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9화 대행(大行) (2)
산 정상 주변 나무들이 인간 세상의 군주에게 절을 하는 것처럼 쓰러졌다. 사원 처마 위에 종은 가볍게 흔들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지면의 황토는 강대한 힘에 눌려 잔뜩 움츠린 채 천천히 청색 돌 틈 사이로 들어갔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소리가 공포스럽고 단단한 장벽 안에 봉쇄되었다. 천둥이 치는 소리나 빗방울이 땅을 적시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내는 소리를 귀로는 들을 수가 없었다.
인류는 항상 9품의 경지를 넘은 실(實)과 9품의 경지를 돌파한 세(勢)가 전부 드러난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궁금해했다. 오늘 대동산 정상에서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있는 다섯 명이 동시에 모여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위력은 인류의 범주를 초월해 아득히 먼 하늘의 무한한 이치에 근접한 것이었다.
거센 바람이 소리도 냄새도 없이 불었다.
거센 비가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빗물이 고하의 노쇠한 얼굴을 떼렷다. 그의 체내에 있는 순수한 정기를 만난 빗물은 부서지지 않고 부드럽게 흘러 그의 삼베옷과 맨발을 적셨다. 산 정상에 부는 거센 바람에 그의 옷이 펄럭였다. 그는 산과 하나가 된 듯이 굳건하게 서서 비와 바람을 아무런 저항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연스럽게 비와 바람과 하나로 섞인 모습이었다.
세를 빌려, 산의 세를 빌려, 바람의 세를 빌려, 비의 세를 빌려 부드럽게 난폭함의 극치인 패도의 정기와 맞서고 있었다.
늙은 홍 태감은 한 손으로 경제를 끌어당기며 온몸을 꼿꼿하게 펴고는 체내에 있는 패도의 정기를 전부 내보냈다. 그의 긴 수염과 머리카락이 머리에 쓰고 있던 내관 모자를 찔렀고, 그의 옷은 바람과 반대 방향으로 나부꼈다. 귀신도 놀라 뒷걸음을 칠 만큼 엄청난 패도의 정기는 산과 바람과 비를······· 모두 산산조각 부숴버릴 것만 같았다.
고하 대사의 눈빛이 갑자기 심상치 않게 변했다. 천일도의 온화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눈빛이었다. 그가 입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몸은 비바람에 힘없이 흔들리면서도 전혀 나약해 보이지 않았다.
현장의 네 개의 세력 중에서 유일하게 늙은 홍 태감만이 모든 힘과 엄청난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 기세에 놀라 부서진 빗물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그와 황제 주변을 감쌌다.
패도의 정기는 지속될 수 없었고, 더욱이 하늘의 이치에 반하는 패도의 정기는 오래갈 수 없었다. 늙은 홍 태감의 눈빛에 특별한 광채가 비쳤고, 그의 얼굴은 수십 살을 젊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소모해 대종사들의 공격을 늦춤으로써 오죽에게 황제를 구할 기회를 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죽이 빗속에서 검은 천이 빗물에 젖도록 내버려 둔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래서 사고검은 귀신처럼 검은 그림자를 그리며 오죽과 경제 중간에 섰다.
그리고 사고검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세를 응축한 채 고개를 숙여 삿갓 아래 자신의 얼굴을 숨겼다. 마치 삼베옷을 입은 난쟁이가 자욱하게 내리는 빗물 속에 완전히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거세게 퍼붓는 빗물도 그의 손에 들린 검을 잠기게 할 수는 없었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오죽이 사고검이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빗물 속에서도 여전히 차가운 빛을 번뜩이던 검이 순간 희미해졌다.
사고검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체내에 있는 흉포한 정기를 강제로 뿜어내기 시작했고, 삼베옷에 뚫린 수백 개의 크고 작은 구멍을 통해 밖으로 전해졌다.
그의 삼베옷에 난 수백 개의 구멍은 검 하나로 백여 명의 호위를 죽인 대가였다.
사고검의 정기는 마치 실재하는 듯 그의 삼베옷이 찢어져서 난 구멍을 통해 분출되었다. 비록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구멍 주변이 진동하는 모습에서 그 실체를 느낄 수 있었다. 정기의 파편이 그의 뒤로 방출되어 곡선을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춤을 추듯 흩날렸다.
빗물을 데리고 공중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투명한 빗물이 날카로운 파편으로 변해 소리 없이 춤을 추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비로워 보였다.
고개를 살짝 숙인 오죽이 허리춤에 있는 쇠막대기를 움켜쥐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고검 주변을 맴도는 날카로운 빗물 파편들의 춤은 갈수록 격렬해져서 주변의 모든 활기를 없앴고, 이에 산 정상에는 절망과 살기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고검은 검을 뽑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멍청하고 고집스러운 검이었기 때문이다.
섭류운도 검을 뽑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검은 이미 산 절벽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있는 다섯 명의 대종사급 절대 강자들 가운데 섭류운은 외로운 돛단배와 같은 신세였다.
그는 경국인이다.
그는 섭씨 집안의 수호신이다.
그는 경국 폐하가 아저씨라 부르는 인물이다.
그는 경국의 황제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그는 철을 자르고 옥을 끊고 구름을 부수고 바람을 잡을 수 있는 양손을 소매 안에 넣은 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맨 처음 움직인 사람은 고하 대사였다. 그가 한쪽 다리를 가볍게 움직여 늙은 홍 태감 옆으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산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늙은 홍 태감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왼손에 중지를 살짝 구부렸다.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오로지 패도의 정기로 상대방의 세를 무너뜨리려는 모양이었다.
산이 쪼개졌다.
비가 내렸다.
고하가 합장하자 하늘 가득 퍼붓는 빗물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수십 년은 젊어진 홍 태감의 뺨을 때렸다.
빗물이 홍 태감의 뺨을 때리자 반들반들한 얼굴에 몇 가닥 주름이 지며 늙은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빗물은 그 즉시 증발해 버렸다. 홍 태감이 집게손가락을 펴고 앞에 공중을 향해 두드렸다. 어떤 소리나 기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빗물이 좌우로 갈라지고, 푸른 돌판도 갈라져 아래 웅크리고 있는 황토가 드러났다. 황토도 그 난폭한 정기를 견디지 못하고 수많은 알갱이가 하나로 뭉쳐 습한 물기를 밀어냈다.
고하가 낙엽처럼 뒤로 날아갔다. 그가 방금까지 밟고 있던 청색 돌판은 사라진 상태이었고, 그 아래 있는 황토는 폭우에도 모래처럼 메말라 있었다.
고하는 수십 년 동안 경국 황궁에서만 지냈던 저 사람이 오늘 죽을 각오를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살짝 울적해졌다. 그런 각오가 없다면 이처럼 강경한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강렬한 패도의 정기는 설사 대종사라 할지라도 잠깐만 발산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낙엽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그가 홍 태감을 오른손을 꽉 잡더니 마치 사원의 담장에 붙은 젖은 낙엽처럼 바짝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홍 내관의 눈썹이 움찔움찔했다.
고하의 옷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쉴 새 없이 변형되다가 빗물 사이를 통과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 오랫동안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 * *
삿갓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로 만들어진 작은 폭포가 사고검의 얼굴을 가렸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을 느슨하게 펴며 검 손잡이를 놓았다. 비바람 속에서 손가락 두 개를 펼쳐 하늘 끝을 가리켰지만,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을 긋자 주변 비바람이 갑자기 혼란해지면서 검의가 폭발했다.
그의 손에 있던 장검은 천천히 획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지다가 절반쯤 떨어졌을 때 갑자기 공주에 멈추고 광채를 내뿜었다. 검 손잡이부터 검 끝까지 이어진 광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살의를 내뿜었다.
지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덩이가 나타났다.
고개를 살짝 숙인 오죽은 엄지손가락으로 집게손가락을 누르며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쇠막대기를 꽉 움켜쥐었다.
* * *
섭류운은 자신이 반드시 나서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최후의 일격을 자신이 완성하는 것은 협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눈빛은 이미 결심이 선 듯 담담했다. 그가 소매에서 옥처럼 하얀 손을 꺼냈다.
섭류운이 모든 힘을 싣고 움직이자 세력의 균형이 순식간에 깨졌다. 홍 태감의 패도의 정기로는 세 대종사의 협공을 막을 수 없었다. 현묘한 결계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작은 구멍이었지만 모든 걸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주변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묵직한 소리가 고사 대사와 홍 태감 사이에 울렸다. 방금 전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정기가 충돌하면서 나온 소리가 이제야 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천둥과 같고 풍운과도 같은 소리였다.
고하의 양어깨 위의 삼베옷이 산산이 찢어져 핏자국이 가득한 노쇠한 어깨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평온하고 안정적이었고, 양손은 홍 태감의 오른손을 잡고 있었다. 낙엽이 다시 산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이상해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주 자연스러운 흔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국사의 오른손 손바닥이 가볍게 홍 태감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홍 태감의 얼굴이 더욱 노쇠해졌다.
순간 홍 태감의 가슴에 격렬하게 팽창되기 시작했다. 천지의 기세를 품은 고하 국사의 손바닥도 같이 떨리기 시작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고하가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렀다.
황제가 한숨을 쉬며 잡고 있던 홍 태감의 손을 놓았다. 한동안 조용하던 산 정상에 처량하면서 침착한 한숨 소리가 울렸다.
“물보라는 잠깐 피었다가 사그라지지만, 천년의 바위와 견주어도 다를 바 없지요. 흘러가는 구름 또한 이러하고, 폐하도······· 이러하시지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섭류운이 이렇게 말하며 순식간에 경제 앞으로 다가왔다. 이때 고하는 홍 태감을 상대하고 있었고, 사고검은 오죽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황제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걸 막을 사람이 없었다.
바로 그때 번개가 산 정상을 내리치더니 엄청난 빗소리가 울렸다.
번개가 내리치자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순식간에 번쩍하고 주변을 밝아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사고검은 맞은 편 오죽이 쥐고 있는 쇠막대기를 놓는 걸 보았다.
사고검이 히죽 웃었다. 그의 두 손가락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의 옆에서 계속 둥실둥실 떠 있던 장검이 순간 ‘휙’ 소리를 내며 날아가더니 반원형을 그리며 경제의 등을 찔렀다.
앞에는 섭류운이 있고, 뒤에는 사고검의 정기가 응축된 검이 있었다. 설사 대종사라도 대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제 모든 게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경제가 홍 태감의 손을 놓은 이유는 늙은 태감이 자신 때문에 대종사와의 대결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떨면서도 표정만은 침착했다. 이미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법이었다. 황제 폐하의 입술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처량해 보였다. 빗물에 젖은 용포에 새겨진 용은 지금 상황이 달갑지 않은 듯 구름 사이를 헤치며 발악하는 것 같았다.
번개가 번쩍이고 곧이어 ‘우르릉 쾅쾅’하는 천둥소리가 산 정상에 울렸다.
경국 황제는 의연하게 정상에 서서 죽음을 기다렸다.
이때 무기력하게 빗속에 서서 억장이 무너지는 장면을 지켜보던 경국 대신들과 제사들이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