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7화 추격 (1)
범한이 소리를 죽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등불의 불꽃이 선창 밖 파도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범한의 얼굴에 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초조함이 드러났다.
그렇다. 대동산 이쪽은 포기해도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걱정하는 오죽 아저씨는 대동산이라는 이 절대적인 환경에서는 섭류운과 사고검, 심지어는 늙은 홍 태감과 비교해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그러니 그 누구도 그를 그곳에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한편 경도는 범한이 급히 돌아가 봐야 했고, 그의 품에 있는 옥새와 황제가 황태후에게 남긴 친필 서한이 필요했다.
“담주항 밖에서도 계속 배 위에 있었나요?”
여전히 친위대 복장으로 허무재 뒤에 서 있던 범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자 범한이 곧바로 다시 물었다.
“연소을은 언제 배에 올라탄 겁니까?”
“모릅니다.”
허무재가 대답을 이어 갔다.
“분명 담주에서 대동산으로 가는 길목에서였을 겁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장 공주 쪽은 서로 견고하게 연맹을 맺고 있어 이용할만한 내부 균열 같은 게 보이지 않아서였다.
“담주에 있을 때 흰 돛을 단 배를 봤겠군요.”
허무재가 궁금해 하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거야 도련님께서 타신 배니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 배에 타야겠습니다.”
범한이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며 의심할 여지없다는 긍정의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지금 연소을의 시선은 어쩌면 바다 밑에서 바다 위로 옮겨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육지로 오르는 건 너무 어렵게 되었어요. 해상을 이용해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갈 방법이 있을까요?”
허재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배를 타고 직접 담주로 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운이 따라야 하지요.”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내게는 정말 좋은 운만 따랐어요.”
* * *
어두컴컴한 바다 위.
대동산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수군 선박이 등불을 밝힌 채 주변 선박과 열심히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수군 선박은 크기가 정말로 컸지만 그래도 천지간에 걸쳐 있는 대동산에 비하니 흰 종이 위에 올려놓은 녹두 한 알처럼 작고 볼품없었다.
배 위의 군사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수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닷물 속에서 단서라도 찾아낸 듯 시도 때도 없이 ‘아유!’, ‘이런!’, 같은 허사를 내뱉었다.
그들 중 많은 이는 활을 들고 언제든 바닷속으로 화살을 날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암석 절벽에 있던 사람의 모습은 파도 속으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런데도 바다로부터 대동산으로 이어진 양측 육지에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범한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한데 그 누구도 범한이 반란군 선박에 타고 있으리란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소을은 화살을 쏘기 위한 간편한 복장으로 뱃전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위대 병사가 그의 등에 금사(金絲)가 감겨 있는 육중한 활을 메 주었다.
연소을이 옆에 놓인 나무 탁자에서 독주를 가져다가 한 잔 들이켰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절벽 아래의 물보라에서 절대 눈을 떼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였지만 그래도 범한이 죽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다.
범한은 연소을이 쏜 화살 한 발에 맞았고 또 파도를 가른 고검에 공격을 당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연소을은 그가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해 수군 및 해안에 있는 친위대에게 탐색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다.
연소을은 범한이 다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무의식은 범한이 아직 살아 있기를 바랐다. 범한이 살아서 나타나면 연소을은 그의 목에 인정사정없이 화살을 박아줄 생각이었고 그게 최상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연소을은 허여멀건 범한을 혐오했고 끔찍하게도 미워했다.
자기 외아들의 죽음에 그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서였다. 물론 그날 밤 경도 골목에서 강궁(强弓: 당기기 힘든 활)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범한과의 안개 속 대치로 전반적인 열세에 있던 탓에, 그때의 굴욕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그러니 연소을 입장에서는 굴욕을 씻기 위해서라도 범한을 반드시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지는 못할 것이니라.”
연소을은 제 자리에 선 채로 눈을 사납게 번뜩이며 대동산 절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 보았던 장면 그러니까 자신을 경악하게 했던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얼굴 허여멀건 한 놈이 저리 높고, 가파르고, 매끄러운 절벽에서 내려오다니.
연소을의 높은 경지와 놀라운 시력이 아니었다면 바다에 있는 수군 관병들은 범한이 어디로 갔는지 절대 감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
반란군은 그저 범한이 바닷물을 이용해 천 리 밖으로 빠져나갈 염려만 하며 젊은 제사 대인이 산 위에만 갇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운이 아닌 실력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연소을은 범한이 보여 준 실력에 너무 놀라 살짝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연소을은 연달아 13발을 쏘았음에도 선박과 절벽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 범한을 절벽에 꿰어버리지 못하고 그에게 고작 상처만 입혔을 뿐이었다. 이에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것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 버렸다.
이리 강력한 적인데, 연소을이 어찌 그를 오늘 밤 이 필사의 국면에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을까!
“각 배의 수색 상황은 어떻습니까?”
연소을이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바닷속에서 범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자 그는 제일 먼저 고 어린놈이 자기네 쪽 선박에 올라탔다는 생각부터 했다. 그런데 이번 교주 수군에서 온 장수들은 모두 내막을 잘 알고 있는 같은 편이라 연소을은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교주 수군 제독 진이가 연소을을 잠시 바라보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에는 없습니다.”
이 자는 진씨 가문의 후손이었고, 추밀원 부사 진항과는 사촌 형제지간이었다. 작년에 범한이 교주 사건을 조사한 것으로 그는 교주 수군 제독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한데 지금 그가 연소을과 뱃머리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니, 진씨 가문의 태도는······ 자연스레 명확히 드러난 것이었다.
“조심하도록 해요. 저놈은 매우 교활합니다. 산꼭대기에서 내려왔으니 분명 품에 중요한 물건들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가 하루라도 빨리 경도로 돌아가게 된다면 장 공주마마와 진 영감님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연소을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진이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는 비록 종일품의 수군 제독이었지만 그래도 연소을이라는 품계를 초월한 대도독 앞에서는 뻣뻣하게 행동할 자격이 못 되었다.
특히나 이번 대동산의 포위와 살육은 각 측이 서로 호응하며 이루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발언권이 강한 쪽은 연소을이었다.
연소을이 앞쪽 바다를 바라보며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되는군요······. 범한이 바닷속에서 육지로 올라올까 봐 말입니다.”
“바닷속에서 숨을 그렇게 오래 참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이가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해안에는 대인의 친위대가 있습니다. 동이성의 고수들도 있고요. 그러니 범한에게 틈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연소을이 입가에 괴이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 허여멀건 놈이 수백 장 높이의 절벽에서 미끄러져 내려왔으니, 그런 걸 상식선에서 생각해낼 수는 없겠지!’
연소을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진이가 평온하게 말했다.
“내일, 늦으면 내일모레, 로(路)와 각주를 따라 계획이 발동될 것입니다. 비록 감찰원 명의로는 할 수는 없겠지만, 범한이 황제 폐하의 마차를 습격한 ‘천자 제1호 중범(天字第一號重犯)’이라는 우리 쪽 소식은 전달될 터이니, 그가 어찌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연소을이 조롱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대꾸 없이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평범한 무장이 어찌 9등급 강자의 실력을 알 수 있으리오? 범한이 뭍으로 올라가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다면 아무리 조정이 장 공주님께 장악되어 있고, 범한에게 역모라는 커다란 죄목이 붙어도 범한이 경도로 갈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거네!’
“범한이 바다에서 벗어나 해안가로 올라간다면 분명 가장 최근에 감찰원 부하가 경도로 전달한 소식을 찾아낼 것입니다.”
연소을이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비록 주군 각지에 감찰원 밀정이 있기는 해도, 그가 가장 편하게 생각하고 가장 가깝게 여기는 건······ 의심할 여지없이 담주에 남아 있는 그들이지요.”
진이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곧 담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만약 범한이 이 배에서 방금 전 말을 들었다면 분명 연소을을 와락 끌어안고 뽀뽀를 두 번 날렸을 것이다.
그는 지금 허무재의 배에서 어떻게 해야 담주에 있는 자신의 배로 돌아갈 수 있는지 온갖 방법을 짜내는 중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연 대도독이 자신에게 그런 멋진 기회를 줄 줄이야.
그런데······ 범한은 왜 담주로 가려는 걸까?
* * *
이런저런 일의 배정을 마친 연소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후 본능적으로 오른손 식지와 중지를 구부렸다. 이는 평생 활을 쏘면서 생긴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구부러진 순간 그의 눈빛도 저 멀리 있는 어두운 대동산 정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황제 폐하가 저 곳에 있다는 점과 그분이 곧 무엇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반이 이만큼이나 진행되었는데도 군인이기 때문에 황제를 향해 마음에 든다는 생각 2할, 경외 3할, 거북함 5할의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외아들이 죽지 않았다면 자기 아들이 황제의 아들보다 덜 귀하다는 걸 확인하는 계기가 없었다면 어쩌면 연소을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을 수도 있었으며, 오늘밤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산 정상에서의 일은 자신이 관여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협의의 일부분이지만, 연소을은 산 문 앞의 친위대를 그 사람에게 맡겨 놔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연소을이 바다를 향해 대단히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로써 이제 곧 배에 타고 있는 노인이 대동산에 오를 텐데, 그가 자기 대신 황제 폐하를 잘 보내주길 바란다고 축원했다.
* * *
우유처럼 희뿌연 한 안개가 바닷물 위에 깔려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릴 듯 말 듯 가볍게 물결이 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런데 그 소리가 갈수록 커지더니 어느덧 검은색의 배 세 척이 유령처럼 안개를 헤치고 나타나 점점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뱃전에 서 있던 허무재가 수하 교관과 나지막하게 무언가 말을 건넸다.
해안선 북쪽을 따라 추격에 나섰던 배 세 척이 명령이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담주에서 약 12리 떨어진 곳으로, 흰 돛을 단 감찰원 선박이 정박해 있는 담주 남쪽 부두였다.
짙은 안계가 엄폐해준 덕에 세 척의 전투선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감찰원 선박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그들의 수색 작업에 알 수 없는 수고로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현재 수군 병사들은 자신들의 목표물이 한밤에 대동산에서 도망친 검은색 복장의 사람이며, 그가 감찰원 제사 범한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사들이 왜 자신들을 담주 남쪽까지 파견 보낸 건지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연소을이 어떻게 단정을 지었는지 몰라서였다. 연소을은 범한이 사지에서 벗어나면 가장 먼저 이 흰 돛이 달린 배에 있는 측근과 연락을 취할 거라 단정 지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