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703화 (703/1,108)

703화 담을 넘다 (1)

“본궁은 그를 죽이려 한 건데.”

황궁 광신궁 안 겹겹이 드리운 장막 뒤로 돌아온 장 공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그’는 오늘 경도에서 그녀가 보낸 사람들과 추격전을 펼친 범한이었다. 범한을 죽이는 데 실패한 장 공주가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진원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장 공주의 옆에 있는 태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동산로 쪽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데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겁니다. 이미 3일이 지났습니다. 마지막 소식이 온 것이 3일 전입니다.”

이운예의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이상하게 붉어졌다. 아름다운 저녁노을처럼 붉어졌던 얼굴이 찬 밤바람을 맞은 듯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조용히 말했다.

“본궁은 범한이 죽기를 원하네. 감찰원 쪽은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네, 알겠습니다.”

태감이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요 태감과 함께 과거 경국 황제에게 가장 큰 신뢰를 받았던 후 내관이었다.

장 공주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후 내관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네가 동궁에 불을 지른 건 잘한 거야. 경도에서 최후의 불을 자네가 어떻게 지를지 보고 싶군.”

대동산에서 늙은 홍 태감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요 태감은 분명 경제와 함께 죽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 황궁 안에서 나이가 가장 많고 권력도 가장 높으면서 황태후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환관은 후 내관뿐이었다. 과거 범씨 집안과 유씨가 후 내관을 구슬리기 위해 상당히 많은 돈을 들였지만, 그건 쓸모없는 데 돈을 쏟을 꼴이었다. 원래 그는 장 공주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경제와 범한은 동궁에서 난 불이 누군가 지른 것으로 추측했지만 그게 후 내관일 거라고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후 내관이 허리를 굽히고 공손히 말했다.

“황태후께서 금군도 범한을 체포하는 데 협조하라 명령을 내리시어 이 노비가 전달하였으나······.”

그가 고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장 공주의 안색을 살피며 계속 말했다.

“마마께서도 아시듯이 저희가 동원할 수 있는 힘은 모두 동원하였고, 금군도 양총 골목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1 황자 쪽에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 공주가 담담히 말했다.

“금군은 우리가 건들 수 없네.”

후 내관이 은근슬쩍 떠보며 물었다.

“오늘 태극전에서 소란이 생겨 40여 명의 대신이 감옥에 갇히기는 했지만 황태후 마마의 뜻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황태자 저하께서 제위를 물려받는 게 정해졌으니······· 1 황자 저하의 위치도 바뀔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네의 말을 본궁이 어마마마께 가서 말해보라고 하는 것인가?”

장 공주가 비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네. 지금 경도 수비사는 내 사람이고, 13성문사도 약간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진씨 집안과 섭씨 집안 군대는 며칠이면 경도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네······. 이런 상황에서 금군 통령까지 교체한다면 어마마마께서 어찌 안심하시겠나?”

“영 재인이 함광전 안에서 얌전히 있기만 하다면 금군은 화친 왕야가 계속 맡을 것이네.”

장 공주가 차갑게 말했다.

“어마마마께서는 항상 균형을 추구하시는 분이시지. 그렇지 않다면 본궁이 언젠가는 이 황성을 무너뜨릴 거라 걱정을 하셨겠지?”

겁에 질린 후 내관이 몸을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범한에게도 약점은 있어.”

장 공주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본궁이 그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 멀리 도망치지는 못하고 경도 안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거네. 그러니 본궁은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십여 명의 대신들이 견뎌내지 못해 굴복하고, 태상사와 예부상서 관리들이 버틸 수 없게 되면 황태자는 명분에 따라 제위에 오를 것이고 범한은 이대로 황제를 암살한 반역죄인이 될 테니까. 그때가 돼서도 가만히 숨어 있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

후 내관이 존경과 두려움이 섞인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장 공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태후 마마께서 황궁에 입궁하라 명령을 내리셨을 때 작은 범 대인의 핏줄을 임신한 첩이 도망을 간 게 아쉽습니다.”

“도망을 간 게 아니야.”

장 공주가 마치 먼 곳을 내다보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 게 뜨자 긴 속눈썹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의 가족을 보호해주는 사람이 있는 거야······· 하지만 과연 주인을 잃은 부하가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까?”

“이 노비는 마마의 절묘한 계략이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좋은 계략이라 할 것도 없지. 아마도······· 이틀 뒤에 궁을 나가야 할 것 같으니 준비해 두도록 하게.”

장 공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시를 내릴 뿐 자신이 왜 궁을 나가려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후 내관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부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노비는 이만 함광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가보게.”

장 공주가 떠나려 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넌지시 당부했다.

“어마마마께서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게.”

“네, 알겠습니다.”

광신궁에서 나온 후 내관은 쥐 죽은 듯 고요한 궁전을 지나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슬픔에 겨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함광전으로 돌아왔다. 황태후 옆으로 다가가 몇 마디 말을 하던 후 내관은 황태후의 하얗게 세 버린 머리와 힘없는 표정, 그리고 생기를 잃어버린 눈빛을 바라보면서 남몰래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과거 엄청나게 대단한 인물이었던 황태후 마마는 이미 노쇠해 조정의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 맞는 결단과 투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오래전에 장 공주 마마를 따르기로 한 것이야 말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 * *

후 내관이 떠난 뒤 장 공주는 눈꺼풀을 내린 채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심복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해 대부분은 들리지 않았지만 어렴풋하게 들리는 바에 따르면 경도 밖의 상황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잠시 뒤 조용히 혼자 앉아 있던 그녀가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궁녀들이 에워싸고 있는 곳으로 갔다. 광신 궁 뒤편에서 궁녀들이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을 지키고 있었다. 장 공주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과 닮지 않은 딸의 옆으로 다가가 다정히 말했다.

“신아야, 이 어미가 범한을 찾았단다.”

임완아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장 공주의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딸의 반응에 왠지 모르게 화가 난 장 공주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은 쥐새끼일 뿐이다. 네가 정말 걱정되었다면 진작 궁에 돌아왔겠지.”

그 말을 들은 임완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평상시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눈동자에 가벼운 물결이 일었지만,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눈빛으로 장 공주의 마음을 베고 싶은 듯 차갑고 냉담하게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해 말했다.

“저는 어머니께서 저를 함광전에서 꺼내주셨을 때는······· 일말의 모녀의 정이라도 남아 있어 그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자신의 딸을 인질로 삼기 위해 그런 것이었군요.”

임완아의 얼굴에는 모녀 사이에서 응당 보여야 할 애정은 전혀 없이 냉정함만이 보였다.

“당연한 일인데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외삼촌께서 여러 차례 어머니는 미쳤으니 정상인과 똑같이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셨거든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저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어머니처럼 미친 사람에게는 원망도 쓸모없는 감정이니까요.”

“그러니?”

이운예가 천천히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나를 원망할 자격이 없어······. 사사라는 그 천한 계집애는 밖에서 잘 지내고 있겠지? 범씨 집안은 그 애만 보호하고 너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모양이구나? 네가 원망해야 할 사람은 네 상공과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야.”

임완아가 두 다리를 살짝 떨면서 말했다.

“어머니가 틀렸어요. 아마 그분들은 어머니께서 자기 친딸까지 인질로 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녀가 발을 떨자 아래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족쇄를 채운 것이었다.

이운예가 딸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범한이 죽는다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란다.”

“그래요? 어머니는 영원히 상공을 죽이지 못하실 테니 안타깝네요. 상공은 대동산에서 살아 돌아왔으니까 앞으로도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거예요.”

임완아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딸의 고집스러운 얼굴에 장 공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살고 죽는 건 사람 마음처럼 되지 않는 법이지. 나는 내 사위가 2년 동안 살아남아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그 애는 죽지 않고 살아남더구나.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아.”

장 공주가 자신의 딸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때 겁에 질린 대보는 임완아 옆에 바짝 붙어서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대보를 바라본 장 공주가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사위를 아주 잘 알고 있거든.”

이운예가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대보가 여기에 있는데, 그가 죽지 않고 어쩔 수 있겠니?”

“하! 어머니께서 상공을 그렇게······· 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알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임완아가 당당하게 장 공주의 두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는 그 사람의 아내예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이 어머니의 속셈에 걸려들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어머니께서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모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거야.”

장 공주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분히 말했다.

“범한은 겉으로는 대의를 위해 뭐든 희생할 수 있는 냉정한 사람인 척 하지만, 사실은 자기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다.”

그녀가 잠시 생각하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범한을 낮게 평가하지 않는단다. 범한이 상황을 역전시킬 걸 대비해서 이미 준비도 해두었는걸. 아마도 며칠 뒤에 그 애는 황궁에서 상황을 역전시킬 기회를 갖게 될 거야······. 그래서 나는 너와 대보를 출궁시킨 뒤 그가 여기서 죽도록 할 생각이란다.”

임완아가 차분히 장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이미 13성문사도 장악하신 모양이군요. 이제 진씨와 섭씨 집안 군대는 언제든지 경도에 들어올 수 있겠네요.”

장 공주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를 닮아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구나. 과연 내 딸이야.”

임완아가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범한이 황궁에 잠입한 뒤 1 황자의 금군과 자신이 황궁 안에 심어둔 연줄을 이용해 상황을 뒤바꾸려 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범한을 깊은 황궁에 끌어들인 뒤 강력한 군대로 반격하려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황궁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뭘 하고 싶으신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