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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88화 (688/1,108)

688화 대행(大行) (1)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공과 가장 강한 권력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건 정말이지 다시는 없을 장면이었다. 이 땅의 역사에서 출현한 적 없던 장면이자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다시는 출현하지 못할 장면이었다. 이런 장면은 사람들의 환상 속이나 북제 이야기꾼들의 말속이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장면이 늦여름 대동산에서 출현했다.

게다가 그들의 목표는 경제였고, 오래된 사원 문 앞에는······· 4대 종사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장님이 서 있었다.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 장님 말이다.

* * *

“폐하를 뵙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산 정상에 나타난 대종사는 삼베옷 차림에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복사뼈까지 내려온 삼베옷 자락 밑에 먼지 하나 묻지 않는 발이 보였다.

황제가 살짝 허리를 굽혀 예를 표시했다.

“1년 반 동안 국사를 보지 못했는데, 국사의 기력은 갈수록 더 좋아지는 것 같군.”

고하가 쓰고 있던 삿갓을 벗자 반들반들한 머리와 평온함이 느껴지는 이마 주름이 드러났다. 그가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의 기력도 좋아 보이십니다.”

황제는 놀랐던 마음이 이미 많이 진정시킨 상태였다. 오죽과 사고검이 등장했으니 고하가 오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자신이 고민 끝에 살려둔 누이가 이렇게 큰일을 벌였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모르겠군. 운예가 도대체 무슨 능력으로 자네들을 설득한 건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던 황제가 당당하게 말했다.

“군주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네. 천자인 짐이 평범한 사람들과 같을 수 없지. 자네들은······· 짐이 죽은 뒤 일어날 천하의 혼란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경국 황제가 이대로 죽는다면 장 공주가 경도에서 상황을 어떻게 통제하든 상당한 타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마음이 두 갈래로 찢기는 것과 같은 엄청난 슬픔과 분노를 느낄 것이었고, 경국 조정과 민간은 충격을 극복하고 내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슬픔과 분노를 외부로 발산하려 할 것이었다.

경국 황제는 침착함은 바로 시세에 관한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터다. 자신이 대동산에서 암살을 당하는데 외국 세력이 가세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조정 관리들의 충성심과는 별개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것이었다.

경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해 동안 혈기 왕성한 민중을 길러냈다. 그러니 백성들이 경제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나 경국 전체가 엄청난 살기로 들끓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과연 북제와 동이성이 그걸 막아낼 수 있을까? 아무리 대종사라도······· 천하 전체에 불어 닥친 피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짐이 죽으면 천하 사람들도 죽을 것이네.”

황제가 웃으며 멸시하는 눈빛으로 세 명의 대종사를 바라봤다.

“자네들 세 명은 백성의 수호자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고하 자네는 북제를 지키고 있고, 사고검은 동이성을 지키고 있지. 자네들이 이 자리에서 짐을 죽인다면 앞으로 자네 백성들은 죽고, 굶주리고, 모욕당할 뿐만 아니라 집을 잃고 유랑민으로 떠돌며 오랜 시간 고통받아야 할 거네······. 정말 그런 고통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고하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폐하를 살려 드린다면 앞으로 군대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천하에 큰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황제가 천천히 말했다.

“20년 동안 천하에는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자네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고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폐하는 용병술이 뛰어나시고 경국의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습니다. 폐하가 만백성을 아끼시어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세계에 아직 저희 늙은이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천하통일을 한다고 해도 저희가 언제든지 천하를 분열시킬 수 있으니까 폐하께서는 움직이지 않으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네. 짐은 자네들이 늙고,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황제가 눈꺼풀을 내려뜨리며 담담히 말했다.

“짐은 자네들보다 젊으니 기다릴 수······.”

“저희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고하가 한숨을 내쉬며 경제의 말을 끊었다.

“저희가 죽으면 누가 천하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경제의 날카로운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더니 미간에 냉혹함과 포악함이 깃든 주름이 잡혔다.

“평화라 했는가? 짐만이 천하의 평화를 이룰 수 있네! 자네 세 명은 천하의 흐름도 읽지 못하고 죽일 줄만 알면서 천하 만백성들에게 태평성세를 안겨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가장 마지막에 산에 올라온 북제 국사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경국 황제에게 말했다.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천년 뒤 역사가 오늘 대동산에서 벌어진 일을 뭐라고 평가할지, 먼 미래 백성들의 삶이 어떠할지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건 지금 당장 천하가 평화로운 것입니다.”

고하가 양손을 모으며 말했다.

“저희 세 명은 늙어 죽기 전에 천하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짐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경제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돌려 섭류운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는 경국의 사람이자 작은 뗏목을 타고 천하를 주유하며 거리낌 없이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까. 짐이 죽는다고 천하가 태평할 것 같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우리 경국이 남벌과 북벌에서 죽인 사람 중에 최소 3할은 섭씨 집안이 죽인 거라는 사실을!”

경제는 섭류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사고검을 향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어떤가? 풀을 베듯 사람을 베는 검에 미친 사람이 어찌 천하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가 가족을 모두 죽인 이유가 동이성의 평화를 위해서였나?”

경제가 마지막으로 경시하는 눈빛으로 고하를 노려보았다.

“천일도는 고행을 하기로 유명하지만, 정작 고행자를 배출해 내지는 않고 민중의 공양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자네들이야말로 민중을 좀 먹는 해충들이네. 전명월(戰明月)!”

경제가 큰소리로 외쳤다.

“머리를 깎았다고 해서 자네 손에 묻은 붉은 피가 씻길 거라 생각하지 말게나.”

“아저씨, 단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짐도 오늘 여기서 아저씨를 죽일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짐을 죽이려 하는 것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사고검, 언젠가는 자네가 그동안 지켜온 동이성을 짐을 무너뜨렸을 거네. 그러니 짐을 죽이려 하는 것도 당연하지.”

“고하, 북제 국사인 자네가 이렇게 나선 건 짐은 북제를 정복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니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겠지.”

“자네 세 명 모두 짐을 죽여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고, 짐을 죽일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비웃고 싶은 마음을 누르지 못한 채 세 명의 대종사를 바라보았다.

“모두 자신만의 얄팍한 속셈을 품고 있으면서 굳이 천하 만백성을 위한 거라 꾸밀 필요가 있는가? 삿갓을 쓰고 삼베옷을 입는다고 백성이라고 생각하는가? 틀렸네! 자네들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괴물들일 뿐이야.”

경제가 대종사 세 명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만백성을 위해 짐을 죽일 자격이 자네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경제가 소매를 가볍게 털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경멸과 조롱이 담긴 웃음소리였다. 그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대종사들을 조롱하고,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도 막을 수 없는 하늘이 내린 숙명을 비웃고 있었다.

“그래, 하늘의 뜻은 원래 공평하지 못한 것이지. 세 명의 필부가 짐의 큰 계획을 방해하려 하다니 말이야. 20년 동안 짐은 항상 하늘에 물어왔네. 어째서 천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백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괴물들이 왜 하필 짐이 통치를 할 때 나타난 거냐고······.”

천하에서 가장 권력이 많은 중년 남자가 웃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뭘 더 기다리고 있는 겐가?”

늙은 홍 태감이 숨을 고르기 시작하자 경국 황제가 머리를 들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3대 종사의 포위를 받고 있으면서도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만일 다른 누군가가 그와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이성을 잃고 날뛰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경제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당당하고 차분하게 말했고, 표정이나 눈빛에서도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다가도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고, 어떨 때는 아쉽다거나 안타깝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종사 세 명을 각자 지목해 비꼬고 질타하면서 안하무인의 모습을 보였다. 오랜 시간 천하에서 제일 권력자로 군림한 그는 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힘 앞에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제왕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더욱이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자신이 가진 패기와 결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는 이미 20년 전에 천하통일의 의지를 드러냈고, 이 대업을 완성할 능력도 가지고 있는 만큼, 대위가 멸망한 이후 또 다른 거대 국가를 탄생시킬 꿈을 품고 있었다.

만약 그대로 되었다면 경제는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20년 전 천하통일을 향한 경국의 발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왜냐하면, 경국이 대위를 대신해 천하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무술 실력이 급격히 향상되었고, 30년 전을 시작으로 기존에는 없었던 대종사들이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인류 역사에 단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었던, 국가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괴물들이 탄생했다.

이와 같은 엄청난 힘을 가진 대종사가 출현하자 고집이 센 경제도 어쩔 수 없이 무기를 거두었고, 천하는 잠시나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뭘 더 기다리는 것인가?”

경제가 비꼬는 말투로 다시 물었다.

“당당한 대종사들도 짐이 두려운 것인가? 전명월, 줄곧 종적을 감추고 있었던 이유가 짐이 운예와 손을 잡았을까 걱정해서 그랬던 것인가?”

경국 황제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재주가 있었다. 설사 상대방이 심오해 깊이를 알 수 없는 대종사라 할지라도 말이다.

고하가 은은한 미소를 짓자 머리 위 먹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비치었다. 마치 그와 이 산과 하나가 된 듯한 모습이었다.

“솔직히 북제와 동이성이 폐하와 장 공주 마마의 계략에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 이번 기회가 좋은 기회인 건 분명했지만 세 대종사들은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그들은 장 공주가 갑자기 세력을 잃고, 황태자가 폐위된 것이 경국이 꾸며놓은 모략이 아닐지 걱정했고, 그래서 경국 내부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산을 포위하고 있는 연소을의 반란군을 다른 장군이 지휘하고 있다는 점이 이미 이 모든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 * *

파도가 심상치 않게 일더니 대동산 정상에 드리운 먹구름이 점차 커져갔다. 결국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지평선까지 먹구름이 드리웠고, 하늘색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어떠한 힘이 구름들을 움직이고 서로 뒤엉키게 만드는 것 같았다.

먹구름이 드리우자······· 곧이어 엄청난 바람이 불었고, 천지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천둥이 쳤다. 그리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먹구름이 가장 두텁게 낀 대동산 정상에서는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첫 번째 빗방울이 공교롭게도 경제의 황색 용포에 새겨진 용 위로 떨어진 것이다.

빗방울이 용포에 새겨진 용의 오른쪽 눈동자에 떨어져 흐르는 모습은 용이 슬퍼 우는 것만 같았다.

세(勢)

막강한 힘을 가진 네 개의 세력이 먹구름이 낀 대동산 정상에 동시에 출현해서는 서로 간섭하고 의지하고 충돌하더니 점차 하나로 합쳐져 먹구름 안에 숨은 천둥과 힘을 겨루기 시작했다!

실(實)

실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네 개의 세력이 하나로 완전히 융합되어 현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첫 번째 빗방울이 떨어질 때 대동산 정상에 있는 모든 게 통제되었다. 실세가 융합되는 경지에서 모든 생명이 자기 영혼의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다.

이 공포스러운 기세에 눌린 경국의 관리와 사원 제사들은 가까스로 땅에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무토막처럼 서 있는 이들은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했고 오줌이 마려워도 지릴 수 없었으며, 놀라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입을 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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