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5화 대인의 기개를 빌리고 싶습니다 (2)
범한은 지금 황궁의 상황이 어떤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면 황궁에 들어가 황태후 앞에서 대동산의 진실을 밝히고 황제의 친필 서안과 옥새를 넘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천하를 혼란에 빠뜨릴 사건의 한 가운데 놓인 범한은 자신의 장모가 아주 단순하고 효과적인 계획을 세웠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가 일단 서거한다면 조정과 황태후는 갈수록 군주의 면모를 갖춰가는 황태자를 용상에 앉을 적임자로 선택할 것이었다.
명분에서나 안정을 위해서나 황태자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었다.
황태자가 일단 즉위한다면 범한은 북제에 의탁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문제는 범씨 집안이 황궁의 통제를 받고 있고, 그의 아내와 첩이 황궁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북제에 가서 빌붙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이씨 집안 여인들은 과연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악독한 사람들이었다.
범한은 역사에 기록된 권력을 가졌던 여인들의 행적을 떠올리며 어둠 속에 숨어 높은 담장을 기어올랐다. 담장 맨 꼭대기에 도착한 그가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아래 정원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이곳 저택에는 대신이 거주하고 있어 고수 호위병은 없었지만, 안에 하인들이 많았다. 담장을 넘어 곧장 서재로 걸어가던 범한은 아직 중상이 낫지 않아 움직임이 편치 않은 바람에 하마터면 들통이 날 뻔했다.
서재 밖에서 조용히 안의 동정을 살피던 범한이 비수로 상문을 비틀어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 안이 모두 눈처럼 하얀 걸 보고는 그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재빨리 몸을 돌려 입을 쩍 벌리고 소리 지르려 하는 대신의 입을 틀어막고는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접니다. 소리 지르지 마십시오.”
입이 틀어막힌 대신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범한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상대방이 죽기를 각오하고 사람을 불러 그를 체포하라 한다면 지금 그의 몸 상태로는 살아서 경도를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이건 도박이었다. 범한은 인생에서 가장 큰 도박에 목숨을 걸었지만 다행히 이번에도 운도 좋았다.
안정을 되찾은 대신은 소리쳐서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약간 창백해진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신의 의미심장한 눈빛에는 약간의 기쁨도 섞여 있었다.
“서 대인,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한 범한이 비수를 거두고 서무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다. 지금 그는 서씨 집안 서재 안에 있었다. 수도 없이 고민을 거듭한 범한은 대신들 중 지위가 가장 높은 대학사에게 먼저 찾아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체 대신 중에서 유일하게 장묵한의 제자였고, 인품이나 도덕 면에서 가장 신임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무가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세 가지 있습니다.”
“물어보십시오.”
“폐하께서 정말 돌아가셨습니까?”
서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어두운 얼굴로 침묵하던 범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대동산을 떠났을 때는 살아계셨지만······.”
순간 배를 몰고 다가오던 사람 그림자를 떠올리던 그는 사고검과 대머리 국사도 분명 그날 대동산에 왔을 거라 생각했다.
“이후에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서무는 한숨만 푹 내쉴 뿐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누가 꾸민 짓입니까?”
서무가 범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범한이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군대와 감찰원 소식에는 분명 제가 한 짓이라 되어 있겠지요.”
“대인이 주범이라면 왜 경도로 돌아왔겠습니까?”
서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건 대인의 성정과는 맞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범한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제가 대인을 찾아온 이유는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황태자가 용상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범한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서무가 인상을 더욱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범한의 입가에 옅은 자조가 어렸다.
“그건······· 서 대인께서도 아비를 죽인 반역자가 경국 용상에 앉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서재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가만히 서무의 표정을 살피던 범한이 일어나 품에 숨겨두었던 서신을 꺼냈다.
“폐하의 유훈이 담긴 친필 서안입니다.”
화들짝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떨리는 두 손을 서신을 받은 서무는 순간 이미 서거한 폐하가 어떻게 편지를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조정에 오래 있었던 그는 폐하의 필적과 문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봉인된 봉투만 보고도 폐하의 친필 편지라는 걸 알아차렸다. 감격한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범한이 봉투를 열어 편지를 서무에게 건네주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얼굴에 놀라고 분노한 기색이 짙어지던 서무가 결국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파렴치한 놈! 파렴치한 놈들!”
범한이 서 대학사 책상을 치지 못하도록 그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이 서신은 폐하가 저를 경도로 돌려보내기 전날 밤에 써주신 것입니다.”
“당장 입궁해야겠습니다.”
서무가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황태후 마마를 봐야겠어요.”
범한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서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폐하의 장래도 치르지 않았는데 황궁에서는 벌써부터 황태자 즉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을 더 끌어서는 안 됩니다. 자칫했다가는 너무 늦어 되돌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던 범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서신은 원래······· 황태후께 가야 할 것이었습니다.”
서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경도에 숨겨둔 세력과 그의 뛰어난 무술 실력이라면 황궁이 보안을 뚫고 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황태후에게 서신과 행색을 보여준다면 황태후도 분명 범한의 말을 믿어줄 터였다.
“아······.”
안색이 급격히 변한 서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범한을 바라봤다.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없습니다.”
다른 계획을 가진 범한의 두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번뜩였다.
“저는 황족의 일원이기에 대신보다 궁 안에 있는 귀인들의 생각을 더 정확하게 추측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확실하게 움직이고 싶은 겁니다. 황태후의 의중이 의심되지 않았다면 제가 무엇 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왔겠습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무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씨 왕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상황에 맞게 몸을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황족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고 천하의 통제력을 유지하며 명맥을 유지하는 거 말고······· 다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범한이 서 대학사를 바라보며 차분히 설명했다.
“일은 이미 철저하게 밝혀졌으니 대학사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정당한 선택을 하시는 겁니다. 그냥 오늘 제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요.”
서무가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당당한 경국의 대신이 순간 노쇠한 노인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장고를 거듭하던 그가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작은 범 대인이 이미 이곳에 오셨고, 그 사실을 제가 아는데 어찌 오지 않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범한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궁금한 게 있습니다. 범 상서께서 저택에 연금되어 계시지만, 그래도 조정에는 대인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저를 선택하신 이유가 뭡니까? 어째서 진 원장이나 1 황자 저하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까?”
서무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눈빛을 지으며 묻자 범한도 웃으며 대답했다.
“무력으로 일을 해결하는 건 최후의 방법입니다. 이 일은 해결하려면 결국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전에 먼저 도리를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침착하게 계속 설명했다.
“대인을 선택한 이유는 폐하를 대신해 도리를 말할 수 있는 학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범한이 말을 마무리 지었다.
“저는 순수한 학자는 아니지만 진정한 학자가 어떤 사람인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인의 스승이신 장묵한 선생처럼 학자는 기개를 가지고 있지요. 저는 대인의 기개를 빌리고 싶습니다.”
* * *
성 전체가 흰색으로 물들었다. 9월에 사람의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눈이 사방에서 날려 황성 주변 거리와 주택에 떨어졌다. 물론 진짜 눈은 아니었다. 하얀색 천과 종이, 등불이었다.
성안은 온통 하에서 무척이나 깨끗해 보였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경국의 20년 이래 가장 비통한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아 슬픔과 울음을 애써 억눌렀다.
황제 폐하의 서거 소식을 계속 숨길 수만은 없었고, 더욱이 소문을 날이 갈수록 더욱 횡횡해져 갔다. 이에 황태후는 대동산에 군대를 보내 폐하의 시신을 수습해 오도록 한 뒤 조사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천하에 황제 폐하의 서거 소식을 알렸다.
경도의 백성들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조정에서 사실이라 발표하고 황성 사방 각루에 하얀 등롱이 걸리는 걸 보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항상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 대한 좋은 점을 떠올리게 되는 법이다. 더구나 경국 황제 폐하가 어떤 성정의 사람이었건 간에 그가 경국을 통치한 20여 년의 시간 동안 경국 백성들이 역사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건 사실이었다.
이에 경국에는 밤새도록 슬픔에 겨운 통곡 소리가 울렸다.
대동산에서 황제가 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게 경국 귀족들이 경국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진실이었다. 만일 몇 년 뒤에 진짜 진실이 밝혀져 다시 경국 백성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귀족들은 그때 가서 다시 백성들의 마음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면 그만이었다.
아직 장사를 지내는 날이 되지 않았음에도 경도는 이미 하얀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예부 상서와 홍려사 정경이 폐하를 따라갔다가 대동산에서 죽는 바람에 격식에 맞게 처리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마치 노래를 울면서 부르다 중간에 끊기는 것처럼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순조롭지 않은 부분들 때문에 조정과 황궁에 있는 사람들은 슬픔보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최근 몇 년 동안 놀랄만한 대대적인 조치를 하기보다는 중용과 안정을 더 추구해 존재감을 많이 드러내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제는 어쨌거나 경국 정신의 지주였다.
모든 사람이 습관적으로 슬픔에 잠긴 뒤 곧이어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황제 폐하가, 마음속에 항상 천하통일이라는 포부를 품고 있었던 황제 폐하가 어떻게 이처럼 조용히 세상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황제 폐하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세상을 떠난 이유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황제가 세상을 떠난 이유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통치자가 아무런 기미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경국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혼란을 겪다가 붕괴하게 될까? 평화롭게 황위를 계승한 뒤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될까?
두렵고 불안해질수록 안정을 갈망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극전에 놓인 용상을 바라보며 황자 중 누구라도 빨리 저곳에 앉아 경국의 조정을 안정시켜주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