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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79화 (679/1,108)

679화 추격 (3)

범한이 허무재를 걷어찬 발을 거두어들였다. 범한도 알다시피 그는 도박에서 진 거였다. 연소을은 과연 세 척 중 한 곳에 올라타고 있기는 했지만, 허무재가 필사의 공격으로 불태운 배는 아니었다. 이에 범한은 연소을에게 일찌감치 들켜버렸으니 이제 더는 숨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해변의 감찰원 배를 들이받기 위해 여전히 빠른 속도로 운항 중인 전투선을 주시했다. 그리고 얇은 검은색 갑옷을 입고 천신처럼 무심한 듯 활을 든 채 뱃머리에 서 있는 연 대도독을 바라보며 감찰원 관복을 옅은 색 부분이 겉으로 드러나도록 입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이미 귀 한 쪽을 잃고 얼굴 절반이 피범벅이 되어 있는 허무재를 잠시 바라보았다. 소가죽 장화를 신은 그의 오른쪽 발은 이미 흰 돛이 달린 배와 연결된 밧줄에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몸이 흔들리더니 위장한 범한이 안개 속에 깔린 밧줄을 따라 해안가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범한은 몸을 살짝 굽힌 채 살쾡이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촥’, 하는 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화살 한 발이 안개 속으로 들어간 범한이 아닌 전투선 내 오른쪽에 있는 쇠뇌틀의 밧줄로 향했다. 그러자 화살촉이 순식간이 밧줄을 끊어버렸다.

배와 배 사이를 잇고 있던 밧줄이 무기력하게 바닷속으로 늘어졌다. 하지만 사람이 물에 빠지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 * *

연소을이 싸늘하게 장궁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배가 유달리 빠른 속도로 감찰원 관선으로 달려드는 걸 지켜보았다.

안개 속에서 범한은 한 손으로 끊어진 밧줄을 쥔 채 유령처럼 휘리릭 날아 익숙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대한 수군 전투함이 자신의 궁둥이를 들이받으러 오고 있어,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범한이 선실에 있는 상자를 발로 거칠게 걷어찼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패도의 정기가 담긴 발길질에 ‘팍’,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면서 견고한 나무 상자가 산산이 부서지고 은빛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렇다. 은빛이 사방으로 튀었다.

13만 냥의 새하얀 은이 부서진 상자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것도 잘 익어서 배가 툭 터진 석류의 알맹이처럼 말이다.

그러자 은전들 사이에서 긴 검은색 상자의 한쪽 귀퉁이가 나타났다.

범한이 팔을 앞으로 내밀어 바닥에 널브러진 은전 더미에서 검은색 상자를 집어 들었다.

손에 살짝 거칠고 질량감 넘치는 감촉이 전해져 왔다. 익숙하고 미묘한 느낌에 범한은 순식간에 무한한 용기와 기운이 몸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이에 범한은 자신을 위축하게 만들었던 모든 두려움을 버리고 뒤에서 덮치려 달려드는 전투선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선실로 들어가 상자를 손에 쥘 때까지 범한은 너무 서두르느라 옆에 누가 있는지 발견할 새가 없었다.

이에 용기백배가 되어 검은 상자를 둘러메고 대륙을 평정하고 천하 패자가 되기 위해 선실을 나서려는 순간······ 자기 옆에 있던 감찰원 관복을 입은 사람을 발견하고는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멍하니 멈춰서 버리고 말았다.

한데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관복을 입은 자가 범한이 중임을 맡긴 계년조의 심복 홍상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시간이 없었던 범한은 그를 잠시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이 몸께서 령전을 쏘아 올렸는데, 어째 자네는 도망을 안 간 것인가?’

그러자 홍상청이 멍하니 범한을 돌아보았다. 한데 그의 눈빛에 담긴 의미도 매우 분명했다.

‘은전 13만 냥을 버려두고 그냥 떠나라고요? 대인 대신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웅끼리는 서로 통한다던데, 바로 이런 눈빛의 대화를 두고 하는 말일까?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이 닿자마자 금세 떨어졌다. 홍상청은 어느새 범한 뒤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범한의 왼손이 용처럼 홍상청의 뒷목을 거칠게 휘감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척!’, 하고 소리가 울리더니 화살 한 대가 정확하게 홍상청의 복부를 뚫고 들어갔다. 홍상청은 피를 뿜었고, 그의 얼굴은 급격히 창백해져 버렸다.

비록 한 걸음 옮겨 범한에게 날아온 화살을 용감하게 막아낸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화살이 자신이 휘두른 칼을 뚫고 자기 몸 안으로 들어오리란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터였다.

한데 화살의 위력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선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은전에 매섭게 꽂혀 버렸다.

그런데 그 모양이 정말 공교롭게도 만두에 꽂힌 쇠꼬챙이처럼 보여 정말 먹음직스러워······ 아니, 정말 무시무시했다.

범한은 음울한 얼굴로 한 손에는 상자를 한 손에는 홍상청을 목덜미를 쥔 채 선미 방향으로 질주했다.

뒤에서는 화살이 빗발치며 그와 그의 영혼을 추격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범한의 발놀림을 어지럽힌다거나 느려지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흑기를 찾아 합류하게!”

범한이 선미 난간을 밟고 말할 기운도 없는 홍상청의 복부를 한 대 쳐 천일도의 따스한 정기를 불어 넣어 그의 혈맥을 잠시 봉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금 전 홍상청을 치면서 생긴 힘으로 몸을 띄워 거대한 새가 되어 가볍고 빠르게 날아올랐다.

잠시 후, 해안에 착륙한 범한은 바닷물 속에 처참하게 떨어져 있는 홍상청을 잠깐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범한은 화살이 저 청개구리에게 얼마만큼의 상해를 입혔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청개구리는 죽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가 인간계 지옥과도 같은 섬에서도 살아 나왔으니, 이번에도 분명 살아남을 거라 굳게 믿어서였다.

이는 어쩌면 심리적인 자기 위안이거나, 일종의 축복이거나, 또는 범한이 정말로 청개구리의 죽은 척하는 능력을 믿었기 때문일 수 있었다.

* * *

바다 위.

허무재가 피가 흐르는 얼굴 반쪽을 부여잡고 음험하게 말했다.

“노를 저어라!”

그러자 그가 통제하는 수군 전투선이 빠르게 방향을 돌려 해안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 시각 바다는 짙은 연기와 새하얀 안개가 한데 섞여 시야가 더욱 흐려져 있었다.

허무재는 도련님의 계획에 따라 바라를 표류하다가 필요할 때 서둘러 교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이 이 시시비비가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서 도망갈 적기라고 판단했다.

선박은 빠르게 후퇴했다. 그런데 해안가 감찰원 배를 주시하고 있던 허무재의 동공이 살짝 수축되었다. 이제는 범한을 도와줄 수 없다 보니 그가 도망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매우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펑!’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수군 전투선 중 유일하게 손상을 입지 않은 배가 해안가 바다사자를 잡으려 돌진하는 범고래처럼 흉포하고 맹렬하게 감찰원의 배를 들이 받아 버린 것이었다.

강력한 충격에 해변의 바닷물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사람 키 절반 정도의 파도가 일었다. 파도는 충돌이 일어난 해변을 중심으로 강렬하게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쩌걱,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린 것으로 보아 감찰원의 관선은 충격으로 산산조각이 난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배가 부딪히는 순간, 예닐곱 정도의 사람 형체가 충격으로 생겨난 거대한 힘에 기대어 전투선에서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들은 공중에서도 완벽한 대형을 유지했다. 그리고 슉, 하는 소리와 함께 강렬하게 진동하고 있는 감찰원 관선(官船) 선미로 착지했다.

이들 중 가장 인상적인 이는 바로 검은색의 얇은 갑옷을 입고 있는 연소을이었다. 그는 천신처럼 하늘을 난 후 대단히 안정적으로 선미 갑판에 착지했으며, 착지한 후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옆에 있는 다섯 사람은 정북 병영의 친위대 고수들이었다.

연소을은 동작이 매우 빨랐다. 하지만 범한과 계년조 부하들의 도주 속도가 더 빨랐다. 이에 감찰원 관선 안에는 바닥에 널린 은전과 나무 조각 말고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선미에 서 있는 연소을이 해안을 싸늘하게 주시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검은 점을 바라보며 손목을 돌려 오른팔에 진동을 주었다.

그러자 금사가 감긴 영혼을 잡아먹는 장궁이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곧바로 화살을 얹고 시위를 당겼다. 일련의 동작은 모두 한 호흡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물 흐르듯이 매끄러웠다.

한편 이 순간 선미와 해안에 있는 범한은 서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장궁이 최대한의 살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에 검은색 화살은 시위를 떠나 폭풍 같은 기세로 달려 나갔다.

화살에는 연소을의 정점에 달한 정신력과 힘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화살은 은근히 속도의 제한이니 하는 것을 뛰어 넘어 곧바로 공간의 막을 뚫어 버리는, 신이며 귀신도 당해내지 못할 경지인 것만 같았다. 즉,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위에 얹어져 있던 화살이 어느새 범한의 등 뒤에서 나타나버린 것이었다!

범한은 뒤를 돌아보고 자시고 할 시간도, 또한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는 오죽에게 훈련을 받아 피하는 거라면 세상에서 제일 빠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제저녁부터 밤새도록 도망치고 또 연소을의 최고로 거칠고 빠른 화살을 피해왔다고는 해도 이번만큼은 정말로 도망칠 수가 없었다.

* * *

화살 끝이 의심할 여지없이 사납게 범한의 등에 꽂혔다. 아니, 분명 범한이 등에 지고 있는 검은 상자에 맞았어야 했다.

안개 낀 언덕에서 으윽, 하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리고 검은 점이 비틀 거리며 바닥으로 고꾸라지려 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내 땅을 짚고 일어나 날아가듯 먼 곳을 향해 내달렸다.

‘안 죽었다고?’

‘안 죽었다니!’

짙은 안개가 깔려 있던 탓에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범한의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아무리 시력이 뛰어난 연소을일지라도 화살이 상대방에게 맞았는지 여부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연소을의 친위대 소속 고수들의 얼굴에 한 줄기 공포와 두려움이 흘렀다. 밤새도록 범한을 따라 이곳까지 왔건만. 그들의 믿음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수백 장 높이의 매끄러운 절벽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이 세상에 연 대도독이 전력으로 쏜 화살에 맞고도 비틀거리기만 한 사람이 있다니!

친위대 고수들은 느닷없이 자신들이 쫓고 있는 자의 내력을 떠올랐다. 전설 속 하늘의 자손, 그리고 그밖에도 많고 많은 범한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그들 머릿속을 맴돌았다.

연소을도 감정 동요가 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속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연소을이 선박 난간을 치자 그는 어느새 해안에 날아가 있었다. 산기슭 숲에서 들릴 듯 말 듯 기마 부대가 질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미에 있던 다섯 고수도 서로를 쳐다보고는 한껏 결의에 찬 표정으로 해안으로 내려왔다.

잠시 후, 숲에서 기마 부대가 달려 나왔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와 연소을을 포함한 여섯 명에게 말을 내주었다.

연소을은 비교적 충실하게 준비를 해둔 터였다. 그래서 담주에서는 수륙양동작전으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이렇듯 준마도 왔으니 범한이 어찌 도망갈 수 있을까?

범 제사 추살(追殺)에 나선 일행이 달그닥달그닥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해안가에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해안가에 있던 감찰원의 배는 충격을 받은 후 천천히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닷물 곳곳에 시체와 잔재들이 떠다녔다.

홍상청이 뛰어내리고, 범한이 뛰어내리고, 연소을과 그의 친위대도 뛰어내렸다. 그리고 13만 냥에 달하는 은전도 바닷물 속으로 가라 앉아 버렸다.

그리고 추격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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