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2화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 (1)
하지만 의 귀빈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믿을 수 없는 건 황제 폐하가 돌아갔다는 소식이 아니라 작은 범 대인이 황제를 죽였다는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나도 허무맹랑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황태자를 폐위하기 위해서였고, 그러니 하늘에 제사가 끝난 뒤 범한의 지위는 더욱 안정될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무엇 때문에 이런 황당 무지한 행동을 벌인단 말인가?
의 귀빈이 정말 두려운 것은 범한에게 드리운 그물이 수방궁에게까지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씨 집안 출신인 그녀는 범씨 집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고, 범한은 폐하가 3 황자의 스승으로······· 직접 지명한 사람이었다.
만약 범한이 정말 반역의 주범이라면 범씨 집안사람들은 모두 참형 당할 것이고 유씨 집안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의 귀빈이나 3 황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머니! 어머니!”
이제야 소식을 들은 3 황자가 울먹이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의 귀빈의 품에 안긴 3 황자가 동년배들보다 성숙한 눈동자로 조심히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의 귀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낙심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3 황자는 입을 꾹 다물고 억지로 참았지만 그래도 입술 사이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의 귀빈의 품에 안겼다.
잠시 뒤 의 귀빈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아들을 향해 말했다.
“울지 말거라. 울지 마.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부황께서는 영웅의 기질을 타고난 군주셨으니 너도 울면 안 됩니다.”
눈물을 닦은 3 황자 이승평이 어미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서 자랐고 또 범한을 따라 1년 동안 강남에서 세상 경험을 한 3 황자는 9살 때 기생집을 열면서 보였던 포악무도한 기질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이에 그는 어머니의 말에 담긴 중요한 의미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경도에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폐하를 암살한 사람이 작은 범 대인이라고 하는 구나.”
의 귀빈이 아들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3 황자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금방 평정심을 회복하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런 짓을 벌일 사람이 아니십니다. 게다가······· 그러실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의 귀빈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맞아. 군대와 주군에서 보내온 내용이 일치하기는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 네 스승은 폐하가 가장 신임한 신하였지 않니.”
“우리만 믿지 못하는 게 아니야.”
의 귀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황태후 마마도 전해온 소식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고 계신단다. 그렇지 않았다면 범씨 집안은 이미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족들은 능지처참을 당했겠지.”
3 황자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 귀빈이 목소리를 죽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황태후 마마께서는 정보를 완전히 믿지 못하시면서도······· 범 상서 대인을 당장 입궁하라 하시고, 신 군주와 사사도 궁에 불러들이셨단다. 만약 황태후 마마께서 대동산에서 부황을 암살한 범인이 작은 범 대인이라 믿고 계신다면 황궁에 부르지 않고 즉시 범씨 집안과 유씨 집안을 사람들을 참수했겠지.”
“소자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3 황자가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스승 범한과 하나로 묶여 있으므로, 이대로 스승이 황제를 암살한 반역자가 된다면 자신의 앞날 역시 밝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울고, 슬퍼하며 황태후를 모셔야지······.”
한숨을 내쉬며 답한 의 귀빈이 슬픔에 겨운 표정을 지으며 3 황자를 끌어안았다.
“대동산 일을 하루 만에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니 네 스승이 경도에 오기 전까지는 황태후 마마께서도 당장 범씨 집안을 건들지는 못하실 테니 우리는 황태후 마마를 모시면서······· 네 스승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구나.”
3 황자가 잠시 생각하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3 황자와 의 귀빈은 범한을 누구보다도 신뢰했기에 그가 경도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이 모든 일이 깨끗하게 정리될 거라 믿었다.
궁 밖에서 태감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 귀빈이 넋이 나간 얼굴로 함광전으로 거처를 옮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3 황자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 아래서 범한이 준 독을 바른 비수를 꺼낸 뒤 조심히 장화 안에 숨겼다.
그는 어머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고, 함광전이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부황이 남긴 용상을 차지하기 위해서 두 형님이 무슨 미친 짓을 벌일지 누가 알겠는가?
* * *
황태자 이승건이 천천히 옷차림을 정돈했다. 그의 얼굴에는 미친 듯이 기뻐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황궁에 전해졌을 때 황태자인 그 역시 다른 황자들이나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슬픔에 겨워하며 엎드려 통곡했다.
슬픔에 잠긴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창백해 보였다. 동궁 문 앞에 선 그가 멀리 동쪽 저녁 하늘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눈에서 눈물 두 방울이 떨어졌다.
한참 뒤 그가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사였다.
“아버지, 저는 불효자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넣으셨지 않습니까.”
홍죽은 시위들을 이끌고 황후와 황태자를 함광전으로 안내하기 위해 동궁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동궁 문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반쯤 넋을 놓고 있는 황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가 미간을 찌푸려 억지로 자신의 진심을 숨긴 뒤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어마마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황후는 반년 동안 동궁에 갇혀 있으면서 이전의 화려했던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더구나 황후는 황제와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폐하가 대동산에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이에 그녀는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초점 없는 눈동자로 어슬렁어슬렁 주변을 걸어 다니거나 믿을 수 없다 표정을 지으며 소식이 사실인지 확인하거나 평상에 무기력하게 앉아 눈물을 흘렸다.
“네 부황께서 서거하셨어······.”
황후가 생기 없는 눈동자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소자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입니다.”
황태자가 슬픔에 잠긴 얼굴과는 다르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황후는 순간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번쩍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던 그녀가 무언가 알아챈 듯 입을 쩍 벌렸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하늘에 제사를 끝 맺히지 못했습니다.”
황태자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소자가 명분에 따라 경국의 다음 황제가 된다면 어마마마께서는 황태후가 되시는 겁니다.”
아들의 말에 황후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바르르 떨며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그래, 그래, 그래······· 범한, 그놈은 천벌을 받아야 한다. 내······· 내가 뭐랬니. 불길한 놈이라 하지 않았니······. 우리 이씨 집안이······· 그놈과 그 어미 때문에 망가졌어······. 좀 있다가 함광전에 가면 황태후 마마께 범씨 집안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모두 참수시키라 간청을 드려야겠다! 아니! 범씨와 유씨 집안 모두 참수시키고 진평평, 그 늙은 개도 죽여야 해!”
황태자가 잡고 있던 황후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이에 손에서 통증이 느껴지자 황후가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한 글자씩 강조하며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절대 그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용상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으시다면 절대 아무 말도 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범한이 부황을 암살했다는 소식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마마마께서 나서신다면 사람들은 더 믿지 않게 되겠지요. 그러니 저희는 함광전에서 가만히 기다려야 합니다. 4, 5일 안에 증인과 증거가 모두 도착할 것이고 그러면 어마마마께서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황태후 마마께서 알아서 움직이실 겁니다.”
황후가 몸을 떨며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자기 아들을 바라봤다.
황태자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좀 있다가 진항 대인이 입궁하면······· 황태후께 잘 말할 것입니다.”
* * *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저택에서 2 황자 역시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슬픔에 겨운 얼굴로 의복을 정돈하고 있었다.
천자의 아들 중에서 연기에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2 황자는 그간 많은 일을 겪으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다.
옆에서 냉담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비 섭령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믿기십니까?”
2 황자가 손을 내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믿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범한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지요.”
섭령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어째서······· 그런 터무니없는 소식이 들려온 걸까요?”
“영리한 사람이라면 그런 터무니없는 소식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2 황자가 고개를 숙이고 눈처럼 하얀 소매를 말아 올렸다. 그는 오늘 수수해 보이는 옅은 색 홑옷을 입고 있었다.
“저는 증거가 있기 전까지는 범한이 그런 미친 짓을 벌였다는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마음이 놓인 섭령아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궁에 들어가시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2 황자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내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부황께서 서거한 소식을 비밀에 부치고 있는 건 대동산에서 정확한 소식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입니다. 이후에는 나라 전체가 서거를 애도하고 황태자가 용상에 오르겠지요. 저는 예나 지금이나 그저 볼품없는 2 황자일 뿐입니다.”
“만족하실 수 있으십니까?”
뜻밖의 말을 들은 섭령아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2 황자가 잠시 아무 말 없이 아내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속이고 싶지는 않으니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대동산 사건을 계획한 배후에 황태자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놀란 섭령아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2 황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독였다.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말을 마친 그가 저택 밖 구석진 곳으로 걸어가서는 자신의 측근을 불러 지시했다.
“장인어른께 경도로 들어올 준비를 하시라 전하게.”
그렇다. 부황이 죽임을 당했다. 저택 문 앞에 선 2 황자는 파란 하늘에서 내리쬐는 아름다운 빛이 자신의 머리를 비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리 위를 짓누르던 사람들이 사라진 2 황자는 어느 때보다도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가 대동산에서 벌어진 일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유는 장 공주가 그에게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황태자가 용상에 오르라면 오르라지. 범한이 죽었든 살았든 그의 뒤를 지켜주고 있던 늙은 여우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과연 그 용상을 지킬 수 있을까?’
2 황자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황태자가 잠시나마 용상에 앉을 수 있도록 도운 뒤 감찰원과 범씨 집안의 강력한 권력에 황태자가 시달리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훗날 부황의 살해를 주도한 사람이 황태자라는 게 알려진다면 과연 그때도 용상을 지킬 수 있을까?
* * *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황제 폐하가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이들은 아주 잠깐 놀란 뒤 곧이어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이후 일들을 계획해 나가기 시작했다. 용상에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준비를 시작했고, 용상을 누구에게 줄지를 결정할 자격을 가진 사람들은 몰래 연락을 주고받았다.
황태후가 신속하게 관련 사람들에게 입궁하라 명했지만 그래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시간은 충분했다.
사람들은 모두 잊은 것 같았다. 서거한 사람이 경국 개국 이래로 가장 강력한 군왕이었으며, 국도를 20여 년 동안 통치한 지존이었고, 모든 경국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눈앞의 이익에 내뿜는 달콤한 향기에 취한 이들은 흥분과 불안에 휩싸인 마음을 애써 슬픈 것으로 위장할 뿐 정말로 슬퍼하고 있지는 않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