여운 외모를 가진 남자가 밉살스러운 미소를 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을 밝히지 않은 방 안에서 창밖에서 비추는 은은한 달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순수하고 온화해 보였다.

상황을 깨달은 손빈아는 놀라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녀가 겁에 질린 토끼 눈을 한 채 의자 뒤로 가서 숨고는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때 겁에 질린 그녀의 눈빛이 순간 망연자실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속으로 자신의 방에 침입한 젊은 남자가 누구인지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인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오래전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사람 같았다.

조심히 의자 위에 앉은 그녀의 동그란 눈에서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뜻밖에도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범한이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언제든지 손가락으로 경맥을 눌러 기절시킬 준비를 하면서도 의식이 또렷한 인질이 필요했으므로 미약을 사용할 준비는 하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누구세요?”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질문을 내뱉었다. 범한이 갸웃거리며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

“제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 보군요?”

손빈아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잘생긴 청년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보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방에 쳐들어온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면 뭐겠는가?

이에 그녀는 자신이 상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응을 하는 게 부끄럽게도 하고 어이도 없어서 양손으로 몸을 끌어안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이 누구든 상관없으나 소란은 피우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소란을 피우면 그쪽에도 좋을 게 없으니까.”

“낭자는 참 이성적인 사람이군요. 마음에 듭니다.”

범한이 무척이나 온화한 눈빛으로 손빈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다른 낭자들은 일단 깨어나면 무턱대고 소리부터 지르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원치 않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낭자처럼 자기 통제력이 강한 사람은 정말 보기 드물지요. 대단하십니다.”

손빈아가 얼굴을 약간 붉혔다. 사실 그녀도 처음에는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디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놀랄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저 잠시 몸을 피할 곳이 필요해 들어왔을 뿐입니다. 절대 낭자를 해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범한이 작은 목소리로 타이르며 손에 들려 있는 붉은색 표지인 《석두기》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손빈아를 손쉽게 기절시킬 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자신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그러지 않았다.

“몸을 피할 곳이 필요하시다고요?”

손빈아가 두려움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곁눈질로 자신의 방에 침입한 사내의 옷차림새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지? 왜 숨을 곳이 필요한 거지?’

순간 그녀는 머릿속에 이틀 동안 경도에서 일어난 사건과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사람의 용모가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책상에 놓인 《석두기》를 바라봤다.

손빈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총명하지도 않았고, 운이 좋은 편도 아니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그녀의 마음은 온통 그 사람에게 쏠려 있었기에 항상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그 사람이 몹시 어려운 곤경에 빠져 모두가 잡아 죽이고 싶어 하는 대역죄인이 된 탓에 매일 가슴앓이를 하며 괴로워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지금 자신의 방에 침입한 남자와 그 사람을 연관시킬 수 있었다.

“‘그분’이십니까?”

입술을 살짝 떨며 어렵게 질문한 손빈아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막상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니 입이 더는 떨어지지 않았다.

범한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낭자가 어느 집안사람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미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이 그 사람이라고 확신한 한 손빈아는 마음이 울렁거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범한을 바라보던 그녀가 가까스로 말을 토해냈다.

“작은 범 대인이십니까?”

그 말에 이번에는 범한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분장을 진하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것인데. 저 낭자는 도대체 누구이길래 나를 알아보고 내 이름을 확인하는 거지?’

범한이 긴장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손빈아를 바라봤다.

한편 손빈아는 상대방이 바로 부인하지 않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순간 그녀가 조금 전 상대방이 했던 질문을 떠올리고는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말했다.

“제 아버지는 손경수 대인입니다.”

“손경수라니!”

놀라 숨을 깊게 들이켠 범한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입을 쩍 벌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그는 자신이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운이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손경수라니! 지금 경도 부윤을 맡고 있는 사람이잖아! 경도에 있는 아속들을 통제하고 치안을 책임지는 사람이자 황태후에게 나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인데······. 내가 지금 그 손씨 집안에 숨어 들어와서 손경수의 딸을 인질로 붙잡고 있었던 거야!’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손씨 집안 낭자를 바라보았다.

“손씨 집안 낭자셨군요. 저를 보고 너무 놀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정2품 경도 부윤인 손경수는 아직까지 어느 파벌에도 분류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와 교분을 나눈 적도 없었다. 더욱이 그는 황태후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집에 들어왔다는 것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안전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이 집을 떠나야 했다.

그가 손씨 집안 아가씨를 바라보며 몰래 손가락을 움직여 사리리, 소은, 언빙운을 기절시켰던 가라방을 묻혔다. 이걸로 손씨 집안 아가씨를 기절시킨 뒤 재빨리 이곳을 떠날 작정이었다.

“작은 범 대인이시지요?”

손빈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끈질기게 물었다.

그녀 앞에 선 범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낭자께서는 어떻게 저를 한눈에 알아보신 겁니까?”

범한이 간접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자 손빈아가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더니 옥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범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순간 그가 떠나려 한다는 걸 알아차린 손빈아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곧장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여린 몸이 갑자기 가슴을 파고들자 범한은 당황해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황당한 생각이 스쳤다.

‘설마 손씨 집안 아가씨는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생각을 한 건가? 황제를 암살한 반역자를 잡겠다는 생각에 나한테 달려든 것인가?’

범한은 너무 놀라사 정기를 운용해 상대방의 어깨를 자신의 몸에서 떼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상대방의 들썩이는 어깨를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황만 놓고 보면 남녀 사이의 문제에 얽힌 듯이 보였지만 범한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손씨 집안 아가씨에게 잘못한 적이 없었다. 사실 그는 지금껏 손씨 집안 아가씨와 만난 적도 없었다.

“보옥······.”

범한의 품에 안겨 흐느껴 울던 손빈아가 갑자기 잠꼬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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