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9화 양총 골목에서의 밀회 (2)
“작은 범 대인이야말로 엄청난 배짱을 가지신 분이시지요······.”
왕비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경도에서는 여러 세력을 연합해 대인을 체포하려 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인께서는 오늘 황태자가 즉위한다는 걸면서도 이곳에 한가롭게 앉아 가만히 상황이 변해가는 걸 지켜보고만 계셨군요. 대인의 마음속에 계획이 있어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없어 그러고 계시는 것입니까?”
“마음속에 품은 계획이 실현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 생각도 없는 건 아닙니다.”
범한이 왕비의 온화한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생각이 없었다면 어찌 왕비가 이곳까지 오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비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금군을 지휘하는 저희 왕야께서는 경도 상황이 위급해서 저택에 돌아오실 여력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작은 범 대인께서 왕야를 만나려 하신다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에 작은 범 대인께 어떤 고충이 있으신지 알고자 제가 찾아온 것이니 언짢게 생각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 말 없이 왕비를 바라보던 범한이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제가 황제를 암살한 역모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큰 공주께서는 제게 어떤 고충이 있나 알려고 이곳까지 찾아오셨군요. 그렇다는 건 제 뜻이 어떤지 알고 계신다는 의미겠지요.”
왕비의 눈썹이 살짝 떨리는 것이 당장 범한의 말에 대답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고민하다가 왕비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왕비께서 기억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가 과거 북제에서 경국으로 내려올 때 마차 안과 밖에서 여러 대화를 나누었었지요?”
왕비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약속은 당연히 잊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시와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지금 경도는 앞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라서 왕야께서도 금군을 가까스로 지탱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하시려는 큰일을 왕야께서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녀자인 제가 어찌 함부로 확신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가까스로 지탱하고 계신다고요?”
범한이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께서는 어제 경도 수비가 교체된 일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왕비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범한이 한숨을 쉬었다. 경도 수비가 교체된 일은 자신을 급소를 찌른 것이자 1 황자의 약점을 공격한 것이었다.
본래 섭씨 집안에서 줄곧 맡아 관리해 온 경도 수비사는 이후에는 진씨 집안의 차세대 주인인 진항이 2년간 관리했었다. 하지만 작년 산골짜기 습격 사건을 계기로 폐하는 조정 세력을 재조정하면서 진항을 추밀원 부사로 보내고 새로운 경도 수비사 통령으로 1 황자의 서정군에서 부장을 맡았던 사소를 임명했다.
하지만 어젯밤에 다시 경도 수비사 자리에 변화가 발생했다. 황궁 상황을 안정시킨 황태후는 즉시 사소의 직위를 박탈하고 진항을 다시 경도 수비 통령으로 임명했다.
사소가 억울하게 자리에서 쫓겨났음에도 1 황자는 아무런 비호도 해줄 수 없었다. 그는 황제가 암살당한 일로 인해 금군에 쏟아지는 엄청난 압력을 견디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더구나 경도 수비사에는 사소의 세력도 없었다. 과거 서정군에서 용맹함을 떨쳤던 사소였지만 경도 수비 통령에 오른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쫓겨나는 바람에 측근들을 만들 수가 없었고, 이에 진찌 집안이 다시 경도 수비사를 가져가는 걸 보면서도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범한은 경도 수비 통제권이 상대방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골치가 아팠다. 이제 경도 밖을 둘러싼 군사력은 모두 진씨 집안의 통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니 교주 수군 허무제가 제안한 건의가 더욱더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가 왕비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경도 수비사는 원대 병영에 상주해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13성문사의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경도 안에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건······· 금군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인과의 약속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왕비가 그를 차분히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대동산에서 돌아오신 대인은 경도와 황궁 안의 상황이 어떠한지 모르지 않습니까. 왕야께서 지금까지 가까스로 금군을 지탱하고 있는 건 황태후 마마께서 건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범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왕비가 계속 말했다.
“황태후 마마께서 저희 왕야가 계속 금군을 통제하도록 내버려 두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건 왕야는 성정이 곧고, 정직해서 절대 동란이나 반역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시기······.”
왕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한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지금 반란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은 황궁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왕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문제는 태극전 용상에 앉은 사람만이 반란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인지 정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담박공께서 입궁해 황태후 옆에서 폐하의 유훈을 읽는다면 저희 왕야께서는 대인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줄 거라 보장해 드릴 수 있습니다.”
왕비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의 유훈을 공개하십시오.”
범한이 아무 말도 없자 왕비가 설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훈을 공개해야 싸울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안 됩니다. 저희 장인어른을 포함해서 아직 많은 사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범한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유훈이 공개하지 않으면 잠시나마 평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유훈이 공개되는 순간부터는 양측 모두 전면전을 벌여야 합니다.”
왕비가 살짝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공야께서는 담담하고 청명하게 살고자 하는 뜻을 버리지 못하신 겁니까?”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우매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유훈을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와 아까 왕비께서 말씀하신 대로 왕야께서 줄곧 가만히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사실 같습니다.”
그가 왕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설명했다.
“영 재인께서 황궁 안에 계시니 왕야께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제 아내와 첩도 지금 황궁 안에 있습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싸운다면 저와 왕야는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게 되겠지요.”
이 말을 들은 왕비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경도에 급보 세 통이 날아든 뒤 황태후가 서둘러 내린 명령들이 이제 와서 점차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런 명령들을 통해 황태후가 1 황자에게 심적 압력을 준 것은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태후의 눈에 범한은 가족이 살든 죽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1 황자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담박공께서 하룻밤 등장하신 것만으로도 경도가 이처럼 크게 동요하는 걸 보니 궁정에서 아무리 범씨 집안을 통제하고 감찰원을 감시해도 대인은 힘을 막을 수는 없나 봅니다.”
왕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계속 말했다.
“다만 제가 이해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 이해되지 않으십니까?”
왕비가 말끝을 흐리자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일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황궁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황궁 밖에서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왕야의 도움 없이는 황궁에 들어가서 이 일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왕비를 차분히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왕야께서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겠지요. 왕야께서 할 가치가 없거나 차마 할 수가 없는 더러운 일들을 대신 해줄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요.”
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대인께서 제 의미를 오해하셨습니다. 제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대인께서 당연히 아셔야 할 좋은 소식을 왜 아직도 모르고 계시는지입니다.”
“좋은 소식이라니요?”
범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황궁 안의 상황은 대인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좋습니다.”
왕비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계속 말했다.
“그건 대인께서 사랑하시는 가족들의 대응 속도가 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빨랐던 덕분이지요.”
범한이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줄곧 자신의 아버지와 아내, 가족들이 궁정에 감시를 받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갖은 고생을 한 끝에 가까스로 경도에 돌아온 뒤로도 어둠 속에서 숨어 지내야 했고, 감찰원과 마음 편히 연락할 수도 없었다. 이에 그는 며칠 동안 경도에 남아 있는 장인어른의 세력들과 몰래 연락을 하며 집안과 황궁 안의 상황을 대략적으로만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왕비의 말을 들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 황태후의 방법이······· 완벽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일말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이 기대감에 반짝이자 왕비가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군사들이 범씨 집안으로 쳐들어가서 안에 있는 가족들을 체포하려 하였지만, 범 상서 대인은 집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경도에 급보가 날아든 날 황궁에서 나오신 범 상서 대인은 저택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곧바로 정왕부로 가셨습니다.”
“정왕에게 가셨다는 말입니까?”
범한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럼 아버지께서는 줄곧 정왕가에 머무르고 계셨다는 겁니까? 그런데 어떻게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왕비가 설명했다.
“범씨 집안은 이미 봉쇄되어서 안에 소식을 밖으로 전달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정왕은 황태후의 친아들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돌아가셨으니 황태후의 유일하게 남은 친아들이지요. 그래서 황태후께서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의 체면을 생각해 함부로 쳐들어가지는 못하고 경도부와 궁정이 연합해 밖에서 지키고만 있는 상황입니다······.”
당황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체면을 생각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니······· 황태후께서는 경도의 모든 걸 통제하고 있다고 믿고 계시는 군요. 그렇기에 저를 잡지도 못했는데도 제 가족들을 건들지 않으시는 겁니다.”
“유훈은 없앴고 공야는 곧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황태후께서 마음을 놓으신 거지요.”
범한이 웃으며 물었다.
“좋은 소식이 또 있습니까?”
“사사 낭자의 출산이 임박해서······.”
왕비가 말했다.
“십여 일 전에 신 군주와 임씨 집안 큰 도련님과 함께 범씨 장원으로 이동했습니다.”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날 황태후께서 대인의 가족들에게 입궁하라 명령 내려 태감들이 찾아갔지만, 허탕을 쳤지요.”
왕비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사사 낭자는 저택에 있지 않았고, 범씨 장원에서도 낭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사 낭자는 십여 일 전에 실종된 상태입니다.”
왕비가 감탄스럽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저는 이처럼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신 대인께서 도대체 뭘 걱정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범한은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충격은 받은 상태였다.
‘범씨 장원으로 간 사사가 실종되었다니? 누가 꾸민 짓이지? 아버지가 계획하신 일인가? 설마 아버지께서 십여 일 전에 미리 폐하가 암살당한 소식을 듣고······· 뒤에 일어날 일을 예측해 움직이셨단 말인가?’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안색이 어두워진 범한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사사가 누구를 따라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