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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97화 (697/1,108)

697화 모두가 잊고 있던 사람

순간 주발 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발 안에 있는 황태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황태후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서무 대학사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서 대학사, 황당무계한 말로 군주를 기만하는 건 대역죄에 해당한다는 걸 기억하게!”

황태후의 질책에 놀라 안색이 변한 서무는 잠시 움츠러드는가 싶더니 이내 허리를 공손히 굽히며 대답했다.

“지금 경국에는 군주가 없는데, 어찌 군주를 기만할 수 있단 말입니까?”

황태후 앞에서도 서무는 전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황태후가 창백한 손을 뻗어 주발을 걷고는 용상 옆으로 걸어 나왔다. 황태자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감찰원 제사 범한이 동이성과 결탁해 대동산에서 폐하를 암살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급작스러운 일을 당하는 와중에 어떻게 유훈을 남길 수 있었단 말인가?”

황태후가 서무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정말 유훈을 남기셨다면 지금 어디 있는가?”

서무는 지금 황태후가 범한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에게도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는 마음이 섬뜩해졌다. 그가 체념한 표정으로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폐하의 유훈이 담긴 친필 서안은 현재 담박공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 조당이 술렁술렁해졌다. 범한의 죄상은 오늘 황태자 즉위식이 열리기 전에 이미 명확하게 밝혀진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서무 대학사가 폐하의 유훈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유훈이 담긴 친필 서안을······· 작은 범 대인이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대신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황태후가 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서무를 향해 말했다.

“그런가? 범한이 경도로 돌아왔단 말인가? 조정은 그동안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그를 체포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그가 경도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네. 조정도 알지 못하는 사실을 서 대학사는 어찌 알고 있는 것인가? 서 대학사는 어떻게 폐하께서 유훈을 남기셨다는 걸 알았는가?”

서무가 절을 하며 통곡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대동산에서 암살을 당한 경천동지할만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군대와 주군은 보름도 지나지 않아 담박공을 범인이라 단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소신은 담박공이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기에 그가 그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폐하가 유훈을 남기신 걸 소신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마음에 한기가 든 황태자의 손이 살짝 차가워졌다. 그는 대동산 사건이 터지기 전에 부황이 유훈을 남겼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 하고 있었다. 유훈이 무슨 내용일지는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순간 황태자는 부황이 자신을 얼마나 사무치도록 미워했는지가 실감이 나서 마음이 슬퍼졌다.

황태자는 황태후가 옆에서 침묵한 채 남몰래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할마마마가 오늘 피로감이 극에 달하기는 했지만 잘못된 대응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존귀한 황태후가 어찌 일개 늙은 신하와 입씨름을 벌이겠는가?

그는 이대로 순조롭게 용상에 앉는다면 반드시 그 유훈을 없애야겠다고 다짐했다.

“범한은 사고검과 결탁해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황태자가 대신들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범한은 평소에도 사람을 기만하고 더러운 짓을 서슴없이 저질러 온 사람이네. 서 대학사는 그런 간사한 자의 말에 속지 말도록 하게. 아들인 나 역시 부황의 유훈이 담긴 친필 서안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네······.”

황태자가 울먹이며 말끝을 흐리자 대신들이 엎드려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유훈은 위조된 것이며, 재상의 업무를 겸하고 있는 문하중서 대학사인 서무가 반역자인 범한과 결탁했다는 것이었다.

황태자가 서무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본궁은 서 대학사를 항상 존경해 왔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실망스럽네. 조정에 반역을 저지른 범인을 두둔해 주다니. 부황의 신임을 받아 온 서 대학사가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훗날 부황의 얼굴을 어찌 보려고 그런 말을 하는가!”

황태자의 눈빛이 갈수록 차가워졌다. 그가 매서운 위엄을 내뿜으며 말을 하자 조당에 있는 대신들도 감화되었다.

“대학사 서무는 반역을 저지른 범인과 결탁해 폐하의 유훈을 거짓으로 조작하려 했다. 여봐라······· 저놈을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어라! 나중에 심문할 것이니!”

그 말에 조당이 다시 웅성웅성해졌다. 경국 대신들은 황위 계승과 관련된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며, 더욱이 서 대학사가 오늘 경거망동하게 폐하의 유훈을 언급하며 즉위를 막았으니 황태자로서는 최대한 강경하게 대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온화한 성품의 황태자가 갑자기 과거 폐하와 비슷한······· 패기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그 순간 사람들의 마음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벌렁대기 시작했다.

서무의 슬픔에 맺힌 외침으로 황태자가 용상에 오르는 걸 강제로 막아냈다. 대신들의 흰색 또는 검은색 상복의 넓은 소매가 힘없이 펄럭였다.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넓은 태극전 안에 있는 대신들의 찍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태감들이 서무의 양팔을 부축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동시에 곁눈질로 태극전 밖에서 어렴풋하게 많은 인원의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도 보았다. 황궁 시위가 틀림없었다. 짧은 직도를 든 시위를 본 순간 대신들은 오늘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벌써부터 태극전 안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서무가 씁쓸히 웃으며 태감들이 자신의 팔을 결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 지금 태극전 안에 있는 대신들이 황태후의 위엄과 황태자의 지위, 장 공주의 세력이 두려워 침묵하고 있는 이상 자신이 유훈을 가져온들 바뀌는 건 없을 터였다.

황태후가 유훈이 가짜라고 말했는데 누가 감히 진짜라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가 고개를 저으며 황태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작은 범 대인은 어째서 대신들에게 연락해 폐하의 유훈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일까? 만약 어젯밤에 대신들 저택에 찾아가 폐하의 유훈이 있다는 걸 알렸다면 대신들도 폐하가 남긴 마지막 뜻을 지키기 위해 앞장서 나섰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처럼 나 홀로 고립되는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 아닌가.’

경제의 유훈이 담긴 친필 서안은 당연하게도 황태후가 황동판에 던져 태워버린 봉투 안에 들어 있지 않았다. 봉투와 함께 불태워진 것은 아무 내용도 적히지 않은 백지 종이와 황태후에게 마지막까지 걸었던 서무 대학사의 기대였다.

태감들이 서무의 팔을 잡고 부축하며 태극전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고 밖에는 살기등등한 시위들이 서 있었다.

묵묵히 끌려가는 서무의 모습을 바라보던 황태자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기개가 곧은 문신이라도 황실의 위엄에 겁을 먹은 이상 함부로 날뛰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옆에 있는 황태후도 약간 마음이 놓인 표정이었다. 그녀는 상황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고집을 부린 서무를 끌어낸 뒤 황태자 즉위식을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태극전을 나가기 직전 서무가 끌려 나가지 않으려 있는 힘껏 버티면서 속으로 명성을 이루었으니 죽는 건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황태자가 즉위식을 마치고 무사히 용상에 앉은 뒤 자신에게 독주를 내릴지 아니면 하얀 비단 천을 내릴지가 궁금했다.

이때 모두의 귓가에 어렴풋하게 누군가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탄식을 내뱉은 사람은 문관 대열 맨 앞에 서 있는 문하중서 수석 대학사이자 경국 문학 개선 운동을 일으킨 사람으로, 조정에서 가장 청렴한 문신으로 알려진······· 호 대학사였다.

호 대학사가 서무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대열 앞으로 걸어 나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뒤 고개를 들고 말했다.

“소신, 황태자께 조금 전 명령을 거두어 달라 간청 드리옵니다.”

대신들이 술렁였다.

황태후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소매 안으로 숨겨져 있는 그녀의 손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호 대학사가 지금 나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서무와 돈독한 사이인 건 알고 있었지만, 나라의 주인이 바뀌는 중요한 순간에 나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호 대학사의 턱 밑에 보이는 수염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폐하께서 유훈을 남기셨으니, 소신 감히 황태후께 태극전에서 폐하의 유훈을 선포해 달라 청하옵니다.”

황태후와 황태자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호 대학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계속 말했다.

“대동산에서 일어난 일은 의심스러운 점이 많이 있사옵니다. 담박공이 경도로 돌아왔다면 입궁해 폐하의 유훈이 담긴 친필 서안을 올리게 해야 합니다. 더구나 역모와 같은 대역죄는 3사의 심문을 거쳐야 하거늘 어찌 군대가 보낸 정보만 믿고 경솔하게 단정을 지을 수 있단 말입니까? 폐하의 생사는 천하 대사이거늘 지금까지도 옥체를 확인하지도 못했고, 호위의 보고를 듣지도 못했으며, 감찰원이 어수선해 진상을······.”

경국 문관들의 수장인 호 대학사의 말은 갈수록 빨라졌다. 황태후의 매서운 질책에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소신이 보기에 지금 제일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대동산의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동산의 진실은 아는 사람은······· 담박공 한 사람뿐입니다.”

“유훈이 담긴 친필 서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담박공을 능지처참을 할지 아니면 감옥에 가둘지는 나중에 논할 일입니다.”

“소신이 생각건대, 담박공을 체포해 심사하는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합니다. 이에 황태후의 현명한 판단을 요청하옵니다.”

태극전에 오랜 침묵이 흐른 뒤 안색이 검퍼렇게 변한 황태후가 호 대학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래! 그래! 그래! ······· 자네는 살호(殺胡)이지!”

살호라는 말은 경국 황제 폐하가 과거 호 대학사의 강직하고 청렴한 심성을 칭찬하며 지어준 별명이었다. 그리고 오늘 살기가 가득한 태극전 안에서 호 대학사는 자신의 별명과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랜 시간 침묵한 끝에 결국 자신의 강직한 지조를 드러내며 황태후와 황태후에게 맞서기로 한 것이다.

이에 황태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기등등하게 그를 노려보았고, 황태자는 오히려 담담한 얼굴로 아래 대신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지금 태극전 안에는 황태자의 측근들도 있었다. 비록 이들은 과거 장 공주의 수단이 휘둘려 황태자와 2 황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는 했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굳건히 황태자 편에 서 있었다. 이부 상서 안행서가 호 대학사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이전에 황태후 마마께서 범한의 작위를 박탈하고 범씨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호 대학사는 여전히 범한을 담박공이라 부르시는군요. 두 대학사께서 역모를 저지른 대역죄인인 범한을 두둔하는 이유가 혹시 알리지 못한 비밀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문 앞에 서 있는 서무가 놀람과 기쁨이 섞인 얼굴로 용상 아래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호 대학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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