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701화 (701/1,108)

701화 단번에 뜻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2)

왕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범한의 얼굴은 오히려 점점 더 침착해져 갔다. 오늘 태극전에서 황태자의 즉위를 막아설 수 있었던 것은 오주에 있는 장인어른의 도움을 받아 두 대학사를 움직이게 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오늘 그가 태극전에서 벌인 일은 문신들의 목숨을 걸고 한······· 모험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역시 이번 일은 위험성이 큰 모험이자 지극히 이기적인 선택이라는 걸 알았기에 왕비의 비꼼을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도둑에게도 도둑으로서 도리가 있듯이 신하에게도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는 법입니다. 이전에 저는 죽는 걸 마냥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깨달았습니다. 죽음에는 대동산보다도 무거운 죽음도 있고, 기러기 깃털보다도 가벼운 죽음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는 자신의 마음속 정도(正道)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분들이셨고, 그래서 자신의 신념대로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대동산보다도 무거운 죽음과 기러기 깃털보다도 가벼운 죽음이라고요?”

왕비가 말을 곱씹으며 범한의 약간 멍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작은 범 대인을 만난 왕비는 젊은 청년의 온화한 얼굴에 살기가 깃들어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의 뼛속까지 바뀐 것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공야께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뒤로 숨어 움직이려만 하시고 앞으로 용감히 나서지는 않는 겁니까?”

“지금 당장 대전으로 가서 유훈을 공개했다가는 궁중 고수들의 공격을 받을 테니까요······.”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게 아주 용감한 행동일 수는 있겠지만 효과 좋은 행동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그가 갑자기 미소를 거두고는 이전에는 보이는 적 없었던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20일 전에 높은 산꼭대기 풀숲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여전히 목숨을 아끼지만 만일 죽어야만 하는 상황 닥친다면 그저 가치 있게 죽기만을 바랄 것입니다.”

왕비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존경하는 문신들의 머리를 대가로 모험을 한 게 아닙니다. 만약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장 공주였다면 저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태극전에서 용상에 오르려는 사람은 둘째도 아니고 황태자이지 않습니까.”

그가 두 눈을 뜨고 차갑게 말했다.

“둘째는 심성이 잔인한 사람이지만 황태자는 약간은 믿을 만한 사람이지요.”

“믿을 만하다니요?”

“저는 황태자가 저희 형제 중에서 가장 심성이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범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태후께서는 연세가 많아 사람을 죽일 생각은 하지 못하실 테고, 황태자는······· 심성이 고와 차마 그런 명령은 내리지 못할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애초에 오늘 태극전에서 왕비가 걱정한 그런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범한은 오늘 태극전에서 이용한 패는 바로 황태자의 유순한 심성이었다. 왕비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떠나려 했다.

범한이 떠나려 하는 왕비를 불러 세우고는 마색색을 불러서 나오게 한 뒤 진지하게 당부했다.

“저는 경도에서 한 곳에만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이제 양총 골목에는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 낭자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왕비께서 데리고 왕부로 가주셨으면 합니다.”

왕비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도 위험한 상황에서 범한이 마색색의 안전까지 걱정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자신에게 데리고 가라고 요구할 거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마색색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범한을 바라봤다.

두 여자의 경악한 표정을 보면서도 범한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왕부는 지금 경도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건 왕야께서 관리하는 금군의 힘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왕비도 제가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왕비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생각했다. 이번에 경국에 일어난 내란에는 외부 세력의 개입이 있었다. 그러니 장 공주도 반드시 외부 동맹국들의 체면을 생각해 주어야 했고, 북제 젊은 황제 누이의 체면도 생각해 주어야 했다.

세 사람은 작은 저택 문밖에서 인사하고 헤어지려 할 때 범한의 왕비를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아까 왕비께서 대의를 가지고 저를 꾸짖으셨는데, 저도 왕비께 일깨워드릴 점이 있습니다. 왕비는 지금 경국의 왕비이니 경국 사람이지······· 북제 사람이 아닙니다.”

순간 놀란 왕비는 범한의 깊고 차가운 두 눈동자를 마주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직은 초가을이라서 바람이 약간 차기는 했지만 추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차에 올라탄 왕비는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추운건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마색색은 그녀가 준비한 다른 마차를 타고 있었다. 사실 범한이 오랑캐 여자의 가엾은 목숨을 돌봐 달라 부탁하지 않았어도 왕비는 마색색은 양총 거리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 마색색이 죽기라도 한다면 왕야게 뭐라 말한단 말인가?

마치에 혼자 타고 있는 왕비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범한의 마지막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녀는 범한이 이번 일에 대한 전체적인 계획을 이미 세워 놓고 자신에게 주의를 시킨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왕비는 북제에서 경도로 내려 올 때 범한과 동행해서 그가 모든 걸 세심하게 관찰하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욱이 오늘 태극전에서 일어난 일촉즉발의 상황은 그가 하룻밤 움직인 거로 생겨난 결과였다. 이에 왕비는 그의 능력을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범한은 자신을 도와주던 세력이 황궁의 감시를 받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왕비는 범한이 숨겨둔 패가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왕야의 옆에, 범한이란 청년 옆에 서기로 결심했다. 역사란 항상 승리자의 발걸음을 따라 기록되는 것이니 말이다.

마차가 왕부에 도착하자 왕비가 마색색을 데리고 후원에 들어가 종을 불러 머물 거처를 마련해 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혼자 호수 중앙에 있는 정자로 갔다. 반년 전에 이 정자에서 황태자를 제외한 모든 황족 자녀들이 모였었다. 하지만 잠시나마 유지되던 황실의 평화는 경제의 사망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황제 폐하의 자녀들은 이제 자기 형제자매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왕비가 한숨을 쉬며 창가에 앉은 뒤 줄곧 정자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에게 물었다.

“왕야 쪽에서 소식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공손히 대답했다.

“금군 쪽에서 살짝 이상한 행동이 있기는 했지만, 부장의 말에 따르면 왕야가 황궁을 지키고 있으니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합니다.”

대답하는 사람은 옷차림만 보면 집안의 집사로 보였다. 하지만 왕비의 질문에 아주 공손하게 대답하는 그의 눈가에는 아랫사람이라면 가질 수 없는 기질이 드러났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공주께서는 그 사람을 만나셨습니까?”

공주? 왕비를 공주라고 부르는 사람은 북제 사람뿐이었다.

왕비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잠시 장 공주 쪽과 평화를 유지하려 한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는 장 공주 마마가 경국 상황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폐하의 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범한의 행적을 알게 된 이상 장 공주 마마께 알려 드려야 합니다.”

왕비가 그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상경성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이 당분간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건 압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 집사 차림을 한 남자는 북제가 경도에 심어둔 밀정이며, 내란이 일어난 경국에서 장 공주 쪽과 연락을 책임진 중요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왕비를 바라보며 경고했다.

“공주마마, 본인이 북제의 백성인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건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왕비도 그를 차갑게 노려보며 반박했다.

“저는 그쪽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대로 범한이 정말 죽기라도 한다면 폐하가 그쪽을 용서할 것 같습니까?”

그 사람이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북제 젊은 황제가 범한을 무척이나 아끼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황제가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범한이 죽어야 한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말했다.

“경국에 큰 혼란을 일으키라는 폐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진평평이 얼마나 음흉한 사람이지 알고 계십니다. 만약 범한이 죽지 않는다면 진평평, 범건, 그리고 멀리 오주에 있는 전임 재상이 미쳐 날뛰는 일도 없을 겁니다.”

“경제가 죽었으니 경국을 뒤흔들 만한 인물로는 장 공주 이운예와 세 명의 늙은이들뿐입니다.”

고개를 푹 숙인 그 사람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지금 경국 내정을 책임지고 있는 황태후가 진평평과 범건을 감시하고 있어 그들도 쉽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범한의 신변에 일이 생긴다면 경국 황족도 두 사람이 날뛰는 걸 막지 못할 겁니다······.”

“경국에 혼란이 생긴다면 마지막에 누가 이기든 복제로서는 좋은 일입니다.”

그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경제의 죽음이 경국의 혼란을 불러올 실마리였다면 범한의 죽음은 혼란을 터뜨릴 수 있는 도화선입니다.”

“이것은 금의위의 의견입니까? 아니면 폐하의 의견입니까?”

왕비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이 일은 위 지휘사의 손을 거치지 않고 폐하께서 독단으로 결정하신 일입니다. 폐하께서 비록 뜻을 명확하게 밝히시지는 않았지만 범한이 죽을 걸 예상하고 계신 건 분명합니다.”

“그럼 북제는 어느 쪽이 이길 거라 보고 있습니까?”

왕비의 질문을 들은 그가 고개를 들고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범한 쪽이 이길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범한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범한 쪽이 이길 건데 범한이 죽어야 한다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왕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그를 도운다고 해도 섭씨와 진씨 집안의 군사력을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소신이 어찌 폐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아마도 폐하께서는 진평평의 능력을 믿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폐하의 말대로 범한이 죽고 경도가 혼란에 휩싸인다면 진 원장이 어디선가 천하무적의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겠지요······.”

왕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비꼬았다.

“장 공주 쪽이 패배하고 범한 쪽 사람들이 경국 조정을 다시 장악한다면 범한이 살아 있는 게 낫지 않습니까? 범한은 북제와 관계가 좋았으니 수십 년 동안은 평화를 유지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왕비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공주께서는 폐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무슨 뜻이요?”

왕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인상을 더욱더 구기며 물었다.

그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모든 사람의 시선이 황태자, 2 황자, 3 황자, 범한에게 쏠려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혼란한 상황이 되어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 금군의 병력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왕야시지요. 더구나 왕야께서는 줄곧 범한과 사이가 좋았고, 진 원장에게는 조카와 같은 사람이지요. 그러니 아들을 잃은 범 상서가 누구를 선택하려 하겠습니까······· 이 일로 가장 좋은 기회를 얻는 사람은 왕야가 될 것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