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화 대동산 정상에 모인 사람들 (2)
황제와 사고검이 동시에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갈수록 강해지는 바닷바람도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막아내지 못했다.
사고검의 웃음소리는 순수한 정기가 섞여 있어 바람을 부수고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황제의 웃음소리는 오랜 시간 천하의 주인으로 있으면서 기른 호탕한 기백이 담겨 있었다.
웃음소리가 뚝 끊기자 순간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두 사람 모두 이 황당한 연극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죽이는 것과 죽임을 당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인 만큼 서로 한담을 나누며 진행하는 긴 장편극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경제와 사고검은 굳이 이러한 대화를 나누는 것일까?
경제가 천천히 뒷짐을 지고 탄식했다. 그는 돌계단 위에 서 있는 두 대종사에게 시선을 거두며 천천히 말했다.
“이번 상황은 짐이 운예의 뜻에 따른 것이네. 운예가 포섭한 상황에 따라 아저씨가 여기 오래 머물도록 의도했지······. 다만 운예가 이처럼 미친 계획을 세웠을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어. 국가의 존엄도 고려하지 않고 동이성과 북제까지 끌어들이다니.”
그가 고개를 다시 고개를 돌려 조금도 겁내지 않은 눈빛으로 사고검의 삿갓 아래 그림자를 바라봤다.
“대종사는 세상일에 좀처럼 참여하지 않지만 한번 나타나면 천하게 놀랄 만한 일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런데 오늘은 두 사람이나 이곳에 왔으니 분명 엄청난 일이 일어나겠군. 짐은 죽음이 두렵지는 않지만 죽고 싶은 생각도 없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끄는 것이지······. 그런데 두 사람은 무슨 이유로 짐과 같이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인가?”
아무 말 없이 손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사고검이 약간 불안해하는 모습으로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저 내관에게 흥미를 느끼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천하에 있는 네 명의 괴물 중에서 우리 세 명은 서로 마음을 교류한 사이이지만 저 내관은 황궁 안에 숨어서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나는 섭류운을 이해할 수 있어서 그의 성정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네. 만약 그 혼자 움직일 수 있었다면 우리 같은 외국인이 경국 내정에 간섭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거야.”
사고검이 늙은 홍 태감을 향해 존경을 표하며 계속 말했다.
“저 내관이 이곳에 있어도 섭류운은 움직였을 거야.”
그가 이윽고 왜 가만히 있냐는 경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섭류운이 움직이지 않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네.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섭류운이 왜 움직이지 않는 건지 모르지만 일단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거네.”
섭류운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사고검을 향해 말했다.
“자네 아직도 느끼지 못한 건가?”
사고검은 왜소한 체격인 데다가 자기 머리보다 큰 삿갓을 쓰고 있어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산 정상에 있는 사람들은 짙은 그림자 속에 감추어져 있는 저 대종사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리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모두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풀을 베듯이 사람을 베는 사고검이 이렇게 오랜 시간 얌전히 있을 수 있다니?
사고검이 몸을 돌려 사람들 뒤에 있는 오래된 사원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려 예를 표시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자질구레한 세상일에 자네가 왜 나서는 건가?”
사고검의 시선이 자신들이 있는 쪽을 향하자 관리와 제사들은 그와 눈이 마주칠까 겁나 재빨리 몸을 피했다. 사고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피해 사람들이 갈라서자 오래된 작은 사당은 검은색 나무문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문밖에서는 검은색 옷을 입은 오죽이 마치 사당과 한 몸이 된 듯이 서 있었다.
공기를 뚫을 것처럼 서슬이 퍼런 사고검의 눈빛이 오죽의 깨끗한 얼굴과 영원히 먼지 한 톨 묻지 않을 것 같은 검은 천에 향했다.
사고검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오죽은 심드렁하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사고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경제가 다시 웃었다. 아까와는 달리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자네도 왔으면서 오죽이 온 게 불만인 건가?”
황제가 웃음을 거두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사고검을 노려봤다.
섭류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다가 사고검을 향해 말했다.
“산이 포위됐을 때 범한이 산 위에 있었으니······· 그가 나타난 거네.”
사고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산을 포위하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그는 그제야 사실을 알고는 온갖 욕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대종사의 체면이나 기개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저속한 말과 욕을 쏟아냈다.
“이 개 같은······· 운지란, 연소을 이 멍청한 새끼들! 그 기생오라비는 산을 포위할 때 산 위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사고검이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자네가 꾸민 일인가?”
사고검이 굳은 얼굴로 경국 황제를 차갑게 노려보다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범한을 데리고 산에 온 덕분에 훌륭한 조력자를 찾아냈군······· 어쩐지 조금도 겁내지 않더라니······· 아까 했던 말이 틀리지 않았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나 전쟁을 하는 건 내가 자네만 못하네. 그리고 나는 자기 자녀나 가족들을 억압하는 일도 자네만큼 잘하지 못하지.”
경제가 아무 말 없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사고검이나 섭류운 모두 대동산 경묘에 오죽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것에 두려움과 경계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대종사였지만 지난 역사와 세상에 우연히 발생하는 신비한 일들은 이미 여러 가지 이들을 증명해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고검은 자신과 가장 심성이 비슷하면서 또 유달리 따뜻한 마음을 지닌 마지막 제자 왕 십삼랑을 범한의 곁에 보내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바로 저 장님 때문이었다.
사고검이 오죽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는 이 일에 참여하지 말고 산에서 내려가게. 저 황제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범한이 평생 호의호식을 누리며 잘 살게 해주겠다고 보장하겠네. 경국을 떠나 동이성에 온다면 내가 성주로도 만들어주겠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한결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사원 문 앞에 서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장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또 황제를 공격하려던 두 대종사가 갑자기 행동을 멈춘 이유도 몰랐다. 더욱이 이들이 인정사정없기로 유명한 사고검이 저 장님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는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대종사의 말을 믿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작은 범 대인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이는 검은 옷을 입은 장님의 정체가 더욱더 궁금해졌다.
오죽이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자 경국 황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잠시 생각하던 오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범한이 나에게 황제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네.”
섭류운과 마찬가지로 사고검 역시 입을 쩍 벌리고 오죽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30년 동안 보지 못했어도 이렇게까지 달라졌을 줄은 몰랐는데······· 설마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건가?”
오죽이 따분하다는 듯이 말 대신 천천히 고개를 저어 질문에 대답했다.
사고검이 삿갓을 고쳐 쓰며 말했다.
“오죽, 우리는 과거의 추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네와 싸우고 싶지 않네······. 게다가 외양간 거리 사건이 일어나고 2년 동안 나는 범한을 오랜 시간 용인해왔네.”
사람들이 다시 화들짝 놀라면서 두 사람이 가진 과거의 추억이 무엇일지 궁금해했다.
오죽이 잠시 생각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자네는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 더러워서 어쩔 수 없었네.”
사고검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도 더럽기는 마찬가지이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콧물을 줄줄 흘리던 십 대 백치야. 그래서? 나를 데리고 가서 쪼그려 앉힐 것인가?”
오죽은 입꼬리가 살며시 올리며 웃을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에는 웃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사고검이 한참 침묵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섭류운이 놀라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사고검이 손가락으로 늙은 홍 태감과 오죽을 가리킨 뒤 다시 섭류운을 바라봤다.
“두 명 대 두 명이네. 바보나 이런 상황에서 움직이는 거야.”
섭류운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자네는······· 바보가 아닌가?”
“맞아. 나는 바보지.”
사고검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미친 광인은 아니야.”
경국 관리와 제사, 그리고 몇몇 태감들을 포함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소문으로만 들었던 전설적 인물인 대종사를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이후 이어진 대화를 듣자 당황스럽고 황당했다.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리고 말다툼을 하는 저 늙은이가 지난 20년 동안 천하대세에 영향을 끼친 그 대종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편 황제는 평온한 마음으로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만약 사고검과 섭류운이 이대로 그냥 물러난다면 이 일은 그냥 웃음거리로 남을 터였다.
하지만 사고검도 정말 바보는 아니었기에 경제가 이대로 무사히 경도로 돌아간다면 이후 엄청난 후환이 닥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고검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2대 2로 싸운다면 나는 움직이지 않을 거네. 대머리가 오지 않는다면 나는 당장 산에서 내려갈 거야.”
이 말을 들은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구름이 다시 산허리를 감싸더니 천검이 돌길을 찔러 부수고 낙엽이 바람에 따라 날아왔다.
잠시 뒤 바람이 불어 안개가 다시 흩어지자 세 번째 삿갓을 쓴 사람이 낙엽처럼 사뿐히 산 정상에 올라왔다.
고하가 마침내 등장한 것이었다.
“대종사는 과연 대종사구먼. 말 한마디에 대종사를 불러내다니.”
왕계년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임소안 뒤에 숨어 습관적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며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조용히 뒤쪽으로 걸어갔다.
감찰원에서 그는 종추와 더불어 도망치거나 자취를 감추는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더구나 지금 대동산 정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갑자기 등장한 세 번째 삿갓 쓴 사람에게 정신이 팔려서 한 사람이 사라져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었다.
왕계년이 발걸음을 옮기며 변변치 않은 단역이 몸을 숨기기에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했다. 산허리에서 힘겹게 목숨을 지키고 있는 고달처럼 범한과 오래 일한 사람들은 충과 효에 대해 약간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가 죽어 뒈지든 말든 일단 자신은 살아남아야 했다.
왕계년이 천하 모든 사람을 속이고 사라질 수 있다고 해도 산 정상에 있는 대종사들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느라 이름도 모르는 빼빼 마른 노인이 떠나든 말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먹구름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대동산 정상에 내리쬐던 햇빛을 가려버렸다. 산 정상에 습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나이가 지긋한 예부 상서라면 지금 앞으로 나가 비열한 음모를 벌인 이들을 질책해야 했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또 나이가 젊은 편에 속하는 태상사 정경 임소안은 황제를 향해 쏟아지는 강력한 살기를 막아 줘야 했지만·······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 모두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고 말 한마디 내뱉지 못했다. 모두의 마음속에 복잡한 감정이 샘솟았다. 격분, 두려움, 흥분, 절망, 경외심, 슬픔과 같은 감정들이 용솟음쳤다.
그렇다. 넓지도 않은 산 정상에서 오늘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벌어졌고, 천하를 호령하는 큰 인물들이 등장했다. 들쭉날쭉하면서 운치가 있는 오래된 사원에 달린 구리 방울을 바람에 흔들거렸다. 마치 큰 인물들의 등장에 경외심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
섭류운, 사고검, 고하는 천하 삼국의 백성들이 경배하는 대종사들이었다.
세 명의 대종사는 각자 다른 곳에서 머물렀다. 고하는 북제 국사였고, 사고검은 동이성의 수호자였으며, 섭류운은 바람 부는 데로 떠도는 방랑객이었다. 이 세계에서 이들 세 사람을 동시에 같은 장소에 출현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한 사람을 위해 대동산에 모인 것이다.
바로 웅장한 포부를 품고 있는 황제이자 천하제일 강국의 황제이며 인간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황제 곁에는 홍 내관이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경도를 떠나지 않았던 홍 내관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4대 종사가 모두 대동산에 모였다.
경제를 죽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