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3화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 (2)
장 공주가 형식상 수개월 동안 닫혀 있었던 황실 별궁 대문을 천천히 열고 돌계단 위에 서서 아래 자신을 맞이하러 온 마차와 태감을 바라봤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하얀색 얇은 홑옷을 입어 수수한 차림의 그녀의 얼굴은 진정한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별궁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비구름이 흩어진 뒤에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얼굴에 드리운 슬픔이 갈수록 짙어지더니 어느 순간 점점 옅어졌다. 그녀의 옥처럼 맑은 피부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속 진정한 감정을 드러내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슬픔을 억누르고 보인 침착함이었다.
이운예가 은은한 미소를 사방에 발산하며 마음속으로 멀리 산 정상을 떠돌고 있을 황제의 영혼에게 인사했다.
‘오라버니 잘 가요.’
그런 뒤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황태자와 2 황자와는 다르게 그녀는 감찰원과 범씨 집안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더 높은 곳에 서서 더 멀리 내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친 말을 타고 3, 4천 리 길을 달려 경도로 오고 있었다. 확인이 끝난다면 이후 일은 물이 흐르듯이 쉽게 해결될 것이었다.
폐하가 죽은 이상 모든 일이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황태후가 범한이 황제를 암살했다는 소식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국의 황태후인 이상 그녀는 결국 그 소식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장 공주는 옆에서 황태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황태자와 2 황자 중에 누가 용상을 차지할지에 대해서 장 공주 이운예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그 사람의 죽음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도울 수 있었듯이 그가 자신을 내쳤을 때 죽일 수도 있었다.
마차 안에 탄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다가 돌연 울음을 터뜨렸다.
* * *
성문 나뭇가지에 맺혀 있던 빗물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 경도에 급보 세 통이 동시에 도착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황성과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물샐틈없이 방어를 섰고, 경도부는 치안 유지에 특별히 신경을 썼으며, 감찰원이 이상할 정도로 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경도 백성들은 평상시와는 다른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추측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는 정보들도 많아졌지만, 그들은 이것들을 모두 믿을 수 없었다.
서민들의 반응은 황족이나 귀족들의 반응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상황을 더 직설적이고 정확하게 봤다. 그들이 아는 건 경국 폐하가 좋은 황제였다는 거였다. 최소한 경국 백성들의 삶을 안락하고 윤택하게 해준 보기 드문 좋은 황제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슬픔에 겨워 통곡하느라 앞으로 나라의 상황에 어떻게 될지,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백성들의 마음속에도 의혹은 있었다. 이들은 작은 범 대인이······· 천 번 죽여도 시원치 않은 반역자란 사실을 절대 믿지 못했다.
관원들도 처음에는 그 소식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범한의 직속 흑기들이 지금까지도 보고하러 오지 않았고, 담주에 정백해 있던 관선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대동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증인은 범한이 주모자라 말했으며 그를 뒷받침할 수많은 증거가 황궁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확증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충분한 증거였다.
범씨 집안은 이미 감시를 받고 있었다.
국공부 저택도 감시를 받고 있었다.
언제 참혹한 피바람이 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황궁에서 황태자가 황위 계승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곧 폐위될 운명이었던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하다니······· 역사에서도 등장하지 않을 황당한 일이었다.
이때 전체 봉쇄에서 절반 봉쇄로 바뀐 동성문 앞에 삿갓을 쓴 콩기름 상인이 나타났다. 궁방사 문서를 이용해 어렵사리 관문을 통과한 그는 모퉁이를 돌아 어느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객잔 창문으로 희미하게 병사들에게 포위당한 범씨 집안의 두 저택이 보였다. 삿갓을 벗고 멀리 저택을 바라보던 상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을 두어 번 내뱉었다. 순간 그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 * *
가을비가 여러 번 내려서 그런지 창밖 가을 풍경은 훨씬 짙어져 있었고, 경도 귀족 저택 지붕에도 물기가 가득했다.
범한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창밖에서 시선을 거둔 그가 거친 숨을 고른 뒤 침대에 앉았다.
경도 남성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 객잔의 이불은 두껍지는 않았지만,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매끄러운 이불 감촉을 느끼다가 한숨을 쉬었다.
대동산에서 연소을의 공격을 받은 범한은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이후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오는 연소을을 저격총으로 죽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은 그는 지금 다시 경도의 익숙한 거리 풍경을 바라보니,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격총을 이용해 연소을을 죽이는 데 성공한 그는 풀숲에서 이틀 동안 중상을 입은 몸을 치료하며 기력을 회복해야 했다. 충분한 힘과 기력을 회복한 그는 이후 산들 사이에 난 이름 모를 작은 길들을 통해 움직였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여러 난관을 극복한 범한은 오죽이 알려준 작은 길을 통해 동이성의 비호를 받는 송나라로 들어갔다. 송나라는 작은 제후국이었고, 상처가 낫지 않는 상태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그곳 여관 심부름꾼에게 부탁해 약을 구해 치료했다.
그는 천하제일의 의술 실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지만, 비개의 제자인 만큼 칼에 다친 상처를 치료하거나 독을 해독하는 방면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데 필요한 약만 구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의 체내에 있는 난폭한 패도의 정기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면 천일도를 움직여 치료할 수 있었고, 덕분에 상처는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연소을의 화살을 정말이지 대단했다. 비록 그의 심장을 명중시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심맥에 큰 충격을 입혔고 이에 기침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났다.
자신의 지금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는 범한은 가장 상태가 좋아도 6할 정도의 실력밖에는 발휘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송나라를 떠나 연경의 남쪽을 지나던 그는 지나가는 마차를 빌려 타고 경국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빙 둘러서 오는 바람에 범한이 콩기름 상인으로 위장해 경도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급보가 전해지고 며칠이 지난 뒤였다. 먼 길을 힘들게 오느라 점차 좋아지던 상처도 완전히 낫지 못한 상태였다.
범한은 조심하느라 감찰원 부하들에게 연락하지 않았지만 지난 2년 동안 포월루에 구축한 정보망을 통해 마침내 정보를 보고 받을 수 있었고, 경국 영토에 들어온 뒤에는 경도에서 발생한 일들과 가장 처음 이루어진 조치들을 모두 알 수 있었다.
범한이 감찰원 부하들과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온전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경도 귀인들은 자신에게 역모자라는 누명을 씌울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감찰원 제사라는 지위를 이용한다고 한들 황제를 암살한 역모자에게 어찌 충성을 할 수 있겠는가?
범한은 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 싶지 않았고, 설사 감찰원 부하들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오후 밖으로 나간 그는 경도 거리를 한 바퀴 돌며 많은 일을 확인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했기에 약방에는 가지 않고 3처의 비밀 창고에 들어가 자신에게 필요한 약물을 가져왔다.
3처는 항상 엄청난 양의 약물이 있어야 했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약에만 미친 괴물들이라서 쥐도 새도 모르게 가져가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객잔으로 돌아온 범한은 상처를 치료한 뒤 두 다리를 차가운 물에 담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그가 낮에 변장하고 살펴본 곳들은 모두 금군과 경도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특히 범씨 집안 부근에는 고수들이 많이 있어 안에 있는 사람과 연락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는 감찰원과 추밀원 주변도 둘러보았다. 감찰원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 보였지만, 감찰원이 궁정의 감시를 받고 있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추밀원은 무척이나 분주한 모습이었는데, 군대에서 모든 걸 통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은 황궁 안에서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황태후가 지금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 위해 영리한 선택을 했다는 걸 알아챘다. 황태후는 변경에 주둔해 있던 군대를 움직여 주변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는 어쨌든 감찰원 제사로 있었기에 경도에는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줄 부하들이 많이 있었고, 포월루를 통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굳이 많은 사람과 연락하지 않더라도 지금 경도의 상황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여러 일들을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들더니 수건으로 발을 닦고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 대들보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가 정말 죽은 걸까?’
그는 놀라움, 답답함, 실망감, 황당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정말 죽은 게 맞는다면 자신을 이제 뭘 해야 하는 걸까?
범한이 손을 들어 가슴 속에 잘 숨겨둔 폐하의 친필 서안과 옥새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은 무척이나 위험했고, 지금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도박인 건 마찬가지였다.
만약 황태자의 즉위를 막고자 한다면 황궁에 들어가 폐하의 친필 서안과 옥새를 황태후의 손에 건네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정말 황제가 죽은 거라면 황태후는 경국의 안정을 위해서 직접 그 친필 서안을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범한 역시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황태후의 손자였지만 황태후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황태후는 과거 섭경미의 일들 때문에 그를 경계했다. 그런 황태후에게 황제의 친필 서안과 옥새를 건네준다고 해서 과연 그가 원하는 결과를 받아낼 수 있을까?
만약 그의 바람과 달리 황태후가 폐하가 암살당한 진실을 덮으려 한다면 범한과 그의 주변 사람들은 황태자의 즉위를 위한 첫 번째 제물이 될 터였다.
물론 다른 선택도 있었다. 범한이 경도에 있는 조력자들과 연락해 대동산 암살 사건의 진실을 폭로한 뒤 정면으로 싸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누가 이기든 맨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이 역사를 정할 자격을 갖게 될 것이었다.
이 선택을 한다면 많은 사람이 죽겠지만 범한 자신은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범한이 아버지나 진평평 대인과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진 원장 대인은 감기약을 잘못 먹어 독에 중독되어 누워 있는 중이었다.
범한은 진평평이 독에 중독된 척 위장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독에 중독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몰래 훔쳐본 정보에 따르면 독을 탄 사람은 동이성의 대가였다. 그는 이미 죽은 소은과 어디론가 떠나버린 비개와 함께 천하 3대 독술사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만일 정말 동이성 대가가 직접 나서서 진평평을 독에 중독시켰다면 그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폐하가 암살을 당한 뒤 모든 동정이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록 아직은 황궁에서 범한을 황제를 암살한 진범이라 밝히지 않았고 조정이 체포 문서를 배포하지도 않고 있었지만, 암암리에 그는 이미 첫 번째 목표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범한이 경도에서 모습을 나타낸다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사방에서 사람들이 달려들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범한에게 가장 불리한 건 연소을이 패배했고, 범한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 이틀 안에 경도로 전해지리라는 거였다. 그렇다면 황태후는 범한을 믿든 믿지 않든 일단 잡은 뒤 경국의 미래를 위해 죽일지 살릴지를 선택을 결정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