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675화 (675/1,108)

675화 배 안에서의 그 마음 (1)

바닷물에 흩어져버린 범한의 머리카락은 해초처럼 제멋대로 흐느적거렸다. 그 해초 사이로 보이는 범한의 얼굴은 창백했고, 거기에 박혀 있는 눈동자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번뜩이고 있었다. 수면 위에서는 연소을의 화살이 기다리고 있으니, 범한은 곧바로 수면 위로 나갈 수 없었다.

배를 타고 파도를 헤치며 다가오고 있는 대종사는 검 공격에 실패했으니 자신을 재공격할 흥미를 잃었을 거라 범한은 생각했다.

바닷물에 몸을 담근 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무렵이었다. 범한은 암초를 잡고 있던 손 부위 피부에서 감각 이상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눈을 부릅뜨고 해수면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이 위험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이에 범한에게 슬쩍 후회가 밀려들었다.

‘어제······ 그 상자를 가져왔어야 했어. 그 상자가 곁에 있다면 연소을의 화살 따위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이는 범한이 새로 태어난 후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증명해 주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건 바로 경국의 황제 폐하였다.

이는 어쩌면 역사의 일부 잔류 그림자 때문일 수도, 또 어쩌면 단순히 범한의 직감에 속해 있던 잠재의식 때문일 수도 있었다.

범한은 황제 앞에서 자신의 비장의 패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황제와 함께 긴밀하게 얽힌 채 천하 곳곳에서 온 최강의 적들을 맞아야 할지라도, 범한은 그 상자를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황제가 알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범한은 진평평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비장의 패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다시 말해, 황제가 이 세계에서 신도 군주도 시해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살인 무기를 범한이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범한으로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범한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범한을 지금의 위기에 빠지도록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범한은 화살과 검의 공격에도 죽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범한은 충분히 자긍심을 가져도 되었다. 그리고 만약 오늘 저녁에 있었던 절벽 아래쪽에서의 춤, 검은색 화살, 파도를 가르는 검에 관한 이야기가 온 천하에 퍼져나간다면 분명 천하 모든 이는 범한에 대해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하게 될 게 분명했다.

대종사와 원거리 공격 세계 최강인 9등급의 고수가 모두 범한을 죽이지 못했다니. 범한으로서는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 만했다.

* * *

체내 패도의 정기는 그의 몸에 필요한 양분을 매우 재빨리 공급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공기를 호흡하지 못하니 결국에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범한의 입과 코에서 흐르던 피는 이미 멎어 있었다. 어깨의 상처도 바닷물에 불은 죽은 물고기의 살처럼 하얗게 변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았다.

창백한 범한의 얼굴에 결연한 기색이 스쳤다. 이어 그는 오른손을 다시 아래로 내려 바닥에 있는 커다란 돌덩어리를 끌어안았다.

몸이 잠시 떠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범한은 바보 같은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방법은 전생의 청나라 때 무술가 곽원갑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물론 그때 곽원갑은 하천 밑바닥을 걸은 거였고, 범한은 지금 바다 밑바닥을 걸어가고 있었다.

큰 돌덩어리를 안고, 그것의 무게에 의지해 안정적으로 자세를 유지했다. 이에 바다 밑바닥을 흐르는 암류의 충격에도 범한은 비틀거리지 않고 힘차게 바닥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해안선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포위망을 뚫지는 않았다.

대동산 양측에서 고수가 길을 막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의 남은 정기로 바다 밑바닥을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물 위로 가장 빨리 떠오를 수 있는 길을 골라 걸었다.

교주 수군 병선 아래쪽까지 걸어온 범한이 고개를 들고 눈을 뜨고 바다보다 더 짙은 색의 선박의 밑바닥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때문에 그런지 신체의 모든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했고, 이에 범한에게는 목선 밑바닥에 붙은 푸른 이끼와 조개마저도 선명하게 보였다.

범한이 들고 있던 무거운 돌덩어리를 내려놓았다. 돌덩어리가 밑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모래가 이는 거 말고는 주변에서 큰 움직임이 일지는 않았다.

범한은 양손으로 천천히 두 개의 반원을 그리며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몸에 힘을 풀고 바닷물의 부력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매의 눈, 상어의 귀, 개의 코를 가진 연 대도독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위로 떠올랐다.

범한은 천천히 군선 아래쪽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대단히 조심스럽게 배 바닥 바깥쪽을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범한은 일단 물 밖으로는 머리를 내밀지 않은 채 해수면과 대략 반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뱃전의 동정을 열심히 주시했다.

이건 도박이었다. 이 선박을 고른 건 첫째, 앞서 연소을이 이 배에서 화살을 쏘지 않아서였다. 한데 범한이 찾는 중인 조력자가 이 배에 없다면 범한은 다시 바닥으로 잠수해 다른 배를 찾아가야 했다. 그런데 다른 선박에 도착할 때까지 범한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는지.

다행히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수면 아래에서 창백한 얼굴의 범한이 괴이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이번 생의 운수는 과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뱃전에서 손 하나를 보았다. 그 손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에서 소리는 내지 않고 뱃전을 치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안정적이면서도 독특한 빈도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 * *

수면 위에서는 모두 다섯 척의 수군 병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이들 병선은 마치 사냥감을 찾는 악마 같았다. 수면을 가르며 언제든 바다 밑바닥에 숨어 있는 사냥감을 화살에 꿰어 죽여 버릴 기세였다.

또 다른 병선 세 척은 본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좀 멀찍하니 거리를 유지하면서 수비와 더 넓은 범위에서의 감시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 중 한 척은 중청(中廳)에 등불이 켜져 있는데도 어두컴컴했다. 이 배의 책임자는 교주 수군 장수 허무재였다.

그는 찬바람이 쌩쌩 도는 모습으로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의 친위대 병사 세 사람 중 둘은 중청 밖에서 경계 임무를, 하나는 수군 기선(旗船: 여기에서는 지휘관이 타고 있는 기함과 비슷한 의미임)과 연락을 책임지고 있었다.

허무재 곁에는 친위대 병사가 하나만 남아 있었다. 병사의 얼굴은 등불 뒤 암흑에 가려져 있어 이목구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밤 전투 상황에 놀랐는지 그의 낯빛이 살짝 창백하다는 건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조용한 병선에서 그 병사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왜 교주 수군도 반란을 하는 겁니까?”

허무재는 지금 교주 수군의 3인자로 이미 충분히 강력한 힘을 쥐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밤에 일어난 대형 사건과 관련해 내부 사정을 몰랐다면 그는 감히 수군 기선을 따라와 대동산 주변 해역을 포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 지금 상황은 교주 수군의 반역이 아닌······ 오히려······ 도련님의 반역 아닙니까?”

친위대 병사는 당연히 운이 너무나도 좋아 몰래 병선에 올라탄 범한이었다. 허무재는 과거 천주 수군에 있던 노인이었다. 그리고 뱃전 밖으로 계속 손을 늘어뜨리고 있던 점만 봐도 그가 남몰래 사지에서 도망 나올 범한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그를 충분히 신뢰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장 공주가 어떻게 계획을 세웠는지에 대해 범한과 황제는 일찌감치 추측을 하고 있었다. 대동산 주변에서 이렇게나 큰일이 벌어졌으니 아무리 소식을 통제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며칠뿐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황제가 자객에게 사망해 태자를 제위에 올리면······ 황제가 자객에게 당한 일은 누군가가 죄를 뒤집어써야 했다.

그리고 죄를 뒤집어쓸 사람은 반드시 황제를 죽일만한 힘과 동기를 지녀야 했다. 그래야 황궁에 있는 황태후와 조정 백관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또한 설득은 아니더라도 그들이 심적으로 납득할 만한 것은 있어야 했다.

그러니 대동산에 천제를 지내러 간 일행 중에 황제를 죽일만한 힘을 가진 자는 당연히 흑기 오백을 쥐고 있고, 암암리에 수많은 고수들을 데리고 있는 감찰원 범 제사였다.

황제를 공격한 동기와 관련해서는······ 분명 장 공주의 머리로는 황태후가 가장 경계하는 옛 섭가의 일을 가지고 걸고넘어질 수 있었다.

“당신이 대응을 하지 않았으니, 오격비 쪽에는 서한을 안 보냈을 테고······ 후계상 쪽에도 서한을 안 보냈겠군요.”

범한은 허무재 뒤에 서서 싸늘하게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누구든 불쑥 선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에 오른 후 상처 부위부터 동여매고 허무재의 친위대 병사로 위장해 그의 뒤로 가서 섰다.

“당신을 교주 수군에 그대로 둔 건 오늘을 위해서였습니다.”

범한의 말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살짝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군요······ 감찰원이 황제 폐하를 죽이려 한다는 말이 떠돌더라도 수군 내 일부 장군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믿을 수 있는 거죠? 더군다나 연소을이 왜 수군 선박에 있는 겁니까? 수군 장군들은 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겁니까? 왜 이 일을 가지고 당신의 충성심을 믿어주고 또 대동산까지 오도록 한 거죠?”

허무재가 고개를 숙인 채로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대꾸를 했다.

“황제 폐하께서 공격당하실 거란 점에 대해 누군가는 분명 믿었을 것입니다······ 감찰원의 명성이 나쁘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어제 받은 소식으로는 흑기 500이 강북 군영에서 효산 요충지까지 밤새 달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동로 일대는 갑자기 소식이 끊기고 말입니다. 그러니 흑기 500이 황제 폐하를 공격하러 나섰다는 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범한은 살짝 오싹했다. 흑기는 자신이 불러들인 것이고, 대동산 주변에만 접근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만약 경도에 있는 이가 이걸 빌미로 다시 일을 꾸미고, 또한 황제 폐하께서 이번에 이 심각한 위기에서 벗어나시지 못한다면 어쩌면 자신에게는 정말로······. 다행인 건 범한에게는 아직 몇 가지 마지막 무기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허무재가 현재 군 내에 상황에 대해 다시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한데 범한은 들을수록 무기력감만 들었다. 자신이 산 정상에서 하루 반 있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다른 국면이 펼쳐지고 있어서였다.

‘내가 동이성 사고검과 결탁해 황제 폐하를 공격했다고? 이런 식으로 뒤집어씌우다니, 너무 유치하군.’

그런데 범한도 알다시피, 어떤 수단을 썼는지는 다음 문제였다. 정작 문제는 맨 마지막에 실력으로 승패를 가르고 나서 장 공주 쪽이 다시 유치하게 범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면 역사서에는 영락없는 사실로 남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수군 내 대부분 사람들은 의혹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제가 믿기로는 일부 사람들은······ 대동산에서 벌어진 일의 진상을 알 것입니다.”

허무재가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다만 진상을 안다한들 어찌하겠습니까? 과거처럼 여전히 상곤이 군대를 지휘했다면 그와 수군 노장들은 황제 폐하를 향한 경외심으로 죽어도 이번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데 도련님께서 작년에 교주에서 대대적인 숙청을 하시는 바람에 노장들이 이미 많이 죽었습니다. 그 일로 얼마나 많은 장수들이 조정에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의 교주 수군은 이미 진씨 가문의 천하가 되었지요. 그러니 정말로 반역을 모의하는 중이라면 대동산 아래에 있는 저 수군 병선의 장군들은 기꺼이 가담한 거라 저는 보고 있습니다.”

범한이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분명 진상을 알고 있겠지요. 하나 나는 수군의 변화에 대해 의심한 적 없었고······ 황제 폐하께서도 진씨 가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분께는 분명 후속 수단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어떻게 장 공주 쪽의 신임을 얻은 건지 그게 이상하군요······.”

범한이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조정에 실망하게 된 건 분명 당신의 공인 것 같은데······ 무재, 나는 당신을 반란군이 되어 소란을 피우라고 교주 수군에 남겨 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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