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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678화 (678/1,108)

678화 추격 (2)

범한은 품이 넓은 허무재 측근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의 야행복과 장비는 모두 보따리 안에 있었다. 그래서 전투선 앞쪽에 있는 선실에 숨어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발각될 염려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창살의 갈라진 틈으로 밖을 내다보며 안개 너머에 있는 배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전투선 세 척은 해안선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북쪽으로 운항했다. 그 사이 허무재는 몇 차례 해안선 가까이 다가가려고 시도를 했다. 하지만 너무 티 나게 움직이면 추격자들의 의심을 살 것을 염려한 탓에 결국 범한을 해안에 올려 보내지는 못했다.

범한은 혼자 도망칠 생각도 했지만, 담주 남쪽에 남아 있는 부하들이 걱정되었다. 계년조 소대가 아직 배에 남아 있었고, 범한이 좋아하는 홍상청이 배에 남아 일처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데 수군 전투선 세 척이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고, 자신은 나 몰라라 혼자 도망간다면? 부하들의 목숨은 어떻게 되는 걸까?

범한은 지금껏 자신의 운이 최상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연소을이 세 척의 배 중 한 척에 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런 운이란 게 결국에는 다 양날의 검 같은 거라는 걸 알게 되자 그는 속이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감찰원 선박은 분명 수군의 맨 첫 번째 공격 목표가 될 것이고, 그러면 배에 있는 사람들이 몰살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세 전투선들의 지휘자가 허무재였다면 당연히 범한은 더 좋은 방법을 내놨을 것이다. 하나 문제는 진이 제독이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배 세 척은 각기 다른 세 명의 비장이 이끌고 있다는 거였다.

더 중요한 점은, 범한이 봤을 때 연소을은 절대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이 도망가면 담주 남쪽에 있는 감찰원 부하를 찾아 갈 거라 생각했을 텐데, 과연 연소을이 자신을 안 따라오고 배겼을까?

범한이 창가 의자에 앉아 호흡을 조절했다. 그는 자신이 이제 곧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연소을이 강제로 병사들을 담주로 이동시킨 건 감찰원 부하들의 생명을 가지고 자신을 꿰어내려는 작전을 짰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봤을 때, 어쩌면 연소을은 자신이 이미 전투선 안에 숨어들은 걸 예측했을 수 있었고, 단지 어느 배에 숨어 있는지 몰라 교주 수군의 체면을 걸고 수색에 나서기 뭐했을 뿐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범한 역시 연소을이 지금 어느 배에 타고 있는지 모른다는 거였다. 알면 좋을 텐데 말이다.

* * *

안개가 짙어지고 해풍이 잦아들었다. 한데 구름처럼 짙은 안개가 점점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창을 통해 해안가 절벽과 푸른 나무들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안가에서 처자처럼 예쁘고 귀엽게 정박해 있는 흰 돛이 달린 배도, 범한과 오랫동안 함께 한 배도 점점 사람들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범한은 순간 긴장했다. 그리고 해안가 절벽에 있는 푸른 나무들이 그에게 커다란 유혹으로 다가왔다. 저 배를 버리고 곧장 해안에 상륙한다면 근처 배에 타고 있는 연소을이 해안까지 추격해 와도 자신이 도망갈 수 있는 가망성은 6할이나 되므로 그는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 곧장 경도로 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저 배가 더 유혹적이었다. 저 배 곳곳에 있는 부하들의 생사가 범한에게는 더 중요했다. 결국 범한은 두 번째 생을 살고 있었지만 진평평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은 어떻게든 저 배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수군 반란군이 공세를 퍼붓기 전에 아직 꿈나라에 있는 부하들을 깨워야 했다.

수군 전투선에서 밧줄을 단단히 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범한은 다시 긴장했다. 배 위에 있는 투석기를 쏠 준비를 하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저 멀리 있는 흰 돛을 단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은 이미 경국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힘 있는 사람이 보호해줄 필요가 없어서인지 경계가 느슨해져 있었고, 이에 해상에서의 이상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범한의 동공이 살짝 수축했다. 그가 손가락을 튕겨 허무재를 선실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자그마하게 몇 마디 건네고는 도박을 할 준비를 했다.

* * *

전투선은 삼각대형으로 천천히 감찰원 선박을 포위해 나갔다. 그런데 일정 거리에 도달했을 때 허무재가 이끄는 전투선이 갑자기 큰 파도에 출렁여 중심이라도 잃은 듯 조타수의 조작 문제가 일어나 뱃머리 부분의 각도가 살짝 한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이 모습을 본 나머지 두 척에 있던 반란군 장수들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허 장군이 진법 짜는 데 한동안 소홀히 해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안가 목표물이 아무런 동요도 없자 그들은 더 이상 허무재의 배 쪽은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신경을 쓰지 않는 바로 지금이었다.

팍,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어떤 육중한 기계가 젖혀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흰 안개에 싸인 해변 쪽에서 처참한 비명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여기저기 날카롭게 모가 난 돌덩어리가 허무재가 있는 전투선 투석기에서 날아올랐다. 어마어마한 무게의 돌덩어리가 무서운 속도로 수면 위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안개가 감싸주고 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해변에 가장 가까이 있는 수군 전투선을 예고 없이 부숴버렸다.

쾅쾅, 하며 거대한 소리가 몇 차례 울려 퍼졌다.

돌덩어리 하나는 전투선 선벽에 검고 큰 구멍이 뚫려 버렸다. 그 구멍은 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흘수선(吃水線: 배가 물에 가라 앉아 있을 때 배와 수면이 접하는 경계선)이 있는 곳까지 부서져 있었다.

다른 돌덩어리는 전투선의 주 돛대에 명중했다. 그래서 ‘쩌걱’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돛대가 뚝 부러져 버려 날카롭게 삐쭉 솟은 밑동만 남아 버렸다. 거대한 돛도 ‘화락’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는데,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수군 병사를 덮쳤는지 모른다.

돛을 붙잡아주고 있던 밧줄도 순식간에 살상 무기가 되었다. 넘어지는 돛과 함께 ‘촤좍’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흔들리고 허공을 가르다가 멍하니 서 있던 수군 병사들의 복부를 강타해 허리를 분질러 놓고······.

돌덩어리가 행운을 가져왔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투선 내부에 순식간에 수많은 사망자를 내고 그들에게서 나온 핏물이 붉은 물처럼 쏟아져 나오도록 했으니까 말이다.

* * *

이 세 척은 원래 습격을 하러 온 전투선들이었다. 그래서 돌연 아군에게 습격을 당하자 방어할 때를 놓치고 말았다. 삼각 대형을 이루어 움직이던 전투선들은 순간 동시에 멈추어 섰고,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멈추고 거대한 바윗덩이가 내는 가공할만한 울림만 들릴 뿐이었다.

“활을 쏘아라!”

노한 얼굴의 허무재가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의 명령에 맞춰 무수히 많은 불화살이 동시에 하늘로 날아올라 이미 심하게 부서진 전투선 쪽으로 향했다.

부서진 배에 불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 배에 있던 장군들의 생사는 알 수 없었지만 반격에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 구조는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배 전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돛은 최고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허무재의 표정에는 매우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저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은 모두 그의 동료였다. 그러니 가장 위험한 순간이 오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습격을 할 일도 없었다.

허무재는 극히 짧은 시간 안에 배 전체를 공세에 가담시켰다. 한데 그가 교주 수군에서 20년 간 몸담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 배에 타고 있는 전 관병(官兵)이 그의 측근이 아니었다면 감히 이런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허무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해변에 있는 흰 돛단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배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있는 걸 보니 감찰원 사람들은 이미 대응에 나선 거였다. 그렇다면 그는 도련님이 지시한 일을 완수한 셈이었다.

그가 오른손으로 살짝 주먹을 쥐고는 뒤쪽에 향해 한 차례 흔들었다.

* * *

비열하게 습격을 가한 전투선 우측에서 해상 근거리 공격용 쇠뇌틀이 느닷없이 가동되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전투선 전체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자 갈고리 닻을 달은 쇠뇌의 화살이 빠른 속도로 해안가의 감찰원 배로 향했다.

이후 거대한 쇠뇌 화살에 연결된 밧줄의 힘으로 두 배는 서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감찰원 계년조 사람들이 용감하게 뱃전으로 가 이 밧줄을 잘라버리려 했다. 한데 해무 속에서 령전 소리가 들려와 그들은 순간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장 뒤로 돌아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재빨리 바다를 등진 쪽으로 사다리를 내린 후 뭍으로 가 배를 버렸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형체가 해안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동작이 어찌나 빠르던지 그걸 본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이는 감찰원을 강대하게 해주는 요인으로, 8대처의 모든 관원과 밀정에게는 령전 소리에 즉각 반응하도록 그것이 몸속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었고, 그저 규정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바다 위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한 척의 배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처참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편 습격에 나선 배는 바다에 멈춰선 채 해안에 있는 흰 돛을 단 배와 하나가 되어 갔다. 사람들이 놀라운 속도로 도망간 후 텅텅 빈 채 남겨진 빈 배는 결국에는······.

* * *

“속력을 높여라!”

허무재의 동공에서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수군 전투선이 갑자기 속력을 높여서였다. 전투선이 순식간에 좌측 앞쪽에서 치고 나왔다. 그리고 삼각 대형의 맨 앞머리가 있던 해역으로 곧장 파고들어 허무재의 전투선과 해안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그 전투선이 전투 준비를 마친 게 허무재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앞선 급습에서 돌덩어리와 불화살을 몽땅 쏟아 부은 때문에 허무재는 이와 같은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상대방이 공격 준비를 마쳤음을 확인한 그의 맨 처음 반응은······.

“뱃머리를 돌려라! 노를······.”

‘노를 저어라!’란 말을 마치지도 못했는데 허무재는 입을 떡 벌린 채 더 이상 단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강력한 바람이 그의 입으로 밀고 들어와 소리를 낼 수 없어서였다.

허무재의 엉덩이뼈에 인정사정없이 발길질이 날아왔다. 그리고 그 강력한 힘 때문에 그는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후 허무재는 선현에 부딪혀 부서진 나무 파편과 함께 뒹굴었다.

한데 공중으로 날아간 것 때문에 허무재는 운 좋게 정면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발길질에 허무재의 몸이 살짝 갸우뚱 기울어졌을 때 화살이 그의 이마를 스치고 날아갔다. 화살의 위력은 굵은 나무 몸통도 꿰뚫어 버릴 정도로 강력했지만 은근한 소리만 냈을 뿐 절대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슥’, 하며 한 차례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허무재는 부서진 나무 파편 위에 누워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공포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수군 관병 다섯의 몸에 깔끔하게 작은 구멍이 났다. 그리고 죽기 직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제 자리에서 숨이 끊어져 버렸다. 그들의 목구멍과 가슴을 타고 올라온 핏물은 어느새 머리에 난 깔끔한 작은 구멍으로 미친 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투선 나무 바닥에 멋스럽고 검은 작은 화살 한 대가 꽂혔다. 화살은 꼬리깃 부분이 빠르게 떨리며 ‘웅웅’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사이 화살 깃에 묻어 있던 피가 ‘똑’, 하는 소리를 내며 한 방울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작 피 한 방울이었다.

한데 갑판 위에는 여럿이 죽어 있었다.

‘화살 한 대로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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