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화 단번에 뜻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1)
왕비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범한을 본 그녀는 비로소 이 일을 배후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누가······· 상황을 예측하고 범한을 대신해 가족들을 대피시킨 것일까?
범씨 집안이 십여 일 동안 사사의 실종 소식을 감추고 있는 걸 보면 일의 내막을 아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범한도 사사의 안전이 걱정되지는 않았기만, 그래도 무언가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범한이 왕비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늙은 절름발이.”
“진 원장이군요.”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대답을 내뱉었지만, 머릿속에 스치는 터무니없는 생각들 때문에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범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미간을 찌푸렸다.
“집안과 진 원장의 관계가 좋기는 했지요. 최근 경도의 상황이 엉망이라서 감찰원에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감찰원도 엉망인 건 마찬가지인 것 같더군요. 다만 왕비께서 이런 상황을 알고 계신다는 게 놀랍군요.”
왕비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가 안 계실 때는 진 원장의 다음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 경도 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저는 장 공주마마가 이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첫째 날 황태후 마마께서도 진 원장에게 입궁을 하라 명령하셨······.”
“저도 처음에는 진 원장이 입궁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가 않아 곧장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지요.”
범한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13성문사가 성 안팎에서 주고받는 정보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경도 교외에 있는 진원을 완전히 봉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경도로 돌아온 뒤 며칠 동안 그는 감찰원에 있는 몇몇 부하들과만 암암리에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감찰원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제사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소식에 감찰원 안이 무척 어수선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진평평 대인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진평평 대인은 황태후의 명령을 받고도 경도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설마 독에 중독되었다는 소문이 정말인 걸까?’
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왕비는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지만 공교롭게도 한숨을 쉬며 같은 말을 내뱉었다.
“독에 중독되셨다는 소문이 진짜일 수도 있겠군요.”
범한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찰원의 방어력을 생각해 볼 때 진평평이 마시는 찻물에 독을 탄다는 게 가능한 일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동이성 독술가가 경도에 나타나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것도 수상했다······.
“저는 원장 대인께서 조정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독에 중독되었다는 핑계로 피하는 것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가 두 눈을 살짝 감으며 계속 말했다.
“만일 독에 중독된 것이 사실이라면 일이 복잡해지는군요.”
“이미 너무나도 복잡해졌습니다.”
왕비가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황태후 마마께서 아직까지는 진 원장을 상당히 신뢰하고 계시지만 독에 중독된 시기가 너무 시의적절해서 아마 의심하고 계실 겁니다. 황태후 마마께서 진 원장이 대인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황태자를 용상에 앉을 사람으로 결정하지도 않으셨겠지요. 그렇게 되면 상황이 잘못되었을 때 되돌릴 여지가 없게 되니까요.”
범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도 진평평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소식을 의심했으니 황태후도 자연히 의심했을 것이었다. 의심은 가시와 같아서 갈수록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진평평을 의심하기 시작한 황태후는 가장 강력한 힘을 사용해 감찰원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진항이 경도 수비사에 다시 임명된 뒤 첫 번째 임무가 진원을 감시하는 것이었더군요. 진원에서 계속 아무런 소식도 나오지 않는 게 수상합니다.”
범한의 미간이 드리운 주름이 더욱더 짙어졌다. 진씨 집안 군대가 하루 만에 경도로 진입할 수는 없으니 황궁 안에서 큰 혼란이 일어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절름발이 노인은 범한이 가장 신경 쓰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만약 독에 중독된 게 사실이라면 진원의 방어력이 더욱 강화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경국 정예부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서둘러야 합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왕야께 이제는 결심을 내려야 할 때라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왕야의 어머니께서 그곳에 계시는 데 뭘 어쩔 수 있겠습니까?”
왕비는 범한에게 확실한 승낙을 반드시 받아내려 했다.
“영 재인의 안전은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범한이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왕야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왕야도 자신이 관리는 금군 안에 연 대도독의 측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시간을 오래 끌다가 만일 황태후 마마께서 금군 통령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면 저와 왕야는······· 아주 개 같은 상황에 부닥치게 되겠지요.”
개 같은 상황이라는 저속한 표현에도 왕비는 불쾌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녀 역시 지금의 상황이 개 같은 상황이라는 데 확실히 동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범한의 진실한 얼굴을 보면서도 여전히 의문을 풀리지 않았다. 깊은 황궁 안에 갇혀 궁정의 감시를 받으며 지내고 있는 영 재인의 안전을 범한이 어떻게 보장하겠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신 군주가 지금 황궁 안에 있는 상황에서 범한이 자신의 아내의 생명을 담보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13성문사가 중요합니다.”
왕비가 범한의 찻잔을 자기 앞으로 놓으며 작게 말했다.
“황태후 마마께 충성하는 군대가 경도로 들어오는 걸 막으려면 13성문사 사람이 저희 편에 서야 합니다.”
범한이 은은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왕비가 드디어 자신의 남편을 설득할 결심이 세우고 구체적인 사항을 토론하기 시작하자 마음이 놓였다.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왕비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군대 측과는 어떤 교분도 없어서 13성문사 쪽을 어떻게 건들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왕비가 한숨을 쉬었다.
“왕야께서도 과거 함께 했던 서정군 군인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이고, 경도에 세력이 별로 없어 진씨 집안과 섭씨 집안의 세력을 상대하기에는 힘듭니다.”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진 원장께서 경도에 계셨다면 13성문사에 영향을 끼칠 방법을 생각해 내셨을 텐데요.”
“그건 언급하지 말지요.”
진평평이란 이름을 듣자 마음이 심란해진 범한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성문이 열리기 전에 황궁에서 상황을 해결해야 합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왕비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범한은 그녀의 앞에 놓인 찻잔을 돌려놓으며 말했다.
“찻주전자는 하나이지만 찻잔은 여러 개이듯이 진씨 집안의 군대만 보지 말고 섭씨 집안의 군대도 생각해야 합니다. 섭중은 경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겁니다. 황태후 마마께서 그에게 정주로 돌아가라 명령하셨지만 돌아갔는지 안 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요.”
왕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놀라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고 침착하게 말했다.
“둘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황태자에게 용상을 잠시 양보하는 대신에 경도라는 찻주전자에서 일부분을 자신이 가지겠다는 속셈입니다. 그리고 둘째가 그런 요구를 하려면 섭씨 집안이 경도로 들어와 그의 뒤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넌지시 말했다.
“물론 먼저 제 장모이신 장 공주 마마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지요.”
그가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태양혈을 가볍게 누르며 계속 설명했다.
“장 공주 마마는 황태후 마마와는 다릅니다. 그녀는 군이 가진 힘을 신봉하는 여자이니 사람을 죽여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다면 몇 천 명의 사람도 개의치 않고 죽이려 할 겁니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왕비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범한을 향해 말했다.
“결국에는 피바람이 불겠군요.”
“피를 흘리지 않고 정변을 이루려면 조금의 흠도 없는 완벽한 계획이 있어야 하고, 또 운도 아주 좋아야 하지요.”
범한이 가당치 않은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말했다.
“제가 비록 운이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 일을 운에 맡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장 공주 마마는 미친 계획도 과감히 실행해 옮기는 사람이니, 저희가 황궁 안에서 움직이는 걸 본다면 당장 병력을 동원하려 할 겁니다.”
왕비가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인의 의견을 왕야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왕비께서 오늘 이곳에 오셨으니 왕야를 대신해 제 의견을 받아주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사실 1 황자는 범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왕비를 이곳에 보낸 것은 범한이 얼마나 많은 패를 쥐고 있으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범한의 단도직입적인 요구에 왕비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담박공께서는 갈수록 자신만만해지십니다. 경도가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여 있는데도 웃으며 농담을 하실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범한이 잠시 아무 말 없이 왕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자신만만해하고 있는 건 맞지요. 섭씨와 진씨 집안의 군대가 경도에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경도성 안에 제 적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 천하에서 가장 대단한 인물들은 모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경제에게 끌려 대동산 안으로 들어가서는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범한은 아직 상처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음에도 다시 태어난 이래 가장 높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범한을 바라보던 왕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젯밤에 담박공과 몰래 연락을 주고 받은 대신들이 오늘 태극전에서 황태후 마마와 황태자 저하의 명령에 맞섰습니다······. 그래서 황궁 안의 분위기는 곧 피바람이 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경직되었지요.”
그녀가 범한을 빤히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덕망이 높은 대신들이 목숨을 대가로 대인의 편에 서서 황태후 마마와 대립했는데도 대인께서는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계셨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모든 계획이 있어 침착하게 볼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말 그대로 냉혈한이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왕비가 봄날 햇살만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인의 방식은 감탄스러우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대인이 저들에게 자신의 피를 뿌리고 목숨을 바치라 하는 것은 대인이 얻고자 하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이지요······. 만일 이 사실을 대신들이 안다면 죽기 직전에 속았다고 대인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하는 왕비의 입가에는 비꼬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범한의 이번 행동이 황태자를 두렵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즉위식 전날 밤에 일을 진행해 상대편에게 대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만일 황태자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오늘 대신들을 죽였다면 그는 군주답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는 셈이었고, 대신들은 범한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황태자와 맞선 것이 되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